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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윤재명 한인회장 임원단 발대식 (2007년1월 8일 한인회관)

 

 

 

프랑스한인회의 운영 및 활동들

 

프랑스한인회장은 2년 째가 되는 짝수 년 연말에 정기총회에서 회장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당선된 신임 회장은 자유재량에 따라 부회장, 상근직원, 사무총장 및 각 부서의 임원들을 직권 선임하며, 회장단은 전적으로 회장의 지휘, 감독 하에서 움직인다. 다만 감사 2인과 선거관리위원은 회장 선거 때 총회에서 선출한다. 

프랑스한인회는 회원들로부터 갹출한 연간 책정 한인회비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여기에 자영업이나 주재상사 및 기타 한인 단체들의 기부금, 매 2년마다 회장 선거 시 후보자가 내는 공탁금(3000유로) 등이 있다. 이외에 회장단의 활동 역량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보조금, 재외동포재단, 지방자치단체 등의 후원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거둬들인 한인회 수입금은 우선 상근직원 급여, 한인회관 관리비, 재산세, 주민세, 보험료, 통신 및 전기료 등 기본 지출에 사용되고 나머지는 필요와 상황에 따라 회장의 재량으로 지출한다. 예를들어, 한글학교 후원금, 유럽체육대회 참가지원비, 한인회 자재기구 구입비, 한인회보 복사 및 우송료, 연례행사 및 기타 한인회가 조직하는 행사 및 활동비용 등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적인 지출이 아니므로 회장의 재량과 의지에 따라 지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사용 내역은 연말에 회계 감사를 통하여 감사를 받고, 정기총회에서 한인사회에 발표한다.

 

프랑스한인회가 연례적으로 진행 해오고 있는 정규 행사 및 활동으로는 3.1절 기념식, 매년 5월의 한인체육대회와 야유회, 가을의 코리안페스티벌, 매 연말마다 진행되는 정기총회 및 송년회 행사다. 한인체육대회와 야유회는 1990년 초부터 별개의 행사로 진행돼 오다가 2001년부터 하나로 통합했다.

몇 몇 정기적인 연례행사를 제외하고는 1980년대 이전의 한인회 행사나 활동은 기록상으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세 가지 요인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60~70년대 당시 한인회가 아직 그 기반상의 미약함으로 별다른 행사나 활동들을 주최하지 않았을 수 있고, 이러한 행사와 활동들을 조직했음에도 당시의 ‘교민신문’과 같은 기록 매체들의 부재로 인해 기록상으로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1995년 파리에 150년만의 폭우로 18년간의 한인회 자료가 침수되어 소실된 것은 한인사회로서는 뼈아프다.

198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는 정기 행사 외에도 매년 크고 작은 행사들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당시 한인회의 행사들을 살펴보면,

생활불어 강좌(1982), 법률상담(1982), 한인의 날(1984), 교민 바둑대회(1991), 삼일절 테니스대회(1993), 한인회장 배 골프대회(1994), 재불한인 예술제(1995), 무료법률 상담(1996), 설맞이 민속의 날(1997), 한인회장 배 테니스대회(1997), 북한 동포 및 조선족 돕기 운동(1999), 북한돕기 자전거 대행진(2000) 등이 있다. 

이들 행사들은 대개 1, 2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중단의 이유로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매 2년마다 신임 한인회장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임원진 구성과 함께 사업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 때, 전임 회장단에서 이끌어온 행사나 활동들을 그대로 이어나갈 것인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신임 회장단의 결정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교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호응을 얻는 행사나 활동, 예컨대 ‘재불한인 체육대회’나 ‘무료법률 상담’ 등, 그리고 삼일절과 같은 국가를 위한 의무적인 행사는 어느 회장단에서든 그대로 준수해 나가고, 거기에 신임 회장단에 따라 다소의 새로운 사업을 개최하는데, 이것은 다음 회장 대에 이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이렇게 중단되는 가장 큰 동기로는 우선 재정적 문제를 들 수 있다. 예컨대, 1995년 라디오 프랑스 회관을 빌려 성대히 막을 올린 제1회 ‘재불 한인예술제’는 한국인과 프랑스인 등 5백여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으나 결국엔 라디오 프랑스 회관을 빌린 세 값을 충당치 못해 한인회에 큰 재정적 타격을 입혔다. 

프랑스한인회의 재정적 기반이 원래 빈약하다 보니 이처럼 재정적 부담을 주는 행사나 활동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교민들의 소극적인 참여, 한인회의 구심력 미약 등을 중단의 기타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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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15구 Croix Nivert 의 재불한인회 사무실

 

 

한인회의 재정적 어려움과 한인회관의 건립

 

프랑스한인회는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늘 재정적 빈약함 속에서 운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우선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한인회를 밀어줄 재정적 여유를 가진 교민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 한 가지 이유가 되겠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한인 동포들이 한인회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데 있다. 이러한 무관심은 한인회비 납부를 소홀히 하게 되고, 한인회비에 거의 재정적 의존도를 두는 한인회 운영은 당연히 빈약하고 궁핍한 상황을 면할 수 없게 된다. 

한인회 재정이 이처럼 빈약하다 보니 모처럼 의욕 있는 회장이 선출되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보려고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에 이르게 되고 성공한 케이스가 과히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한인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한인회관이 없어 사무실을 전전해야 했던 점이다. 임원들이 변변히 모일 장소가 없어 파리 시내 카페를 이용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회장의 집을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가까스로 월세를 얻어 사무실로 사용하기도했지만, 재정적인 부담이 컸고 이로인해 활동이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어려움이 반복되었다.

때문에 한인회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교민들 중에서는 한인회가 교민들을 위해 하는 일이 없으니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여 2000년대 초반까지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악순환을 거듭해 온 것이 프랑스한인회의 난제였다. 

 

1992년, 21대 한인회장에 취임한 이철종은 평화통일 자문위원을 겸직하면서 한인회를 맡게 되는데, 그는 회장이 되자마자 한인회 사무실 마련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개인적인 노력을 병행하는 동시에 바자회 상조회 등을 통해서 가열찬 모금 운동을 벌여 3년여 만에 100만 프랑을 만들어서 15구에 (83 Rue de la Croix Nivert 75015 Paris) 한인회관을 구입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인회가 26년 여의 떠돌이 설움을 벗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니 프랑스한인회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10월 1일 한인회관 개관 당시에는 장선섭 대사가 현판을 달고,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해 테이프를 끊으며 축하했다. 타국인 프랑스 파리에 이제야 한국 교민사회의 구심체가 굳건하게 자리 잡혔다는 데 대한 감격으로 참석자들 상당 수가 눈시울을 적셨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IMF와 한인사회의 암흑기

 

한인회관 구입은 프랑스한인회를 활성화시키고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철종에 이어 회장에 당선된 회장들은 처음엔 의욕적인 출발을 보였지만, 한인회를 한인사회의 구심점으로 만들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어렵게 한인회관을 구입해 놓고도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한인회는 암흑기와도 같은 시기를 지나게 된다.

그 한가운데는 IMF의 재정위기라는 폭풍이 고국인 한국과 한인사회를 엄습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오는 단체 관광객들에게 의존하던 한인식당과 여행사들이 줄줄히 도산하거나 타격을 입었고, 송금이 끊긴 유학생들은 몇 달씩 집세를 못 내다가 야반도주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 과정에서 24대 한인회장 정대일은 개인사업의 어려움으로 회장직을 중도 사퇴했고, 부회장이었던 박홍근이 회장을 위임하기도 했다.

25대(이승근) 26대(이관영) 27대(김현주) 회장에 이르기까지 프랑스한인회는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했다. 

2005년(28대 김성문 회장)에 이르면서 IMF도 극복되고 한인사회도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비로소 한인회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프랑스한인회의 난제들

 

프랑스의 한인사회는 유럽 및 다른 국가의 한인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구성원의 70% 이상이 유학생이라는 점과 거주하는 한인들의 70% 이상이 파리와 파리 인근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파리는 유럽에서 한인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 한인타운이라 부를만한 한인밀집 지역이 형성되지 않았다. 파리의 한인들이 동질성을 지닌 동포들끼리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하지 못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프랑스인들의 특징인 자유분만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그대로 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파리에 거주하는 많은 동포들이 이러한 사조에 동화되는 경향의 일면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한국인의 일반적인 습성과 기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000년대 초반의 파리의 한인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비유하자면 모래알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파리 한인사회의 이러한 특징은 그 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해야 하는 프랑스 한인회의 운영문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당시 파리의 한인사회와 프랑스한인회의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했을 때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다. 

첫 째, 한인회에 대한 한인들의 무관심이다. 프랑스 특유의 개인주의적 사조의 영향,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는 한인들의 속성이, 중심 단체인 한인회가 어떠한 소속감이나 공감대도 주지 못한다는 현실 등과 뒤얽혀 있는 실정이다. 

두 번째로 파리 한인사회의 경제적 취약성 때문이다.

파리 한인사회의 영세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다. 

한인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유학생들로 경제활동이 미약하고, 프랑스에서 20~30년간 열심히 일했어도 내로라고 자리잡고 사는 한인동포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에서의 자영업의 토양은 참으로 척박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이민사회가 아닌데다 아직 교민 1세대에 불과하고 더욱이 사회주의 사회의 난점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자연 한인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자기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한인들이 어떻게 한인회장으로 출마해서 한인회를 위해 봉사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한인회장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책도, 명예직도 아니고, 다만 희생만을 강요하는 자리이기에 아무도 그 직책을  맡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당시 파리 한인사회의 현실이었다. 

2년마다 실시하는 회장 선거일이 다가와도 막상 자발적으로 나서는 후보자가 없어 막판에 떠넘기기 식으로 어설프게 회장을 선출 시키는 모양새가 되고, 이렇게라도 선출된 회장이 일단 의욕과 신념을 가지고 한인회를 위해 봉사해 보자는 마음을 가져보지만, 또 하나의 난제, 재정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세번째로, 한인회관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렵게 건립된 한인회관이 실제로 그 쓰임새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점이다. 한인회관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관리비, 보험, 기타 세금 등 최소한의 고정적 지출을 예상해야 하는데, 이러한 지출에도 불구하고 한인회관이 동포들의 정보 제공 및 교류의 장 그리고 생산적인 공간으로 활용되지 못한 점이다. 이는 한인회관이 30m2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어서 사무실로 쓰기도 애매하고 세미나실이나 한인 예술가들의 전시공간으로도 쓸 수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애물단지 신세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던 25대~27대 한인회기 중에는 궁여지책으로 상근직원을 두지 않거나 오랫동안 한인회관 문을 닫아놓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발생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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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재불한인체육대회의 한 장면 (2000년 5월 1일 뱅센느 숲)

 

 

‘한인사회의 역사속으로’는  프랑스한인100년사에 소개할 자료 중 일부를 발췌해 소개합니다. 내용중 오류나 정정 내용이 있으면 프랑스존 이메일로 제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한인사에 소개할 중요한 자료가 있으신 분들의 제보도 기다립니다.

이메일 제보 :  francezone@gmail.com

 

 

【프랑스(파리)=한위클리】 이석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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