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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69세)의 신작소설 ‘네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Pour que tu ne te perdes pas dans le quartier)’이 베스트셀러로 부상되면서 프랑스 도서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 10월 2일 초판 6만부가 발행된 신작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이 전해진 10월 9일 이래 선풍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이미 제2판 10만부가 인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10월초까지만 해도 프랑스 문단에 우울한 잿빛 먹구름이 드리웠던 편이다. 정치부 기자이자 작가인 에릭 제무르의 에세이집 ‘프랑스 자살’과 올랑드 대통령의 전 동거녀 트리에르벨레르 부인의 저서가 도서시장을 독차지했던 때문이다. 특히 올랑드 대통령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보복성 저서가 40만부 이상 팔리며 화제가 되자 정작 읽을 만한 신간소설들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며 강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마저 흘러나왔던 상황이다.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렇듯 문단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전반에도 예술, 문화 대국으로서 옛 휘광을 되살리며 기를 살려주는 활력제로 작용했다. 경제, 재정위기에 정치위기까지 겹쳐 잔뜩 기가 꺾어진 침체된 분위기에서 그나마 불문학의 휘광은 건재하다며 언론과 여론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1901년 쉴리 프뤼돔 이래 15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미국(12명), 영국(10명), 독일과 스웨덴(8명)을 제치고 이 분야에서 세계챔피언의 입지를 재확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14년 노벨경제상도 프랑스인 쟝 티롤(Tirole)이 수상했지만 노벨문학상의 아우라에 묻혀버린 분위기이다. 




▶ ‘우리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 




모디아노의 첫 소설은 1968년 발표된 ‘에트왈 광장(Place de l'Étoile)’이다. 광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명소이나, 작품에서는 2차 대전 당시 유태인들이 왼쪽가슴에 부착했던 ‘노란색 에트왈(육각별)’을 상징한다. 


모디아노는 이 자서전적인 소설을 발표한 이후 45년 동안 세월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2차 세계대전 독일점령하의 프랑스 사회와 여기에 연결된 우울한 가족사, 부모의 부재와 방치로 외롭게 성장했던 저자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작품배경으로 집필활동에 전념해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우리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라고 칭송했다. 모디아노는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묻자, “45년 전부터 같은 내용의 책을 집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스웨덴인 손자덕분이다”라고 겸손하게 피력했다.


모디아노의 작품세계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년기의 고독, 망각,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집착, 전쟁 전후세대이며 베일에 가려진 등장인물들로 둘러싸인다.


신작소설 ‘네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은 제목부터 주인공의 우울한 유년기와 깊은 연결고리를 맺는다. 흔히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길을 잃지 말라며 당부하는 어머니의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소설은 ‘대수롭지 않아(Presque rien.)’라는 짤막한 두 단어로 시작한다. 늙고 고독한 소설가이자 기이한 이름을 지닌 주인공 다라가느(Daragane)는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과자 한 조각처럼, 대수롭지 않은 이 전화벨 소리는 결국 다라가느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긴 내면의 탐험여행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시발점이 된다.


그는 부주의하게 수첩을 분실하고 이를 통해 미스터리한 한 커플을 만난다. 이 커플은 그의 수첩에 적혀진 토르스텔이라는 인물을 추적하고 있던 중이다. 다라가느의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토르스텔은 누구인가? 주인공은 잃어버린 수첩을 되찾으며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인물의 정체를 쫒다가 결국 그의 기억력은 1951년 자신이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우울한 소년기를 보냈던 파리 북쪽근교 생-뢰-라포레(Saint-Leu-la-Forêt)의 집으로 멈춰진다. 그의 회상은 어머니로 여겼던 여인이자 사모했던 연인 아스트랑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Pour que tu ne te perdes pas dans le quartier’라는 문구는 이 여인이 어린 다라간느가 파리에서 길을 잃지 말라며 남긴 쪽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 기억상실증을 거부하는 등장인물들




‘네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의 주인공은 반쯤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다. 역시나 기억력이 퇴색된 등장인물들을 통해 불확실한 추억의 단편들을 모아 한 인생의 짜깁기에 나서는데, 그 기억의 단편들이 정확한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1978년 콩쿠르문학상 수상작이자 모디아노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Rue des boutiques obscures)’의 주인공 ‘나’ 롤랑은 아예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다. ‘기 롤랑(Guy Roland)’이라는 이름은 10년 전 친구이자 고용주 위트가 지어준 것이며, 이후 위트의 흥신소에서 근무해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 


은퇴를 결심한 위트가 니스로 떠나며 롤랑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묻자, 그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나서겠노라고 대답한다. 바로 소설의 출발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Je ne suis rien.)’라는 짧은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과거를 망각한 현재의 ‘나’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립탐정이 실종된 사나이의 발자취를 추적하듯, 롤랑은 자신의 진짜 이름과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과거의 신기루를 쫒기 시작한다. 


결국 36년 시차를 두고 태어난 롤랑과 다라가느는 각각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과거를 추적하며 사립탐정처럼 조사를 펼치는데 형사추리물처럼 서스펜스마저 가미된다. 실제로 모디아노는 조르쥬 시므농처럼 형사추리물을 집필하고 싶었노라고 밝혔다. 추리소설이 행방불명, 인물추적, 망각, 미스터리한 과거추적 등이 주요 테마를 이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디아노의 소설은 추리소설과 달리 결말이 명백하지 않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주인공의 진짜 이름으로 추정되는 기이한 이름들 10여개가 연속적으로 나열될 뿐이다. 주인공이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떠나야할 마지막 종착지는 로마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가라는 사실만이 밝혀진다. 그의 진짜 이름과 신분을 알고 싶어 소설을 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간 독자의 기대도 무산되고 만다. 


‘네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의 늙은 소설가의 경우도 증폭된 수수깨끼만을 남겨놓는다. 주인공은 잊고 있던 과거의 ‘나’를 찾아 접근하면 할수록 그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저자는 보고 듣고 이해한 세상을 작품에 담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듯하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남겨놓는다. 


주인공들이 사립탐정처럼 펼치는 추적조사는 점차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와 정체성을 되찾고자하는 고독한 집념으로 응집된다. 여기에서 저자는 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문을 제시하고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우리들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살아가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아닐까? 하는 자문이다.




▶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




모디아노는 말주변이 어눌한 편이며 매스컴과 거리를 두고 지내는 은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저널리스트이자 문학평론가 베르나르 피보가 2001년까지 담당했던 프랑스TV 2 문학프로에 초대된 적이 있는데, 더듬거리는 말주변으로 시청자들에게 따분한 인상마저 남겨놓았다고 한다. 


반면 모디아노의 간결하고 명료하며 절제된 문체는 높은 문학성을 인정받는다. ‘네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은 150쪽으로 길지 않으며, 불어를 배운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쉽사리 불어원본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현재에서 과거, 과거회상에서 더 먼 과거회상들이 겹쳐지는 까닭에 혼동하지 않기 위해 동사시제 현재, 반과거, 단순과거, 복합과거, 대과거 용법에만 주의하면 된다. 문체가 명료하여 읽기 쉬우나 수수깨끼 같은 등장인물들로 인하여 그 내용이 쉽지만은 않다는 분석이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모디아노의 작품세계에서 동사시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파리의 거리들이다. 작중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는 파리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파리라는 도시자체는 한 등장인물처럼 독특한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불어원본으로 읽다보면 독자 나름대로 알고 있는 파리의 거리들을 접하게 될 것이며 이때의 느낌은 더욱 강하게 와 닿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 라고 소리치는 인간형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향해 조용히 속삭일 줄 아는 인간형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 계절에 한번쯤 빠져볼 만한 도서이다. 




【한위클리 / 이병옥 ahpar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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