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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누드모델 로디온 파브로브스키(Rhodion Pavlovski, 78세)를 따뜻한 햇살이 번지는 몽파르나스 거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로디온이 즐겨 찾는다는 몽파르나스 거리는 1900년부터 프랑스 지방출신 화가, 샤갈,수틴, 피카소 등 외국출신 화가들이 아지트로 삼았던 곳으로, 근처에는 누드화 아틀리에로 명성 높은 라 그랑드 쇼미에르(L'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가 자리잡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출입했던 이 전설적인 아틀리에서 포즈를 취하기를 무척 즐긴다는 로디온은 자신이 파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베테랑 누드모델이라고 소개했다.

 

 

- 언제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하셨는지요?

 

1953년 14살 때부터입니다. 아버지가 조각가였는데, 모델을 채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제가 대신 모델노릇을 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경기 메달을 조각하셨습니다.

아버지는 1923년 프랑스로 이민했던 러시아인으로, 1937년경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군대에 복무하면서 육상 종목에서 프랑스 챔피언이 되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시 프랑스군으로 참전하셨다가 독일군 포로가 되었는데, 이때 독일에서 조각 아틀리에의 모델로 포로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조각예술을 터득한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로 귀국하자 본인도 직접 조각을 하셨습니다.

나는 피카르디 지방에서 태어났고, 남들보다 빨리 좋은 성적으로 바칼로레아를 취득했으나 학업에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제2 모국어인 러시아과를 다니며, 파리 보자르, 줄리앙 아카데미, 파리 아르데코 등 미술학교에서 모델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 주요 모델 활동을 꼽는다면?

 

라 그랑드 쇼미에르를 비롯하여 파리 보자르 등 미술학교 학생들, 입학준비과정의 학생들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민간 아틀리에서도 일합니다. 학교 방학기간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포즈를 취하는 편이며, 간혹 주말에도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방학 때는 주로 개인아틀리에서 일합니다.

미술학교나 입학준비반에서는 누드화 하나를 단숨에 그려내도록 1분, 2분, 5분, 10분 단위로 포즈를 자주 바꿉니다. 피카소가 데생을 재빨리 단숨에 스케치했던 능력을 지녔는데, 학생들도 이런 훈련을 받는 것이지요. 1분, 2분 단위로 포즈를 취할 때는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한 춤동작을 천천히 혹은 빠른 움직임으로 연속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이때 평소에 연마하고 있는 무술이 크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평소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나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여가활동으로 수영을 즐깁니다. 물만 마시는 단식을 8일간 실행할 때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치열한 서바이벌 생존훈련을 받았는데, 자갈과 무기가 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물만 마시며 8일을 견디는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술을 꾸준히 연마하고 있습니다. 시베리아 타타르(Tartar)족에게 유래되는 무술로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았습니다. 일종의 시베리아 샤머니즘과도 연결된, 정신과 육체의 일체를 중요시 여기는 운동입니다. 이 무술을 실천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모델로서 포즈를 취하는데도 크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 인상에 남는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만남이 있다면?

 

1957년 자코메티의 모델로 4차례 포즈를 취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누드화가 아닌 초상화나 팔의 근육, 손, 발 등을 스케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첫날은 블루마린 색깔의 긴 외투를 입고 그냥 반드시 서있는 포즈를 취했고, 그 다음부터 몸에 들어붙은 짧은 운동복 차림으로 작업했습니다.

파리 아르데코 미술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중에 이태리인 동료모델이 자기를 대신해서 자코메티의 집에 가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거지요. 당시 자코메티는 몽파르나스에서 멀지 않은 14구 이포리트 맹드롱(Hppolyte Maindron)거리에 거주했습니다.

아! 그런데 자코메티와의 작업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모델에게 강한 에너지와 침착한 정체성을 표출하는 포즈를 요구하면서, 본인은 정작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담배도 많이 피웠습니다. 작업 중에는 아주 까다로웠는데, 일단 작업이 끝나면 다정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근처 비스트로에 초대할 만큼 너그러움도 지녔습니다. 그런데 4번 함께 작업을 하고보니 그의 성깔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었습니다. 그때 자코메티는 무명이었고, 나는 불과 18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우 장-폴 벨몽도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조각가 폴 벨몽도(1898-1982년)의 모델로도 한동안 일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조각가의 모델로 일을 하는데, 유명예술인이나 미술학교 교수들 중에는 간혹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도 있습니다.

 

몽파르나스의 한 유명한 조각아틀리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그 아틀리에의 조각교수는 대단한 명성을 지닌 유명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몰래 술을 마셨던 알코올 중독자였어요. 그는 모델이 잠깐 휴식을 취할 때마다 근처 비스트로에 달려가 맥주를 마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그가 술에 잔뜩 취하여 모델이 포즈를 취하는 단상을 마구 돌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던 내가 단상 아래로 떨어져 그 밑으로 끌려 들어갈 뻔했습니다. 목숨마저 잃을 뻔했던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다행이도 연마한 무술로 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2003년에는 세르쥬 스트로스베르그(Strosberg)의 모델이었는데, 나의 초상화가 담긴 화폭(Sagesse II, 96 x 140cm)이 4만 유로에 팔렸죠. 
(그는 인터뷰 장소에  스트로스베르그의  작품집을 들고 나와, 자신의 모습이 담긴 화폭들을 직접 펼쳐 보여주며 상당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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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드모델의 보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보통 일반 아틀리에서 시간당 20 내지 25유로 받습니다. 미술학교에서는 정식으로 소득세 신고하고 3시간 단위로 47유로를 받습니다. 아주 적은 보수이지요.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자녀 4명을 둔 가장으로 ‘견딜만한 가난’을 유지해온 편입니다. 젊었을 때는 틈틈이 러시아어 번역가로 활동했고, 한 유명 프랑스 작가의 비서로도 일한 적이 있습니다.

 

- 파리 지역에 누드모델은 몇 명이나 되는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는 없습니다. 누드모델을 총괄적으로 지원하는 공식기관이 없어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정적으로 일하는 직업모델은 80명 내지 100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르바이트 혹은 취미로 간간히 포즈를 취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300여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요즘 공연예술 분야에 별로 경기가 좋지 않아 연극배우, 무용가, 코미디언들이 파트타임으로 대거 누드모델로 진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 중에는 몇 번 포즈를 취하다 그만두기도 하고, 또 다른 신참내기들이 누드모델이 되는 등 아주 유동적입니다. 남성 모델도 많이 늘어나 내가 알고 있는 숫자만 해도 약 40여명 됩니다. 여성모델 연령층도 1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아주 다양한 편이지요.

내가 잘 아는 30대 마리옹 엑스페르 라는 여성모델은 본직이 불어선생님입니다. 취미활동으로 누드모델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미술계에 입문하여 데생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는 누드 모델로 간간히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동시에 데생 선생님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학생들 앞에서는 포즈를 취하지 않습니다.(웃음)

 

- 포즈를 취하는 순간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스치나요?

 

포즈를 취할 때 오직 자세에만 정신을 집중합니다. 머릿속은 완전히 비워둡니다. 시간의 흐름마저 멈춰지는 순간이지요. 아주 자연스러운 몸짓을 취하는 오브제로서만이 존재할 뿐,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지요.

때로는 상황에 따라 포즈를 취하면서 머릿속으로 멜로디를 만들어냅니다. 그 선율에 맞추어 동작을 연출해내기도 합니다. 샤머니즘에 가까운 미스터리한 음률이기도 하지요. 간혹 작곡가처럼 그 멜로디를 오선지에 옮겨놓기도 합니다.

 

- 누드모델에게 요구되는 특별한 자질이 있다면?

 

물론 옷을 벗는다고 무조건 누드모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드모델 중에는 우리들이 보기에도 엉터리가 있고, 정말 멋지게 포즈를 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누드모델과 그리는 사람 사이에 특이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여기에 성적인 정서가 스며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모델은 자신의 머릿속을 완전히 비워야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나’라는 인간과 성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부재의 경지에 도달해야합니다. 한 오브제로서 그 장소에 놓여있으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열정적으로 그림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도록 창의력과 상상력도 동시에 고취시켜줘야 합니다. 오브제라 해서 감자포대로 변신해서는 안 되니까요.

훌륭한 누드모델이 지녀야할 또 다른 중요한 재능은 재빠른 순발력입니다. 그림자 등 어떤 효과와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인지를 재빨리 판단하여 포즈를 결정해야합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적어도 2,3년 경험이 필요합니다. 완숙한 모델로서 최고경지에 오르려면 1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드모델도 곡예사나 다름없습니다. 다음 포즈를 신중하게 빨리 결정해야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줄에서 떨어지는 곡예사와 같이 몸에 충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 누워있는 포즈가 편하다고 생각 없이 그냥 드러누웠다가는 몸이 삐꺽하면서 나중에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경험 많은 모델과 신참내기와의 차이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아직까지 누드모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는 없습니다. 1950, 60년대 만해도 제대로 포즈를 취했던 직업모델은 극소수였으나, 1972년 이후부터 자질을 제대로 갖춘 직업모델들이 대거 배출되고 있습니다. 아티스트들은 그래도 경제적으로나 실력양성에서 국가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모델들은 완숙도에 오르기 위해 각자 알아서 혼자 부단히 단련하고 노력해야합니다. 나는 다양한 포즈를 만들어내기 위해 선거 활동하는 정치인들의 제스처도 평소에 눈여겨보았다가 모방하기도 합니다.

 

- 본인의 누드화를 바라보면 어떤 심정이 드나요? 또 언제까지 누드모델로 활동하실 생각인지?

 

간혹 초상화나 누드화를 나에게 직접 기증하는 아티스트들도 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상당수 서랍에 넣어 소장하고 있지만 꺼내서 다시 들여다보지는 않습니다. 전시회에서 나의 모습을 담은 누드화를 보면,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인, 그저 하나의 그림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현재 나는 78세이며, 시력은 나쁘지만 체력은 좋은 편입니다. 언제까지 누드모델로 활동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아직 나 자신에게 묻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든 연락주시면, 한국아티스트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멋지게 포즈를 취할 것입니다.

 

 【한위클리 / 이병옥 ahpar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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