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18] 공항에서 만난 짝사랑 여대생과 결혼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미주리 사우스웨스턴에서 미시간 주립대학으로 옮겨온 나는 밤이나 낮이나 온통 공부에만 매달려야 했다. 죽기살기로 공부하지 않고는 과목을 따라갈 수도 없었거니와, 어렷을 적 책읽기에 푹 젖어들었던 체험이 되살아나면서 한국전란으로 굶주려 왔던 학구열에 불이 붙은 탓도 있었다. 당시 장래 전망이 밝다는 공학이나 경제학, 정치학 등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농학 공부는 내 소명이었고 숙명이었다.

1950년대 말 미시간 주립대학은 이미 농학 전 분야에서 미국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마음만 다져 먹으면 어느 분야건 심도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전공인 농공학과 기계학은 물론이려니와 토양학, 교배학, 번식학, 축산학 등의 과목을 닥치는대로 섭렵해 나가기 시작했다. 배울 만한 것은 뭐든 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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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간 주립대학 시절. ⓒ 한도원
 
특히 농학분야 중 번식학 과목을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담당 교수의 칭찬을 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소, 돼지, 염소, 닭 등 동물들의 건강상태를 육안으로 감정하는 실습에서 매우 정확하게 동물들의 상태를 짚어내는 눈썰미 덕분에 ‘블루 리본’ 메달을 받은 적이 많았다. 애완동물을 식구처럼 여기는 문화권에 살고 있는 미국 친구들을 추월하는 감정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4년 내내 나는 공부에만 매달려 사는 와중에도 여름 방학 때에는 캠프 미니왕카와 미시간 중부의 농가에 가서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학비와 생활비 전체의 후원을 약속한 윌리엄 댄포스 재단에 요청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모든 것을 거기에만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기숙사와 학교만을 왕래하던 생활에 벗어나 여름 한철에 자연 속에 파뭍혀 일하면서 삶의 지혜를 몸소 터득하는 일이 어느덧 체질화 되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자동차산업 도시로도 유명한 플린트 인근의 축산 농가에서 한 여름 내내 소젖을 짜고 큼지막한 마른 풀 더미를 싸일로에 넣어 돌리는 작업은 힘들고 고되었다. 밤늦도록 공부하던 습관이 오래 밴 터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축사로 나가서 먼저 젖 빼는 기계를 깨끗이 닦아내고 수십마리의 젖소에서 젖을 빼내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와 끈기를 필요로 했다. 캠프 미니왕카의 아르바이트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와 ‘먹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자연 속에서 깨닫는 것은 밀폐된 공간에서 연마하는 학문에서 얻는 깨달음과는 또다른 것이었다. 전공이 농학이었던 탓도 있지만, 평안북도 후창 내 고향에서 눈과 귀와 마음으로 안겼던 자연의 품은 어느덧 내 삶의 원기소와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후에 선선한 가을학기에 새로운 기분으로 공부하는 맛은 아는 사람만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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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프 미니왕카에서 스태프들과 함께. 나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던 당시에도 매년 여름 캠프 미니왕카에 가서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공항에서 와이셔츠 선물로 나를 배웅한 이화여대생 김명연이 유학을 온 참에 프로포즈했다. ⓒ 한도원
 
결국, 나는 미국에 온지 5년만인 1960년 봄에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농학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졸업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교사로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미시간 주립대학 주니어 또는 시니어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캠프 미니왕카에서 그해 여름에 나는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 방문한 ‘귀빈’을 만나게 되었다. 일제시절부터 교육자로 여성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박인덕 여사였다.

강연 겸 견학차 캠프 미니왕카에 온 박인덕 여사는 자신이 설립할 학교의 교사 자리를 제안했다. 그렇찮아도 귀국후 일자리를 걱정하고 있던 터에 매우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녀는 농기계학이나 농공학은 써먹을 데가 없다며 차라리 대학원에 가서 축산학을 전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유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는 하나 당시 한국의 상황으로는 여전히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고, 장래의 직업이 어느정도는 윤곽이 그려진 것으로 판단한 나는 같은 대학에서 석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왕복 1천마일의 ‘구애 대장정’에 오르다

그리고 석사 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나는 뜻하지 않게 일생일대의 ‘횡재’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횡재는 잠시 잠깐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적으로 극복한 것이었으나, 이번의 횡재는 일생을 두고 계속될 횡재였다.

그 횡재는 미시간의 봄날에 찾아왔다. 여의도 공항에서 진한 감동을 주며 나의 기억 저장소에 담아 두었던 여자가 갑자기 캠퍼스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명연, 공항에서 떠나던 날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한 이화여대생이었다. 노라노 양장점에서 구한 새 와이셔츠를 수줍게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 보냈던 그녀를 나는 잊은 적이 없다. 북에서 혈혈단신 탈출하여 고아처럼 지낸 오빠 친구가 유학을 간답시고 나와 서 있는데, 그 초라한 모습이라니. 그녀는 내가 입고 있던 낡은 와이셔츠에 너무 가슴이 아팠었다고 한다.

미주리 주립대학에 막 유학을 왔다는 그녀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스트 랜싱에 왔다고 했다. 5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주말 피크닉 장소에 그녀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난리가 났다. 한국 여자 유학생은 고사하고, 한국 아줌마 조차도 보기 힘든 대학 캠퍼스에 묘령의 여학생이 나타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1시간 반 거리의 디토로이트 공항에 한국 여자가 내렸다더라는 소식만 들어도 서로 마중을 나가려고 안달이던 유학생들이었다. 그날 피크닉은 김명연이라는 여학생의 눈길을 잡기 위한 피크닉이 되고 말았고, 나는 갑자기 ‘의혹’과 ‘시샘’의 표적이 되었다.

그녀를 미주리로 떠나 보낸 며칠 후 50불을 주고 중고 스터드베이커(Studbaker)를 구입했다. 그리고 기나긴 1000마일의 ‘구애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매주말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 마자 미시간의 이스트 랜싱에서 미주리 스프링필드까지 차를 몰았다. 무려 500마일, 하루종일 걸리는 거리였다. 그곳에서 1년 반 가량 유학생활을 했던 나는 하루나 이틀 친구 집에서 머물며 그녀를 만나고는 일요일 밤 늦게 미시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공부에 미친 것 만큼이나 그녀에게 조용히 미쳐있었다. 말이 500마일(805킬로미터)이지 부산에서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는 거리보다 먼거리다. 서울~부산 거리(약 430킬로미터)로 치면 약 두 배 되는 거리를 주말에 두차례 왕복한 셈이다. 모두가 바위를 뚫을 만한 젊음 덕분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를 빼 놓고는 매주 나는 왕복 1000마일의 거리를 오가며 속을 태웠다. 신기하게도 1962년도를 전후로 미국의 유명한 혼성그룹인 피터 폴 앤 메리가 부른 ‘500마일(500 miles)’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쨋거나 나는 500마일 거리를 중고차로 왕복하며 그녀를 만났지만, 단 한마디도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학벌도 학력도 별볼일 없고, 장래도 불확실한 내가 아닌가. 그녀는 누군가. 부친은 정부 고위관리에,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미모의 유학생이 아닌가. 연애결혼이 흔한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양가집 처녀라면 눈들이 높아서 확실한 집안의 확실한 학벌.학력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 아니면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공부를 하러 왔다’고 못을 박아 말할 만큼 단단한 방호벽을 치고 있었다. 미시간의 피크닉 장소에서도 다른 유학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낙담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왕복 1000마일을 달리는 나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이지만, 속이 깊고 침착한 표정의 그녀는 늘 온화한 볼우물의 미소로 나를 대했다. 딴은, 그렇게라도 해서 만나 준 그녀가 고맙기는 했지만, 일방적인 사랑의 뒷맛은 늘 씁쓸하고 허허롭기만 했다. 종종 편지를 통해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겨우 ‘고백’이라는 걸 했으나 묵묵 무답 모르는 체 했다. 이제나 저제나 고백할 기회만을 보기로 하고 나의 말없는 구애 대장정은 계속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기회가 왔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미시간의 대 자연이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캠프 미니왕카의 녹음 속에서 약혼

석사과정 2년차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함께 아르바이트 일을 하자며 그녀를 캠프 미니왕카로 초대했다. 그녀는 주로 캠퍼들의 식사를 돕는 일을 했고, 나는 야드 워크를 했다. 모두가 제 각자의 침소로 돌아가고 풀벌레 소리만 정적을 깨던 어느날 밤, 그녀와 단둘이 캠프 안에 있게 되었다. 나는 거금 50불을 주고 마련한 다이어 반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단 한 문장으로 말했다.

“명연,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나는 공부하러 왔는데요.”

그녀가 언뜻 슬픈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입이 바싹 타고 목구멍까지 컬컬하고 뻣뻣해지는 듯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은 “내 손을 떠난 것이니 가지고 있든 버리든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나와 버렸다. 내 숙소로 돌아온 나는 스스로 ‘내 진심을 모아 단 한 번 뿐인 고백을 했으니 여한은 없다’고 되뇌이며 애써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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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주말마다 왕복 1천마일을 달린 '구애 대 장정' 끝에 결국 나는 김명연과 결혼에 성공했다. 그녀는 나의 평생 '횡재'가 되어 주었다. 사진은 약혼 후에 미시간 캠프 미니왕카 인근의 호수에서 찍은 사진. ⓒ 한도원
 
그로부터 며칠 후, 캠프가 거의 끝나가던 어느날 저녁, 그녀가 조용히 다가와서 내게 말했다.

“나 결혼 할래요!”.

왕복 1천마일의 거리를 수없이 달리면서 나의 진심을 전하려고 수년 동안 들인 공력에 대한 답변 치고는 너무 간결했다. 당시 미시시피 주립대학에서 강사로 있는 있던 한국 남자의 프로포즈를 물리치고 나를 택한 그녀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음날 캠프 식구들이 소식을 듣고 법석을 떨었다. 나의 ‘캠프 스승’인 와제피 아저씨는 온 캠프 스태프들에게 우리의 약혼 소식을 알리고 녹음이 우거진 미니왕카 숲속에서 조촐하게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우리는 내가 있던 미시간 이스트 랜싱에서 결혼했다. 결혼하던 당일의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결혼식 당일 이리저리 빌린 예복을 입고 바삐 식장에 도착했더니 주례를 서기로 한 교수가 신부에게 줄 결혼반지를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아차 싶었다. 약혼반지와는 별도로 결혼반지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급한 마음에 동네 액세서리 가게에 들러 아이들이나 끼고 소꿉놀이를 하는 장난감 반지를 급히 구해와서는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공부로 바쁘고 여유 돈도 없던 나를 아내는 따뜻한 미소로 이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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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주일 주말 미시간 이스트 랜싱에서 미주리 스프링필드까지 왕복 1천마일을 달린 구애 대장정 을 한 끝에 1963년 봄 김명연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1955년 여의도 공항에서 나에게 와이셔츠를 선물했는데, 나는 그때의 일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1963년 봄에 석사학위를 마친 나는 아내가 있는 미주리 스프링필드로 옮겨와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내는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가정경제학을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당초 우리는 한국에 들어가 살 계획을 세우고 공부를 먼저 마친 내가 한국에 먼저 들어가 직장을 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한국의 예정된 직장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봄학기에 시작하던 한국의 학제가 바뀌어 가을부터나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시간주립대학 시절 캠프 미니왕카에서 만나 자신이 설립한 학교의 교사직을 약속한 박인덕 여사는 “차라리 공부를 더 하고 오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오라는 얘기였다. 겨우 생활을 꾸려 나가는 형편이어서 꿈도 꾸지 못할 애기였다. 아내와 나는 닥치는대로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아내는 주로 지역 병원에 가서 간호사와 환자들을 돕는 일을 했고, 나는 레스토랑이나 컨비니언스 스토어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박사과정에 대한 꿈을 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분비학 석학,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뚜렷한 직장없이 6개월여를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혼자 몸일 때에야 목숨만 유지하면 됐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가장의 처지이니 얘기가 달랐다. 나는 평소 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에게 연락을 취해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무슨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 교수는 “미주리 대학 동물학과에 내가 잘 아는 유명한 교수가 있는데 편지를 써 줄 테니 찾아가 보라”고 했다. 6개월 동안 허송세월로 시간을 보내느니 그 교수에게 찾아가서 과목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예정에도 없이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 대학(University of Missouru)에 등록하여 생전 처음으로 내분비선학(Endocrinology)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는 이미 미국 학계에서 잘 알려진 찰스 터너(Charles Turner)였는데 은퇴를 앞두고 있는 노인이었다. 처음 과목을 들을 때만 해도 그 노장 학자로 인해 나의 진로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찰스 터너 교수가 가르치는 내분비선학 과목은 유난히 토론이 많았다. 어느날이었다. 어떤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토론 수업이 거의 끝날 즈음 내가 어떤 질문과 함께 코멘트를 했는데 터너 교수가 진지하게 듣는 표정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그가 “잠깐 보자”고 해서 연구실에 따라 들어갔다. 갑자기 나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미스터 도원, 내 과목에 매우 흥미가 있는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그는 놀랍게도 내게 연구 조교(Research Assistant) 직을 제안하면서 실험실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그의 제안은 나에게 박사과정을 하라는 권유였다. 나를 더욱 고무시킨 것은 연 4천불을 급료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파트 월세가 100불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부부에게는 횡재나 다름없는 거금이었다. 생활은 물론이고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며칠간 우리 부부의 진로를 이모저모로 고려하는 시간을 가진 후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초 대학만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던 나는 석사를 마친 후에 갖게된 6개월의 빈 시간에 삶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은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나의 ‘1천마일의 삶’에 보상을 안겨주며 학업의 또다른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재구성 : 김명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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