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6] 개성 피난민 수용소 탈출하여 서울로

 

'8달러의 기적'은 재미과학자 한도원 박사(84)의 일대기 입니다. 현재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도원 박사의 일생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존슨앤존슨에서 33년 동안 재직한 한도원 박사는 1989년 동료 존 맥과이어 박사와 함께 경구 피임약 '제3세대 신약'으로 일컬어지는 노개스티메이트를 최초로 발견.개발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한도원 박사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주


(올랜도=코리아 위클리) 김명곤 기자

 

북에서 타고온 고깃배에서 내린 우리가 처음 만난 남한 사람들은 경찰이었다.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들이 다가오더니 우리를 한 곳에 모이게 했다. 그러더니 유엔이 운영하는 피난민 수용소에 가야 하니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춰 따라 오라고 했다. 아직은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얼어 붙은 표정을 한 우리는 열을 맞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우리의 목적지는 개성인 듯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개성은 남쪽땅이었다.

여러 마을을 지나는 동안 논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과 동네 아이들이 짐짓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바라다 보았다.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우리가 지나쳐온 마을들은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로 느껴졌다. 매미와 왜가리 우는 소리, 논두렁에서 개구리와 맹꽁이 뜸북이 우는 소리가 엇박자를 맞추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막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논에는 드문 드문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었고 종종 어디에선가 ‘훠어이! 훠어이!’ 소리를 내며 새 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향 마을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살던 평북 후창은 지대가 높은 산간지역이긴 했으나 마을 앞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논농사를 크게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 메뚜기를 잡는다며 논두렁을 살금살금 걷다가 벼 속에 파뭍혀 피살이를 하던 동네 아저씨가 ‘거기 뉘김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소르라치게 놀라 도망쳤던 일이 떠올랐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디디티 세례’를 받다

두 세 시간쯤 걸었을까. 군데 군데 국방색 군대 막사가 둘러쳐져 있고 가건물인 듯한 벽돌 건물 몇채가 세워진 개성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다. 유엔이 운영한다는 피난민 수용소였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하자 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군들이 스프레이통을 들고 나타나더니 양팔을 위로 올리게 하고는 디디티(DDT)를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이와 서캐가 드글드글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디디티 가루를 뿌옇게 뒤집어 쓴 채 캑캑 거리며 간이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오랫만에 맛보는 빵과 수프를 받아들어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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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숭례문. 한국전쟁 전에 개성은 남쪽 땅이었다. 해주에서 황해바다를 건넌 나는 도착 즉시 경찰의 안내를 따라 개성 외곽의 탈북 피난민 수용소로 향했다. ⓒ 위키피디아 자료사진
 
피난민 수용소에는 우리 말고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며칠을 지내면서 곧 알게된 사실은, 서울에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기약없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상당수의 피난민들을 지방의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킬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난감했다. 나는 서울에 친적이라곤 없었고 어머니가 만나보라고 한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기껏 죽을 고생을 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기약없이 이리 저리 옮겨다녀야 하다니.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없었고 늘 배고품에 시달려야 했던 처지에 낙심 천만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수용소를 빨리 벗어날 기회가 찾아 왔다. 수용소에서 내 또래의 소년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서울에 친척이 있어서 연락을 해 달라고 수용소에 부탁했으나 소식은 없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다고 했다. 그는 어느날 막사 으슥한 곳으로 나를 불러내더니 귓속말로 자신의 탈출 계획을 넌지시 말해 주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친구에게 나를 끼워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 며칠 후 친구와 나는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수용소를 빠져 나와서는 기차역으로 내달렸다. 가는 중에 마주친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나 나어린 우리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다행스럽게 서울행 기차역에 도착은 했으나 수중에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던 우리는 도둑 기차를 타기로 했다. 개찰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기차가 서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서울행 기차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길게 늘어선 틈을 타서 우리는 허리를 숙인 채 재빨리 철제 울타리를 넘었다. 그리고는 막 열차에 올라 타려는 승객들 틈에 잽싸게 꺼어들었다. 서로가 서둘러 열차를 타려는 터에 우리를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친구와 ‘도둑 기차’ 타고 서울로

우리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차례 ‘쥐와 고양이’ 게임을 해야만 했다. 저만치에서 제복을 입은 검표원이 다가올라치면 뒤쪽으로 슬금슬금 도망치다가 화장실에 숨거나, 열차가 정거장에 서면 얼른 내려서는 출구쪽으로 걷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뒤돌아서서 다음 열차칸으로 옮겨타곤 했다. 가슴을 졸이기는 했지만 어린 마음에 은근히 장난끼가 발동했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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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에서 사귄 친구와 나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개성역에서 도둑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사진은 해방 당시 경인선. ⓒ 위키피디아 자료사진
 
서 너 시간쯤 달렸을까. 드디어 서울역에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열차가 역사 가까이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자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서울여억! 서울여억!”. 얼마나 듣고 싶었던 소리인가. 평안도 후창 내 고향에서부터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온 것이다. 산야를 해메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2년여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몽땅 털린 일과, 덜덜 떨며 쪼각배와 동력선에 올라 반 죽은 송장처럼 실려서 황해바다를 건너고, 디디티를 뒤집어 쓰고 낙심의 나날을 보냈던 수용소 생활 등이 언제적 일이냐 싶게 환희에 젖어들었다.

역사에서 걸어나오면서 본 서울은 듣던 대로 오가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고 크고 작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촌동네 소년들에 불과한 우리가 보기에 휘황찬란했다. 여기 저기 음식을 파는 장사꾼들이 즐비하게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엄청나게 시장끼가 느껴져 왔으나 눈요기만을 해야 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역사 화장실 세면대로 달려가 수돗물을 들이키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서울역 대합실 구석에서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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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서울역 모습. ⓒ 위키피디아 자료사진
 
다음날 아침, 친구는 삼촌 집을 찾아 나설 생각이라며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나는 친구의 제안이 고맙기만 했다. 다행히 친구의 삼촌 집을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친구의 삼촌은 우리의 갑작스런 방문에 깜짝 반가워 했다. 그는 걸판지게 점심밥을 차려 먹이고 자초지종을 듣더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산을 넘고 대해를 건너 북한을 탈출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경이로웠을 것이다. 점심을 먹는 중에 친구의 삼촌은 광화문 한 복판에 ‘서북청년단’이라는 단체가 있다면서 그곳에 찾아가면 숙식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점심을 먹는 즉시 나는 그 단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 곳곳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젊은 남녀 학생들이 전차에서 오르고 내리는 모습들,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길을 가는 노인들, 중절모를 쓰고 지나가는 중년 남성들, 양장을 맵시있게 차려입고 지나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엿이나 떡,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이 손님을 붙잡는 모습도 보였다. 종종 미군 트럭이 경적 소리를 내며 지나치기도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것 저것 구경하다 어럽지 않게 ‘서북청년단’이라는 간판을 내 건 건물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숙식 제공해 준다” 반공단체에 가입

노크를 하자 한 청년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북한에서 탈출한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손짓을 하며 나를 건물 안으로 들게 했다. 가구가 갖추어진 큰 방 안에는 많은 청소년들이 여기 저기 누워 있거나 삼삼오오 때를 지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우르르 곁으로 몰려 들었다. 내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내가 누구인지, 왜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를 대략 설명하자 모두가 놀라는 표정이었고 잘 왔다며 격려해 주었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청년들은 내가 서북청년단에 가입 서약을 하면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서북청년단은 북한 탈출자 중심의 극렬 반공단체였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일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로 했다. 당장의 배고품과 잠잘 곳을 해결해 준다니 고마울 뿐이었다.

별로 하는 일은 없이 불안하고 어수선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나에게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여러명의 청년들과 군용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를 질주하며 반공 구호를 외치거나 반공궐기대회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특정 사상에 빠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했지만, 부잣집 장남으로 곱게만 자라온 터에 사상 논쟁에 몸을 던져 외치고 다닐 만한 체질은 못 되었다.

더구나 북에 있을 때 그렇게 순진하기만 하던 어렷을 적 친구들이 ‘김일성 장군 만세!’, ‘자본주의 타도하라!’며 외치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무겁고도 거칠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왠지 싫었던 기억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쪽으로 온 내가 그 같은 사상싸움의 또다른 끝에 마주 서서 목소리를 높여야 하다니. 후창강 마룻턱에서 글썽이는 눈으로 마지못해 나를 떠난 보낸 어머니가 바라던 일이 결코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갈 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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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후 극렬 반공단체로 이름을 떨쳤던 서북청년단의 반공 시위 모습. ⓒ 위키피디아 자료사진
 
어느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곳을 미련없이 빠져 나왔다. 이제 찾아 나설 곳은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정말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라”며 일러준 아버지의 친구들 집이었다. 어머니가 당부하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끔찍하리만치 싫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상 싸움을 하러 남쪽에 내려온 것도, 내 한 목숨을 건져 보려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내려온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다. 평생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라곤 하지 않고 살아온, 집에서나 밖에서나 대접만 받고 살아온 처지였던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러 나서게 되었다.

찾아간 아버지 친구집… “북으로 다시 돌아가라”

우선 어머니가 건네준 아버지 친구들의 명단 가운데 맨 위에 이름이 올라 있던 분의 집을 찾아 나섰다. 몇 차례 이리 저리 물어서 아버지의 친구 집을 찾아냈다.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한옥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자 멋진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북한을 탈출하여 온 사정을 대략 말하니 반갑게 맞이하여 안으로 들게 했고, 한 상 그득히 밥상을 차려 주었다.

식사를 마치자 마자 그가 내게 한 말은 가히 충격이었다. 다시 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사선을 넘어 온 친구의 아들에게 다시 북으로 가라니.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행방불명되었고, 어머니가 고심끝에 나를 남으로 보내며 믿거라 하고 보내서 어렵사리 찾아 왔건만 간단하게 되돌아 가라는 말을 하는 그가 야속했다. 그는 나를 엮이고 싶지 않은 ‘골치아픈 존재’로 여기는 눈치였다. 첫번째 찾아간 아버지 친구집에서 넌지시 거절을 당하자 맥이 빠졌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친구 집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나 두 번째 찾아간 아버지 친구에 비하면 첫 번째 친구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두 번째 찾아간 아버지의 친구는 제법 큰 규모의 무역회사 사장이었다. 소파에 앉아 나에게서 건성건성 자초지종을 듣던 그의 눈빛이 매우 차갑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잠시 일할 곳과 머물 곳을 머뭇 머뭇 요청한 나를 길거리의 거렁뱅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모멸스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른 그의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어머니가 장남을 부탁할 정도였다면 그래도 가까운 사이였을 터인데… 세상인심이 각박하다는 것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막막하고 처량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선뜻 세 번째 아버지 친구집을 찾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밖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 <코리아 위클리> 제휴사인 <오마이뉴스>에도 올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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