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원 일대기 : 8달러의 기적 ⑨] 길거리 신세에서 '신데렐라'로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나의 북한 탈출과 고학 스토리가 학교 잡지를 통해 전교 학생들에게 퍼지자 급우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혹여 다른 스토리가 없는가 하여 꼬치꼬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캐묻는가 하면,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점심을 함께 먹자거나 방과후 군것질을 하자며 이끄는 친구도 있었다. 선생님들도 인사말이기는 했으나 오며가며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달라진 주변 분위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던 기억들도 있다.

나는 당시 새벽같이 일어나 청계천 부근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생강차 장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먹고 자는 일이었다. 하숙방이나 자취방을 구해 들어갈 만한 돈이 쉽게 모아지지 않아서 문이 닫힌 청계천 시장 안의 가게 한구석에서 잠을 자곤 했다. 당시 가게 주인들은 청계천 시장 문이 닫힌 다음 장사꾼들을 싼 값에 재워 주었다. 나는 교과서로 가득찬 책가방을 배개 삼아 칼잠을 청하곤 했는데, 비가 심하게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덜커덩 거리는 소리와 삐그덕 거리는 소리로 잠을 설쳐야 했다. 그나마 잠잘 곳을 찾지 못한 날에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겨우 몸을 눕힐 수 있었다. 해만 지면 오늘은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 지 걱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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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청계천 모습. 나는 청계천 주변 상가에서 생강차 장사를 하고, 문 닫은 가게에서 칼잠을 자며 지냈다. ⓒ 공개자료사진
 
그 와중에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늘 도와 왔던 서갑록 선생님이 폐병에 걸렸다. 당시 폐병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으로 알려져 있어서 아무도 선생님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으나, 나는 거의 매일 그의 집을 방문하여 도와 드릴 것이 없는지 묻곤 했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병원비가 바닥난 서갑록 선생님은 종종 가지고 있던 고서적들을 내게 주면서 청계천에 내다 팔아달라고 했고, 나는 기꺼이 그의 청을 들어 드렸다. 그의 가족들은 그런 나를 무척 대견스럽고 고맙게 여겼으나, 나는 그의 가족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학교 훈육주임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기에 혹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졸이며 교무실로 찾아 갔다. 그는 깐깐하고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학생들이 먼 발치에서 그가 오는 모습을 볼라치면 후다닥 피하거나 가까운 곳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눈을 내리 깔고 슬슬 피했다. 그의 사무실 앞에서 노크를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는 반가운 얼굴로 두툼하고 큼지막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의외의 상황에 다소 안도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두려운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야 한도원, 너 정말 용감한 놈이더구나. 그렇게 험한 길을 부처같은 샌님이 용케도 뚫고 오다니. 아이구 참, 겨우 보름 공부해서 우리학교에 입학하고. 감동했다 감동했어. 잘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고 하더니 너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네 부모님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더라 야. 내가 근사한 일자리 하나 주려고 하는데 할 수 있겠어?"

호랑이 훈육주임과 포병 대령의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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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경복고(당시 중학교) 아침조회 광경. ⓒ 경복고 동문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고 있던 내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그가 제안한 '근사한 일자리'란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학교 간이 매점 관리직 일이었다. 갑작스런 제안이었지만,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즉석에서 고맙다며 받아들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찹쌀떡이나 땅콩을 파는 일, 생강차를 파는 일 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교통비를 아낄 수 있는데다, 찜통 더위나 눈비를 피할 필요도 없었고, 여차하면 과자나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울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무섭게만 보이던 훈육주임 선생님이 그렇게 멋있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의 사무실을 나오며 속마음으로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나의 행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교 매점 관리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후 훈육주임 선생님이 나를 다시 보자고 해서 찾아 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훈육주임 선생님 곁에 왠 군복 입은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제법 관록이 있어 보이는 군인으로, 육군 상사였다. 훈육주임 선생님이 환한 얼굴로 내게 내뱉은 말은 나를 어리둥절 하게 했다.

"한도원, 내가 허락할 테니 오늘 오후 수업 빠져도 돼. 지금 당장 이 군인아저씨 따라 나서거라."

훈육주임 뒤쪽에 약간 비켜 서 있던 구리빛 얼굴의 상사가 내 어깨를 덥석 잡더니 더욱 희한한 말을 쏟아 놓았다.

"한도원 군, 이제 살 판 났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게 될거야, 나랑 함께 가자구! 대령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자초지종을 나누지 않겠나?"

한밤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얘긴가 싶었다. 도대체 나를 둘러싼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먼 친척조차 남쪽에서 군인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고, 어머니가 준 아버지 친구 명단에 군인 아저씨는 애초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훈육주임 선생님이 미소로 배웅하는 가운데 상사 아저씨가 타고 온 짚차에 미적거리며 몸을 실었다.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한 참을 달리던 끝에 서울 외곽의 한 군부대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갈 때 언뜻 보이는 간판을 보니 육군포병학교 였다. 헌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정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제법 육중한 모습을 갖춘 갈색 건물이 보였다. 먼 발치에 포병학교를 상징하는 듯한 포신들이 연병장 둘레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는 현관을 지나 조심스레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맨 끝에 웅장해 보이는 사무실이 나타났다. 사무실 앞에는 '육군포병학교 부교장 대령 이기권'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를 안내한 군인이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와!"하는 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정복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일을 보고 있던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하하 한도원 군, 정말 잘 왔네. 자네 정말 대단하더군. 이제 우리가 도울 차례야. 걱정말라고!"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다

그제서야 나는 감이 잡혔다. 대령은 어느날 내 학교 친구의 부모님 집을 방문했다가 그들로부터 내 얘기를 전해 들었던 터였고, 학교 잡지에 난 스토리까지 모두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 내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돕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한참 나의 사정을 이것저것 캐묻던 그는 거침없이 나에 대한 '예우'를 쏟아 냈다.

그가 내게 전한 예우는 이런 것이었다. 일단 장교들이 묵는 숙소의 방 한 칸을 내주고, 식사도 장교들과 함께 하며, 매일 점심도 장교식당에서 알아서 꾸려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군용차에 태워 등교까지 시켜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령은 내게 숨쉴 틈도 주기 않고 자기 지갑에서 한 웅큼의 지폐를 꺼내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뚝 떼어서 건네며 "이건 당장 네가 생활비로 쓸 돈인데, 다 쓰고 모자라면 언제든 말해!"라고 했다.

기가 막혔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껏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긴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교 잡지에 실린 글 하나로 며칠 사이에 '신데렐라'가 되다니! 상황이 너무 갑작스레 반전하니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령의 부관을 따라 내가 묵을 숙소를 돌아보니 푹신한 침대에 스팀 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부관이 내게 보여 준다며 스팀을 틀었는데, 쉬이익 소리를 내며 방안이 금방 훈훈하게 덮혀지던 장면에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겨울 새벽에 하숙집에서 쫓겨나 눈 내리는 을지로 삼정목 거리에서 덜덜 떨던 처지가 아니었던가. 불려가던 그날만 해도 '오늘은 어디서 잠을 청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처지였다. 생전 처음 본 스팀 룸에 깨끗한 미국식 침대에서 꿈같은 첫날밤을 지냈고, 며칠 동안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시 나를 도와준 이름들을 내 기억 저장소에 넣어 두기로 했다. 대령의 이름은 이기권이었고, 그의 명령을 받아 나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도와 주었던 부관 대위는 송찬호였다. 이기권 대령은 한국전쟁 직후 장군으로 승진했으나 5.16후 박정희의 미움을 사 쫓겨났고, 당시 부관이었던 송찬호 대위도 후에 장군이 되어 승승장구했으나 역시 5.16 쿠테타 직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옷을 벗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기권 장군은 캘리포니아에서 말년을 보내다 2~3년 전에 작고했다.

학교에서는 갑자기 달라진 내 처지에 모두가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나의 행운을 축하해 주었다. 특히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늘 주시하며 돕고자 했던 서갑록 선생님은 병중에도 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고,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님도 자신의 일처럼 반기고 격려해 주셨다. 공부도 제법 궤도가 잡히고 교우관계도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머무르고 싶었던 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평안도 후창강가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세상 모르고 지내던 14세 소년에게 어느날 갑자기 해방이 온 것처럼, 한국전쟁도 그렇게 갑자기 다가왔다. 북에서 혈혈단신 탈출하여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사고무친의 고학 소년에게 전쟁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제껏 겪어왔던 고난은 길고 긴 인생 무대에서 서막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서야 깨달아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 다시 길거리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던 나는 처음 전쟁의 소식을 듣고는 며칠 지내고 나면 잠잠해질 것으로 여겼다. 그동안 얼풋설풋 들었던 전쟁 소식들이란, 남북 군인들끼리 기껏해야 수십분 동안 어느 어느 지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더라는 것들이었고, 어느 순간 그 같은 소식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전쟁이 일어났던 6월 25일 아침, 고도를 낮춘 비행기들이 서울 시내를 순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나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룻저녁을 자고나니 점점 가까이에서 포성이 들려오고 이번 전쟁이 삼팔선 부근에서 벌어진 소규모의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서울 시민들은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며칠 후 교장 선생님은 북한이 고향인 학생들을 학교 강당에 모이게 하고는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는 당분간 학교에 머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포성과 총격 소리가 학교 건물을 크게 흔들게 되자 교장 선생님은 슬픈 얼굴로 나타나 휴교령을 발표하면서 "이곳이 더이상 안전하지 않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머리가 멍해져 왔다. 나는 돌아갈 집이 없지 않은가. 포병학교 장교 숙소가 집이었는데, 그 부대가 전쟁이 나서 어디론가 출동해 버렸고 건물도 무너져 내린 형국이니. 신데렐라에서 하루아침에 다시 길거리 나앉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급전직하'였다.

염치를 무릅쓰고 제법 친하게 지내던 급우 집을 찾아가 당분간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오며가며 얼굴을 익히고 있었고, 평소 나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던 친구의 어머니는 따뜻하게 나를 맞이하고 안심하고 지내라고 했다. 후에 기술하겠지만, 친구의 어머니는 이후로도 내 일생에서 잊혀지지 않을 은혜를 베풀었다.

다음날 아침, 친구와 함께 도둑고양이처럼 길거리에 나서서 상황을 살펴보니 인민군 탱크들이 크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울 시내를 구르고 있었다. 관공서 뿐 아니라 왠만한 높이의 건물에는 이미 붉은 인공기가 걸려 있었고, 잔류한 일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깃발을 흔들며 인민군을 환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한강 인근에 가보니 이미 다리란 다리는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입구에서부터 차단막을 내린 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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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직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이 소련제 T-34 전차로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다. ⓒ 한 재미동포 제공
 
친구와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소문에 들으니 인민군들이 닥치는대로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 보낸다고 했다. 곰곰 생각하던 끝에 우리는 후미진 방 하나를 골라 구들장을 들어내어 땅굴을 만들고는 그 위를 잡동사니 살림도구로 위장했다. 우리는 땅굴 속에 들어가 지내며 서울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으나 딱히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숨어서 몇날 며칠을 꼬부려 지내는 중에 양식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밖에 나돌아 다녀도 양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집에만 박혀 있으니 더더욱 난감한 지경이 된 것이다. 결국 어떤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코리아위클리> 제휴 <오마이뉴스>에도 올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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