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올랜도 거주 호월 시인 <시 나무 접목> 출간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귀하께서는,
계절따라 스쳐가는
바람의 색깔을 보셨나요?
별빛과 달빛이 흐르는 소리를
들어 보셨나요?
지평선에 펼쳐진 저녁노을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셨나요?
스며드는 고독의 차가움이
가슴을 짓누른 적이 있나요?
솜사탕 구름의 맛이
혀끝을 간질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틀림없이
귀하께서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하 생략)

(호월 <사랑예찬> 중에서)

"호월이 누구야? 소월과 무슨 관계라도 있나?"

2013년 5월 처음으로 <코리아 위클리>에 <구절초>가 실리고, 그해 여름에 연달아 <거목의 심장>, <사랑 예찬>이 실리자 같은 동네 지인이 물었다. 이후로 최근까지 30여편의 시가 실리면서 "시가 쉽게 읽혀 참 좋네, 우리동네에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 있어?"라며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가 어디서 왔으며, 뭘 하던(는) 사람인지, 나이는 얼마인지, 왜 시를 쓰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꺼리며 그저 나직이 묻혀있기만을 바라던 보석이 어느날 공사판 트랙터에 밀려 나오듯, 70여 편의 호월 시가 묶여져 <시 나무 접목>이라는 책자로 출간됐다. 작년 12월이다. <구절초>를 비롯한 몇편의 시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의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여져서 뭇사람에게 읽혀져 왔을 정도이니 하마터면 '지하철 시인'으로 네이밍이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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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나무 접목>(좋은땅, 149쪽)
 

시인 본인은 책 머리말에서 "주위의 이웃들로부터 이젠 시집을 내야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다며 "이웃들 덕"을 말하는 겸양을 보이고 있느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신비감에서 벗어나 뒤늦게나마 털털한 결단을 한 것은 퍽 다행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데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축에 들려면
비릿한
사람 냄세 나야 한다

(몽당시 묶음 8 <시> 중에서)

오랜 숙성이 깊은 맛을 내듯
김치도 인간도 시도 오래 묵혀야 깊은 맛이 있다
묵은지 인간은
게미있는 인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젊은 이웃과 어울려 아름다운 효과를 내기도 한다

(<묵은지> 중 일부)

사실 호월의 시가 "사람 냄세"가 나고 "젊은 이웃과 어울려 아름다운 효과"를 내기에, 시에 대해 꽤나 무식한 기자 같은 이에게도 어필하는지 모른다. 호월의 사부(師父)님인 임보 시인은 호월을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을 통해 금관시인의 칭호를 얻은 검증된 시인"이라고 했는데, 기자가 생각하는 '검증된 시'란 보통 사람이 읽어서 가슴 찡하고, 먹고 사는데 피와 살이 되는 시가 아닐까 한다. 그게 서정시든, 서사시든, 참여시든, 목적시든, 심지어는 그 무슨 해체시든.

누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와 나태주의 <풀꽃>을 가볍다 하는가. 누가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누가 김지하의 <오적>과 문익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무겁다 불평하는가. 그네들은 피폐한 땅에서 허리 휘게 고생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엄청난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시를 쓰는 사람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내밉니다
한 아픔이 다른 아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댑니다
슬픔과 아픔이 만나 서로를 버텨 주고 있습니다

둘 다 버려진 운명에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버려진 폐품도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외진 길가 잡초 무성한 빈터
한쪽 다리 부서져 깨진 찬장이
문짝 떨어진 녹슨 냉장고에 기대어 있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만나 서로를 버텨 주고 있습니다

(<아픔과 슬픔끼리> 중에서)

지난 겨울, 어느 단촐한 교회의 단촐한 망년회 모임에서 호월의 <묵은지>와 함께 낭송된 <아픔과 슬픔끼리>는 '시'라는 것이 어떻게 개인과 집단의 자아를 건드려 주고, 어떻게 현실 역사 안에서 '공감'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뭉클하게 보여주었다. 그 같은 공감은 아무나, 아무런 시나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감히 좋은 사람이 좋은 시를 내놓는다고 믿는다. 좋은 사람은 인간과 세상과 역사를 제대로 보는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리라.

조국이 온통 조국으로 시끄럽던 시간에, 우리가 운 좋게 읽은 시는 우리 땅에서 겪은 5.18과 4.16 참사 가족들의 동병상린의 고통과 슬픔의 끄트머리를 붙잡은 강한 뒷맛의 시였다. '완성도' 운운은 시평을 하는 사람들의 몫일 터, 2% 불만은 읽는 사람이 완성하면 될 일이다.

호월은 자연과 우주를 여유롭게 응시하며 나를 찾고, 이웃을 찾고, 관계를 맺는 시쓰기에 처음부터 몰입한 듯 보인다. 공허한 곳에 머물거나, 밑도 끝도 없이 땅을 파고 들어간 나머지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대등한 '관계'는커녕, 굴복을 시키려는 의도가 그의 시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신과 이웃에게 질문하면서 "자아를 돌아보고, 관계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쓴다. 물론 최종 목적지는 "언젠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것이다.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30년 이상을 산 호월 시인은 본래 '고급 기술자'였다. 1960년대에 서울 공대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후 포드 자동차 선임 책임 연구원, 미국 레이저학회 지부장에 이어 로렌스 공과대학 초빙 교수를 지냈다. 한국과 미국 대기업 기술자문위원으로 4개의 기술상을 수상했고, 17개의 미국 특허 보유자이기도 하다. 레이저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 은퇴했다. '호월湖月'이란 필명은 '호수에 뜬 달'이라는 뜻으로, 집 뒷뜰에서 달 구경 하다 지었다고 한다. 그의 실명은 장욱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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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월 시인
 

"시 참 대단하지요?"

과학과 시를 접목시킨 융합시의 지평을 열겠다는 꿈을 꾸어 온 호월은 그의 특권을 맘껏 이용하여 자주 우주여행을 한다.

둘레가 4만km인 지구를 아십니까?
지구의 130만 배 되는 태양을 아십니까?
태양보다 몇 천 몇 만 배 큰 별들이
10만광년의 공간에 1,000억 개 흩어져 있는
우리 은하계를 아시나요?
(중략)

우주라는 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서
생각 없이 함부로 부를 수가 없네요
야회 신을 부를 수 없듯이요

그러나 시에서는 우주가 조그만 연못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는 풀잎에 맺힌 작은 이슬방울, 겨자씨 한 톨이기도 하고요
시 참 대단하지요?

(<우주> 중에서)

그는 거기에서도 '나'를 찾기 위해 안타까이 두리번 거린다.

내 본향은 별이다

태고에 반짝이는 별이
고온 고압인 자신의 내부에서
수소 영양분으로
내 몸의 구성원소를 형성했고
오랜 후에 그 원소들이 나를 구성했다
(중략)


미천해 보이는 나지만
이래 봬도 내 족보는
태고 어머니 별에서 시작된다

(<별의 자손> 중에서)

호월은 지난 14년 간 무려 2천 여 편의 시를 토해냈다. 25권의 전자시집도 낸 그에게 시는 '업'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삶'이다. 때로 그의 시, 특히 과학시는 개성과 자유를 차압하는 도식을 거부한 듯 보여 덜컥 당황스럽게 할 때도 있다.

걱정마시라. 일단 그의 시는 누가 읽어도 쉽다. 결코 가볍지 않고, 격조를 벗어나는 법도 없다. 너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기에 마음에 깊게 와 닿는 그의 시편들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조용히 낭송해 보기를 권한다.

*<시 나무 접목>(좋은땅, 1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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