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17] 미주리에서 미시간으로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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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캠프 미니왕카에서 사귄 미국 친구들과 함께. 나는 매년 여름이면 그곳에 가서 일을 했다. ⓒ 한도원
 

(올랜도=코리아위킅리) 김명곤 기자

 

미시간 캠프 미니왕카에서 미주리 스프링필드로 돌아온 나는 가을 학기 내내 어떻게 하면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농공학(Agricultural Engineering)을 공부할 돈을 마련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여름방학 기간에 여러군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한다 하더라도 1년에 2천불이나 드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학교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뜻밖에도 슬프고도 낙심스런 뉴스를 접하게 됐다. 댄포스 회장이 심장마비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서거하기 불과 며칠 전에 받은 서신이 내 책상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서신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나는 한동안 슬픔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한여름 짧은 기간에 맺은 인연이었으나 그가 내게 준 영향과 도움은 의외로 컸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성공적인 삶을 가꾼 전형적인 미국인이었고, 생의 말년에도 자신이 창설한 캠프에 와서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생활철학을 전수하려고 애썼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청년이었던 내게 그가 보여준 따뜻한 시선과 가르침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육체와 정신이 사회 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삶에 대한 그의 강조는 내 삶의 지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봄학기가 시작되자 마자 나는 미니왕카에 편지를 보내 내 사정을 말하고 올 여름에 다시 가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얼마나 급료를 올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며칠 후에 캠프 미니왕카에서 답신이 왔다. 400불을 주겠다는 희소식이었다. 지난해 여름 캠프 미니왕카의 하루 급료가 1불이었고, 1년 생활비가 400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액수였다.

'일당 1불'을 벌러 갔다가 만난 '횡재'

사실, 지난 여름 캠프가 끝나기에서 앞서 저녁에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을 받았었다. 여름 캠프가 다 끝나가던 어느날 저녁이었다. 캠프 디렉터 와제피 아저씨가 나를 캠퍼 단합집회가 열리는 건물로 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수백명의 캠퍼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작업복 차림의 나를 단상 위로 불러 내 한참이나 칭찬을 하고는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미스터 한은 여기 함께 일하는 다른 멤버들과 비교해 체구가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숨은 조력자로, 캠프의 어느 누구보다도 큰 일을 해냈습니다. 짧은 기간 미스터 한이 이루어낸 큰 일을 우리 모두 두고 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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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6월 캠프 미니왕카에서의 망중한. ⓒ 한도원
 
숙소에 돌아와서 보니 봉투 안에 400불이 들어 있었다. 꽃밭을 만들고 열심히 이런 저런 잡일을 한 것 치고는 '횡재'에 가까운 액수였다. 일당 1불로 3개월 여름방학 내내 일해도 100불을 모으기가 힘든 상황에서 4배 이상의 수입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윌리엄 댄포스 회장과 와제피 아저씨 등 캠프 직원들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시카고나 뉴욕으로 가서 여름 한철 일을 한 친구들의 경우를 들어 보니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1,2백불 모으기도 힘들다고 했다.

내가 당시 받은 교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지나치게 돈의 액수를 계산하여 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미시간 주립대학으로 학교를 옮길 경우 납부해야 할 1년 등록금 2천불을 벌기 위해서는 특단의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그해 여름에도 미니왕카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친구들과 시카고로 가서 일을 하면 큰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탈북 이후로 하루 두 세 가지 일을 해치우는 것은 내게 일상에 가까웠다. 시카고에 가서 죽기살기로 '2천불 마련'에 부딪쳐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해 여름 시카고에 가서 제법 급료가 좋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얻었다. 우리가 찾아간 회사는 콘티넨탈 캔 컴패니(Continental Can Company)라는 회사였는데, 자리가 하나 밖에 없었다. 모두들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던 터에 한 친구가 고맙게도 "도원이 형에게 기회를 주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내게 일자리가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전 시간에는 레스토랑에서 4~5시간 접시 닦는 일을 하고 마치자 마자 캔 컴페니로 내달리는 일이 여름 내내 이어졌다. 캔 컴패니에서는 하루 8시간씩 주로 오후 3시부터 조립라인에서 일을 했다. 하루 12시간씩 3개월 가까이 일한 결과, 내 수중에 1천불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큰 돈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1천불을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지 딱히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은사' 캠프 미니왕카 회장님

그러던 차에 윌리엄 댄포스 재단의 여비서관으로부터 서신이 왔다. 평소 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나의 장래 계획과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농공학을 전공하여 고국의 농촌을 돕고 싶은데 미시간 주립대학이 최적지라는 내용과, 등록금 2천불 가운데1천불을 마련했지만 나머지 1천불이 부족하다는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 보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날, 특별 우편이 와 있었다. 우편 봉투를 뜯어 보니1천불 짜리 체크와 함께 메모가 들어 있었다.

"미스터 도원에게 : 댄포스 회장은 도원이 미시간 주립대학에 등록하기를 원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이상 대학 비용을 걱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은 미스터 도원의 대학 비용 일체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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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윌리엄 댄포스 회장. 그는 나의 든든한 후견인이자 은사 였으나, 195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갑작스레 서거해 나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 위키피디아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겨우 작년 여름 캠프 미니왕카에서 3개월 간 일한 것이 전부인데, 나를 이토록 인정해 주고 후하게 대접하여 장래 학업까지 돕겠다니! 아마도 평소 댄포스가 나를 돕고 싶다는 얘기를 측근들에게 했음이 분명하고, 내가 시카고에 가서 한여름에 땀흘려 1천불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유학을 오기 직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중학교 시절의 은사이자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이 선뜻 자신의 첫 월급봉투를 유학비용에 보태쓰라고 손에 들려준 일을 '기억 저장소'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생면부지였던 외국인 청년인 나에게 이런 도움을 베푼 댄포드씨는 말해서 무엇하랴!

'보이지 않는 손'은 내가 위기에 처해 비트적 거리고 있을 때마다 누군가를 통해 걸림돌을 제거해 주었다. 나는 돌아가신 댄포스 회장의 배려에 다시한번 고개가 숙여졌고, 반드시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쳐 그의 도움에 보답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드라이 시티'에서 꿈을 꾸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의 후원으로 나는 1956년 가을학기에 미시간 주립대학 농공학과에 등록했다. 미주리 사우스 웨스턴 주립대학에 비하면 미시간 주립대학은 규모 면에서부터 엄청 큰 차이가 났다. 차로 학교 외곽을 한 바퀴 도는데도 30분 정도나 걸릴 정도로 학교 부지가 넓었고, 농대는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의 주립대학들이 출발 당시 농대를 설립하는 조건으로 정부가 무상 또는 헐값에 제공하는 부지에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미시간 주정부가 정책적으로 미시간 주립대학 농대를 집중 지원한 덕분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 기숙사에 둥지를 틀고는 매일 농대 건물까지 20여분간을 달리다시피 해서 수업에 들어 갔다. 학교를 가로지르는 좁은 강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항상 전날 들은 수업 과목 내용을 복기하거나 이런 저런 학업관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듣게된 과목들은 모두가 생소한 내용이어서 너무 힘에 부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한국전을 전후하여 속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지로 애초에 기초가 부실한 처지에서 유학을 왔고, 본격적으로 전공 과목을 영어로 듣고 쓰고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사우스웨스턴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들었던 교양과정은 차라리 애교 수준이었다. 얼마나 수업 내용이 어렵던지 10월 중순께부터 갑자기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미시간 눈발 만큼이나 혹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장실에서도 길을 가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할 정도로 공부에만 몰두해야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먹을 시간이 없어서 도넛츠를 입에 문 채로 오물거리면서 넒은 교정을 가로질러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시간 주립대학을 품고 있는 이스트 랜싱이라는 도시는 한마디로 '드라이 시티'였다. 가끔 가을철 풋볼 시즌에 풋볼 구장 둘레의 넓다란 잔디에서 차 뒷문을 열어놓고 테일게이트 파티가 벌어지며 떠들썩 하기는 했지만, 학교 내에서는 물론이고 시내에서 조차도 술을 팔지 않았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은 주말에 시 외곽 다른 도시로 빠져 나가서 맥주 파티를 벌이곤 했다. 차가 없었던 나는 시내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었고, 수업을 따라가기에도 바빠 농대 건물과 기숙사만 왔다갔다 했다. 첫 학기에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도시 밖으로 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당시 한인 의사 닥터 치 (DR. Chie)가 운영하던 작은 병원에 가서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추가 경비가 더 들어갔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댄포스 재단의 도움만을 기개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어느덧 이력이 붙어 있던 탓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5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던 탓에 종종 바베큐 파티에 참석하여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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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간 주립대학 겨울 풍경. 욀리엄 댄포스 재단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농공학을 공부하면서 고국의 피폐한 농촌을 되살리고자 하는 꿈을 꾸었다. ⓒ 미시간 주립대학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첫학기를 정신없이 마치고 나니 '농학'에 대한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특히 전공으로 택했던 농공학(Agricultural Engineering) 분야만으로는 한국의 농촌을 기계화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와서 농기계학(Agricultural Mechanics)도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농공학이 농기계를 디자인하는 학문이라면, 농기계학은 농기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이들 분야 외에 토양학 교배학 번식학에 관련된 과목들을 들으며 일단 농학 전반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로 했다.

나는 미시간 중부의 '드라이 시티'에서 공부로 젊음을 불태우며 피폐한 고국의 농촌을 생각하며, '모두를 잘 먹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갓 24세, 나의 젊음은 농학의 신비한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재구성 : 김명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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