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달러의 기적 14] 위기의 순간마다 '기적'을 이룬 은인들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나의 ‘도청공략’은 계속됐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고 매일 아침 출근하다시피 도청을 방문하자 이제는 왠만한 직원들이 내 얼굴은 물론 이름도 알게 되었다. 방문한 지 열흘쯤 된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데스크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마침 출근길에 지나치던 한 남자 직원이 안내 직원에게 다가와서는 “이 청년이 매일 찾아 오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그 남성은 옷매무새로 보아 고위직 공무원인 듯했다. 데스크 직원은 잘 됐다는 듯 “매일 이렇게 찾아와서 도지사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해서 귀찮아 죽겠다”고 하소연 하듯 말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그 남성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로 말했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한도원입니다. 미국행 비자를 받으려면 반드시 도지사님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그 직원은 내가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여권을 내밀자 조금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를 위 아래로 훓어보던 그는 “도지사님이 이런 부탁까지 들어주실 지 모르지만, 일단 말씀을 드려 보겠으니 잠깐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여권을 받아들고 사라지고 나서 10여분 만에 나타나서는 “각하께서 들어오라고 하신다”며 따라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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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부민동에 있던 옛 경남도청 모습. ⓒ 경상남도
 
“공부하러 간다는데, 까짓거 편지 한장 못 써주겠나”

나를 지켜보던 데스크 직원의 놀란 표정을 뒤로 하고 그를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도지사의 최측근 비서관이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도지사실에 들어가자 젊잖고 중후한 모습을 한 도지사가 반갑게 맞이하고는 차까지 내 오게 했다.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었다.

“허헛참, 이제까지 나를 찾아와서 부탁을 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해달라거나 기부 좀 해 달라는 경우가 대다수 였다네. 유학비자를 받기 위해 추천서를 써 달라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공부하러 가겠다는데 그까짓거 편지 한 장 못 써주겠나?”

그는 영문 추천서에 사인을 해 줄테니 빨리 가서 작성해 오라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도청을 나오자 마자 영사관으로 달려가서는 알고 지내던 한국인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가 농담조로 ‘도지사 사인이면 모를까’라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우직하게 밀어부쳐 도지사를 만나서는 추천서 승락을 받아낸 나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분위기로 보아서는 집도 절도 없는 나같은 처지의 청년이 도지사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한도원씨는 꼭 성공할 거야!”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그자리에서 타이핑으로 영문 추천서를 써 주었다.

헐레벌떡 도지사를 다시 찾아 가서는 영문 추천서를 내밀었다. 그는 즉시 사인을 마치고는 “미국 가서 공부 열심히 하여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하라”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나는 “언젠가 공부 끝내고 돌아오면 꼭 찾아 뵙겠다”며 도지사실을 나왔다. 그가 당시에 베픈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쉽게 귀국을 못하고 감사를 표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못내 마음에 걸린다. 정신없이 세월을 보낸 후에 그의 이름을 다시 찾아 보니 1953년 10월에서 1957년 2월까지 관선 경남 도지사를 지난 이상룡이란 분이었다.

도지사 추천서를 손에 쥐고 나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영사관으로 내달려서는 되돌려 받은 서류들과 함께 도지사 추천서를 내밀었다. 내가 가져온 도지사 추천서를 찬찬이 읽어본 영사는 미소 띤 표정을 지으며 “서류가 너무 오래되어 접수 날짜 등을 업데이트 하고 비자 수속 비용 10달러를 가져오면 비자를 주겠다”고 했다. 서류를 고치는 일은 간단했으나, 10달러를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권과 비자 수속을 한다며 이래저래 돈을 다 써 버린 상황이었고, 매일 끼니를 걱정하던 때였다. 언뜻 유엔한국재건단에서 일할 때 미국인 친구가 선물한 스위스 시계가 떠올랐다. 도처에 널려 있던 암시장에 달려가 10달러에 시계를 풀어 주었다. 다음날 영사관에 찾아가서 고쳐진 서류와 10달러를 내니 여권 한 쪽 페이지에 스탬프를 쾅 찍어 주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유학생 비자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수속을 한 지 2년이 훨씬 넘어서야 비자를 손에 쥐니 감개 무량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연희전문을 합격하고도 ‘신원이 불확실한 피난민이고 후원할 부모가 없다’며 면접에서 입학을 거부당한 일, 호적을 만들기 위해 동사무소에 갔다가 수모를 겪은 일, 제대로 먹고 입지 않으며 모은 돈을 병적계 직원에 몽땅 사기당한 일, 나보다 훨씬 늦게 수속을 하고도 일찌감치 미국 유학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처지를 비관했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의 흰 봉투

그런데, 여권과 비자를 손에 쥐어 법적 절차는 해결했으나, 마지미국행 비행기표를 끊기 위한 비용이 문제였다. 400달러나 되는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무려 6개월을 고생해야 했다. 내가 미국행 비자를 받았던 1954년 우리나라 일인당 국민소득이 88달러였으니 400달러란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돈이었다. 더구나 달러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개인이 함부로 달러를 사거나 팔 수 없도록 정부에서 엄격하게 규제를 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행 비자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 200달러를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우선 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200달러화 증서’를 들고 암시장을 찾아 갔다. 암달러상이 나와 함께 한국은행을 찾아가서는 원화로 달러를 사들이고는 달러 일부를 커미션으로 주면, 나는 그 달러로 종교 달러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할 요량이었다. ‘종교 달러’란 한국 선교비 명목으로 미국 종교단체 등에서 유입되는 일종의 수표(check) 였다. 당시 비행기 회사에서는 티켓값으로 현찰 달러 외에 유일하게 종교 달러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암시장에서 종교 달러의 가격은 현찰 달러의 반값에 불과했다. 가령 현찰 10달러는 암시장에서 종교 달러 20 달러로 교환되었다. 모두가 미국행을 준비하며 여러 통로를 통해 얻게된 정보였다. 한 푼도 없는 처지에서 6개월 동안 나를 써줄 직장도 없거니와, 설사 직장을 잡는다 해도 400달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몇년이 소요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몇차례의 ‘환전 게임’을 거친 후에 200달러의 종교화가 내 손에 쥐어 졌다. 하지만 나머지 200달러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나는 알고 있는 친구들과 고향의 선후배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예상대로 성과가 썩 좋지 않았다. 끼니도 떼우기 힘든 시절에 ‘유학가게 되었으니 도와달라’는 것은 사치로 받아들여지거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알맞을 성 싶은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일을 겪기도 했다.

어느날 서울의 종로통 다방 앞을 지나치고 있다가 우연히 평안도 안주 중학교 시절 선생님을 마주치게 되었다. 후에 한국의 대표적인 성악가 가운데 하나로 명성을 떨친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내려온 줄 모르고 있던 황 선생님은 너무도 반가워 하셨고,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하자 매우 대견해 하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시면서 “얼마 안 되지만 유학비용에 보태 쓰라”고 하셨다. 막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 강사로 취직이 되어 받은 첫 월급이라며 멋적은 듯 말씀하셨다.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의 사제지간의 배려에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나는 황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한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최근에서야 그가 몇년 전 서울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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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안주중학교 시절 은사이자 1955년 당시 서을의 한 사립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은 자신의 첫 월급 봉투를 몽땅 나에게 주면서 비행기표를 사는데 보태 쓰라고 했다.
 
여하튼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쉽게 채위지지가 않았다. 미국의 대학교에는 미리 연락해 등록 기일을 연기해 두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니 항공사 측에서 야단이었다. 막판 채워질 듯 채워질 듯 하던 몇 십 달러가 채워지지 않아 예약을 취소하기도 했다. 무려 10차례나 예약 취소를 반복하자 한 번은 직원이 “동경에 있는 항공사에 국제전화한 비용이 비행기표값 보다 더 들겠다”고 불평을 했다. 당시 미국행 비행기는 여의도에서 출발하여 동경에서 하루를 쉬고 미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동경의 항공사에도 연락하여 함께 최소해야만 했다.

결국 비자를 받은 지 6개월이 다 되고 나서야 비행기표 값이 겨우 마련되었다. 이제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일만 남게 되었다.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묵고 있던 친구 집을 나와 발권을 하기 위해 반도 호텔 안에 있던 항공사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하지 않게 ‘경복고 모자회(母子會)’에 소속된 친구의 어머니들 4~5명이 나를 환송한다며 나와 있었다. 몇몇 친구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못잊을 여인들… “널 보면서 늘 기적을 보았단다”

그런데, 서로가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막판 ‘걸림돌’이 발생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막 비행기표를 끊기 위해 400 달러를 내니 환율 영향으로 비행기표 값이 올랐다며 몇 십불이 부족하다고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여 사무실을 나서는 나를 본 친구 어머니들은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것이라 짐작하고는 걱정스런 얼굴들을 하고 잰 걸음으로 모여 들었다.

사정을 들은 어머니들이 한쪽 구석에서 잠시 쑥덕대는 듯했다. 그러더니 모두가 지갑을 열어 추렴을 해서 돈을 쥐어 주며 “아들이 유학가는데 비행기를 못 타면 안 되지” 그러며 “어서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했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늘 따뜻한 이웃들이 일으킨 이같은 ‘기적’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감사해 한다.

떠나던 날 평생 잊지 못할 두 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반도호텔을 찾은 친구의 어머니들과 두어 명의 친구들 외에 눈에 띄는 이화대학 학생 한명이 끼어 있었다. 조금은 알고 지내던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환송객들과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던 와중에 누군가가 호텔 밖으로 불려 나갔다 들어 오더니 “밖에서 이화대학 학생이 전해 주더라”며 쇼핑백을 건네 주었다. 열어보니 금방 산 것으로 보이는 와이셔츠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이화대학 학생은 내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가 너무 낡고 초라해 보여 급히 노라노 양장점에 가서 사 왔다고 한다. 당황스러웠으나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고 고마워 유학생활 내내 기억 저장소에 담아 두었다. 그녀는 나중에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그 과정은 나중에 따로 쓰기로 한다.

또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반도호텔에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버스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서는 탑승장 대기실에 앉아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었다. 16세 때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홀로 내려와 갖은 고생을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의 얼굴 모습, 그리고 고향 동네에서 어렷을적 일들이 떠오르며 우수에 젖어들었다. 살아 남기에 급급하여 기억의 저만치에 밀쳐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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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반도호텔.
 
막 벤치에서 일어나 탑승장 안으로 들어 가려던 참에 얼핏 보기에도 옷매무세가 젊잖아 보이는 여자 한 분이 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였다. 친구의 유학을 돕는다며 종종 집을 방문했을 때 늘 부드럽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던 분이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홀로 앉아 있을 나를 생각하니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택시를 타고 왔노라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가 막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내게 남긴 말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도원아, 나는 성경에서 늘 기적 이야기를 읽었단다. 그런데, 너는 ‘눈으로 보는 기적’이었어. 너를 보면서 늘 기적을 보았단다. 하나님이 너를 돌보실 거야. 건강히 잘 다녀 오거라!”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 김명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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