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억, 할아버지

 

나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를 통해 ‘나 자신’을 인식하게 됐을까? 꼼꼼히 거슬러 올라가도 뚜렷한 기억의 시점을 찾기 어렵다. 53년 전 어머니의 몸에서 이 세상으로 태어난 뒤부터 한동안은 의식이 재구성할 수 없는 기간이다. 죽음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이기에 미지의 대상이다. 반대로 출생은 분명히 발생한 사건임에도 두터운 망각에 막혀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출생 이후 첫 기억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툇마루에서 알짱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을 열면서 나를 보고 뭐라고 하는 장면이다. 손자가 시끄럽다고 역정을 낸 건지 아니면 괴는 애정을 드러낸 것인지 전혀 분별할 수 없다. 앞뒤 맥락 없이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스쳐 지난 순간이 오래된 활동사진처럼 저장돼 있다. 그때 할아버지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인생의 첫 기억은 그 자체로 고정돼 있지 않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풀어내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하필 첫 기억의 주인공이 할아버지라서 내가 ‘아들’보다는 ‘장손’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싶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또래보다 100년 정도 낡은 가부장 성향을 갖게 됐을 수도 있다. 과거가 원인이 되어 현재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일반 상식이다. 문제는 특정한 과거 사건과 현재 상태를 원인과 결과로 잇는 것이 타당하냐이다. 방금 전 사건과 지금 당장 벌어진 결과라면 인과관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할아버지와의 만남 같은 오래 묵은 경험을 현재와 잇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험하는 자아와 이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자아 사이에 50년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철학을 대화식으로 풀이한 책 ‘미움받을 용기’는 아예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Now Here) 현실에 충실하자고 제안한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 때문에 고칠 수 없는 과거 사건을 원인으로 인정한 순간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러는 과거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프로이드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기껏해야 문제를 이해하는 데 그치고 이를 푸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경험은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가부장 성향이 강하다고 비난한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런 판단의 적실성 또는 가부장의 장단점을 따지면서 반응할 수 있다. 상대가 토론할 만하고 나 역시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가볍게 넘기고 싶다면 할아버지에 대한 인생 첫 기억을 소환할 수도 있다. 할아버지 때문에 가부장 성향이 강해졌다면서 ‘할아버지’와 ‘가부장’ 사이에 유전급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단 이런 의미를 부여한 순간 나의 가부장 성향은 절대 불변의 본질로 격상된다. 과거로 돌아가 유아기 때 첫 만남 대상을 할아버지 대신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신세대 여인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의 가부장 성향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자연’이 된다.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 가부장 성향이 가진 독소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는 변화의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과거의 사건을 원인으로 소환하는 순간 현재의 문제는 동결된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망가졌구나’라는 경미한 이해와 공감이 고작이다.

 

아들러는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원인으로서의 과거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그에 대해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가 관건이다. 내가 ‘트라우마’로 받아들이면 ‘트라우마’가 되고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해석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마법 같은 논리인데 인간의 내부 심리라서 충분히 가능하다. 나의 관점과 해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대로 마음을 다잡기만 하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야 마땅하다.

 

아들러의 철학은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는 외부 세계보다는 이를 이해하는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외부 세계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한 만큼만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아무리 광대한 차원에 걸쳐 있어도 어차피 각자에게 의미 있는 세상은 자신이 이해한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1억 명이 있으면 1억 명이 이해하는 각기 다른 1억 개의 세계가 동시에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복잡다난한 세상에서 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경험칙이다. 세상의 거대한 쓰나미 앞에 개인의 의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몸부림 쳐도 끄떡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은 결국 바꿀 수 있는 건 ‘내 마음’뿐이라는 체념 섞인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차원에서 ‘내 마음은 나도 몰라’라는 말은 우주 최고의 절망이다. 내 마음은 ‘소중’하기에 문제가 있다면 내가 알아야 하고 오직 나만이 이를 해결할 능력과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첫 만남이 일찍 돌아가셔서 제대로 본 적 없는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그저 순수한 기쁨으로 기억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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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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