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간 다 죽어

 

“본질에 일치를, 비본질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으로”

 

존 스토트 목사가 자신의 짧은 책 “균형 잡힌 기독교”를 통해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신자에게 던진 외침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본질에는 타협하지 않고 일치를 추구하되 그 이외의 문제는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자는 원칙이다. 또한 모든 일에 사랑의 태도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스토트 목사의 권면에 따랐다면 교회가 세상보다 못한 싸움터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앙의 뿌리와 줄기는 굳건히 지키되 저마다 다른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이 모두를 사랑으로 보듬는 ‘이 땅에 평화’가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스토트 목사는 양 극단에서 대립하는 진보와 보수, 감성과 이성, 내용과 형식, 사회참여와 복음전파 중 어느 한 쪽도 버릴 수 없다고 역설한다. 단순히 전부 다 포용해야 한다는 막무가내 논리는 아니다.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제로섬(Zero-Sum)이 아니라 양 극단에 존재하는 나름의 진리를 모두 아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로는 지켜야 할 전통을 지키고, 진보로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면 된다. 보수와 진보는 양립 불가능한 원수가 아니라 상호 보완함으로 온전함을 더하는 관계이다. 새는 오른쪽과 왼쪽 날개로 난다는 말은 어정쩡한 절충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지 않으면 정상 비행을 할 수 없다.

 

공동체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서는 대척점에서 충돌하는 두 극단이 상대방도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옮음을 상대를 말살함으로써 증명하려는 삿된 욕구를 내려놓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게 마땅하다. 보수는 버려야할 구습을 고집하는 게 아닌지 살펴야 한다면, 진보는 무작정 급한 변화로 불안만 초래하는 건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상대가 아니라 자기 쪽의 문제에 집중할 때 이를 통해 전체의 수준이 상승할 수 있는 지평이 열린다. 극단의 존재가 공동체의 분란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확대하고 보다 성숙하는 계기로 활용된다.

 

전혀 성격이 다른 두 극단이 각자 가치와 의미를 가지려면 이를 평가하는 객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는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다림줄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 승천함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복음이 복잡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적절한 취사선택을 가능케 한다. 복음의 다림줄에 거스르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용감하게 잘라내고 이에 맞으면 마뜩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통해 전혀 다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끼리 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비본질은 본질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이다. 양으로 보면 본질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포함한다. 먼저 본질을 세우고 확실한 일치를 이루고 나면 나머지에 대해서는 만인에게 자유를 허용해야 마땅하다. 시대와 장소와 문화에 따라 다른 비본질 요소를 두고 가타부타 따지지 않아야 비로소 본질에 이룬 일치가 더욱 굳어지고 뻗어갈 수 있다. 본질에는 집중 수렴하는 구심력을, 비본질에는 한계가 없는 원심력이 주어져야 한다.

 

기독교의 본령은 ‘모든 것에 사랑’이라는 대목에 담겨 있다. ‘본질에 일치’와 ‘비본질에 자유’ 모두 세상과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추구해야 하는 일이다. 사랑이 빠지면 사람들을 무조건 하나로 묶으려는 빈 외침이나 교묘한 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일치와 자유는 사랑 안에서 행할 때만 독재와 무질서로 흘러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극단의 시대를 치유하는 비약은 다름 아닌 설사 원수 같은 상대라 하더라도 어떡하든 인정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대선과 지자체 선거가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한국 정치가 또다시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 갈라진 채 아스팔트 전쟁이 재개됐다. 지난 주말 수만 명이 모여 광화문에서는 ‘주사파 척결’, 시청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취임한 지 6개월도 안 된 대통령에게 퇴진하라는 요구는 생뚱맞기 그지없다. 아무리 미진한 부분이 많더라도 5년 임기를 감안하면 무리한 주장이다. 난데없는 ‘주사파 척결’도 생뚱맞긴 마찬가지다. 디지털 시대에 벽시계를 들고 나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촌극을 벌이는 것 같다. ‘태극기’와 ‘촛불’이 사생결단을 벌이는 사건이 실시간으로 벌어졌으니 참으로 괴이할 뿐이다. 이들에게서는 원만한 타협의 가능성이 1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상대가 완전히 말살될 때까지 지구 끝까지 싸울 테면 싸울 기세다. 이렇게 군중이 우르르 거리로 나와서 고성방가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면 대체 막대한 돈과 노력을 들여 선거는 왜 치르는지 의심이 든다.

 

상대방을 사랑하기는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한국 정치를 바라보며 존 스토트 목사의 통찰과 지혜가 아쉬울 뿐이다. ‘태극기’나 ‘촛불’이나 나라를 위하는 절절한 마음이 없다면 일상과 생업을 뒤로 하고 거리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애국심’이 일치를 위한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애국’의 목적, 방향, 수단에 대한 이견이 있기에 엄청난 대화와 조정과 타협이 소요될 것이다. 한 공동체 안에서 어느 한 진영이 멸살할 때까지 집단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나선다면 마침내 모두 함께 멸망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다가 다 죽어”

드라마 속의 대사가 실제가 된다면 끔찍하지 아니 한가?

 

‘태극기’와 ‘촛불’이 서로 소통하려는 용기를 내야 대한민국이 극단의 시대에서 벗어나 성숙의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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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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