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 곶감

 

작년 초부터 2년째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부르는 명칭은 여러 차례 변천의 과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중국 우한에서 감염자들이 속출하면서 우한 폐렴 또는 우한 바이러스로 불렸다. 20세기 초 1차대전 사망자 1천 500만 명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과 비슷한 형태의 작명이다.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인 우한은 삼국시대에는 전략 요충지였는데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다.

‘우한 폐렴’이라는 이름은 오래 쓰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순식간에 팬데믹 공포가 밀어닥치면서 ‘우한’을 강조할수록 반중국 정서가 촉발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엄청난 위기가 닥치면 공격 대상을 찾기 마련이지만, 이미 초강대국 행세를 하는 중국이 이를 허술하게 방치할 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 슬그머니 ‘우한’이 빠지더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

‘우한 폐렴’에 비하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는 바이러스가 유래한 문화적 맥락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중국이나 우한 같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국적 불명의 실험실이나 외계로부터 난데없이 뚝 생겨난 병처럼 생경하게 느껴진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냄새는 풍기나 살아있는 현실의 질감은 완전히 제거된 이름이다. 이를 줄인 ‘코비드-19’이나 ‘코로나19’는 아예 생물학 기호 수준이다. 19는 무슨 대단한 과학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감염증이 발병한 해가 2019년임을 뜻할 뿐이다.

‘우한 폐렴’에서 ‘코로나19’라는 신종 기호가 부여된 순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명실상부하게 중국이라는 지역성을 벗어나 보편적 세계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 경제, 문화, 인종, 국적, 언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균등하게 작용하는 지구적 존재로 격상된 것이다. 팬데믹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코드를 수호하려는 시도들은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일례로 그토록 마스크 착용을 꺼려하던 서구인들도 이제는 이를 평범한 일상 중 하나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19’에 끝까지 저항한 것이 최고의 권좌에서 밀려난 상당한 이유가 됐다. 팬데믹 초기에는 독한 감기 정도로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아예 무시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차이나 바이러스’를 목청껏 외치면서 미중패권 전쟁과 선거에 활용하려고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현 집권 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팬데믹 선거에서 최약체 후보로 평가되던 조 바이든에게 완패하고 재선에 실패한 몇 안 되는 미국 대통령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트럼프의 낙선과 함께 그가 밀던 ‘차이나 바이러스’라는 말도 총기를 잃고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올해 들어서는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면서 ‘알파’나 ‘델타’ 같은 이름이 자주 들린다. 지금 시드니를 봉쇄령의 악몽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바이러스도 코로나19보다는 델타 변이로 여기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스치기만 해도 전파될 정도인 델타 변이의 감염력을 감안하면 기존의 코로나19라는 이름은 너무 평범하다. 델타 변이는 코로나19에 속하면서도 전혀 다른 차원의 바이러스 반열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우한폐렴이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든, 코로나19든, 차이나 바이러스든, 델타 변이든,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이 이 전염병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미 과거의 일상은 무너졌다. 이제 누구나 자주 손 씻고, 마스크 쓰고 다니고, 세정제 바르고, 증상 있으면 검사 받고 격리하고, 식당에 가면 QR코드 찍고, 백신접종 예약하고, 봉쇄령 내리면 칩거하고 풀리면 눈치 보며 기어나오면서 살아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문명 속으로 쳐들어온 호랑이 같은 바이러스 앞에서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 아이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사이 애당초 압도적이었던 국가와 정부는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더욱 거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 성서에 나오는 바닷속 괴물)은 커갔다.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통제하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포효소리에 울음이라도 터지면, 큼직한 손으로 곶감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으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개인은 그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나 공룡 크기의 리바이어던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딱한 처지가 됐다.

NSW 주에서도 델타 변이로 인한 봉쇄령이 장기화하면서 정부는 대대적인 곶감 살포에 나섰다. 달콤한 곶감을 받아먹으면 잠시나마 호랑이에 대한 공포가 희미해질 것이다. 아무리 호랑이가 사납게 날뛰어도 리바이어던 정부가 있어 이렇게라도 연명할 수 있다는 감사가 우러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호랑이와 기약 없이 공존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곶감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야흐로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복잡 난해한 생존 방정식을 기를 쓰고 풀어내야만 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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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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