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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완성한 ‘카타추타의 기원’(The Katatjuta). 호주 내륙 ‘울룰루-카타추타 국립공원’의 한 축을 형성하는 이곳에는 호주 원주민 부족들이 말하는 ‘꿈의 시대’(Dream time)의 신화, 세상이 만들어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는 원주민 부족의 이 신화를 천지창조와 연계해 완성했다.

 

전통 ‘진경산수화’에 현대 ‘풍경화’ 기법 접목으로 독특한 화풍 정리

한국화-호주경치화-종교화 등 작가의 ‘응축된 사유’, 한 권의 도록으로

 

‘예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삶의 내적 실재를 다루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내면적임을 수향의 그림에서 새삼 실감했다. 존재를 본질보다 앞세우려는 실존주의와는 달리 우리는 본질 그 자체를 중히 여긴다. 이런 관법용단의 묘를 수향은 잘 터득하고 있어 보인다. 수향의 화폭에는 한 점의 허세나 억지가 없는 잔잔한 운율의 번짐이 있을 따름이다. 안으로 웅축된 깊은 사유가 매우 간결하게 표출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전규태

 

재호 화백 수향 이순영 선생이 64년의 화업을 한 권의 도록에 담아 정리했다. 총 270페이지에 달하는 이 화집에는 1953년부터 2017년까지 선생이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 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한국화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완성한 200점 넘는 작품이 담겨 있다.

 

“한 점의 허세나 억지가 없는”

200여 작품, 한 권에 담아

 

선생은 조선시대 한국화풍을 이룬 진경산수화의 맥을 이은 거의 유일한 여류 화백으로 꼽힌다. 일반인에게 포괄적으로 ‘동양화’라고 인식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한국의 독특한 화풍이다. 흔히 ‘진경’(眞景)이라고도 하는 이 화풍은 조선 후기 실경(實景) 산수화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한국적 화풍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전의 형식화된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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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 화백 수향 이순영 선생. 선생은 조선시대 한국화풍을 이룬 진경산수화의 맥을 이은 거의 유일한 여류 화가로 꼽힌다.

 

아울러 ‘주자학’적 시각에서의 자연에 한국의 산천을 접목하고자 했던 당시 사대부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한국 미술계의 진단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화풍은 기존 산수화의 전통을 기반으로 당시 새롭게 유행한 남종화법(南宗畫法)을 곁들인 것으로 겸제 정선(謙齊 鄭敾)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당시 조선 전역의 산천을 찾아 그 특색을 그려냄으로써 진경산수화의 한 전형을 수립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화폭에 담아내는 산천이 지극히 관념적이었던 데 반해 정선의 시도는 사실적 묘사로 그림에 힘이 넘치고 박진감과 함께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이는 실경에 대한 관찰과 표현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겸제의 화풍은 단원 김홍도, 소당 이제관 등 한국 진경산수의 대가들에 의해 뚜렷한 한국 화풍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조선 말 장승업과 안건영, 이어 심전 안중식으로, 다시 심선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으로 이어졌고 현대로 오면서 심선에게 사사받은 박세원, 이영창, 그리고 수향 이순영이 그 맥을 이어온 것이다. 특히 수향은 서울대 미대 회화과 시절, 남화의 대가인 제당 배렴(霽堂 裴濂)을 스승으로, 그의 직전 제자로 별도의 사사를 받았다.

수향의 초기 작품에는 겸제 정선에서 수 대(代)를 이어온 진경산수화의 특징적 화풍이 그대로 녹아 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두 차례의 대한민국 국전 입선과 졸업 후 2년 뒤 수상한 특선작 ‘비봉폭포’는 선생의 ‘진경’을 드러낸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진경산수’의 맥을 이은

거의 유일한 여류 화백

 

선생은 이번에 발간한 도록에 한국에서 선보였던 정통 진경산수화와 함께 호주 이주 후 내놓은 새로운 기법의 작품들, 작가의 영성을 담아낸 종교화를 세 파트로 나누어 실었다.

한국 전통화 부문의 여성 화백이 매우 드문 상황에서 수향은 평생 진경산수화의 맥을 이어오면서 작가 나름의 화풍을 만들어낸 작가로 꼽힌다. 겸제에서 이어진 진경 부문에서 쟁쟁한 대가들이 이름을 남긴 가운데 여성 화백을 찾기 힘든 것은 진경산수화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생과 같은 시기에 ‘진경’을 선택한 이들 가운데는 유명세를 탔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판화나 화조 등으로 방향을 튼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수향은 고집스럽게 진경산수를 이어왔으며 여기에 작가 나름의 화풍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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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완성한 ‘북악계곡’. 이 작품으로 수향은 이듬해 12월 한국미술협회 특별상을, 80년 10월에는 신일본미술원 공모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수향은 80년 일본으로 진출해 신일본미술전 산수화 부문에서 진경산수화로 은상을 차지(3회 연속)하면서 그의 이름을 강하게 인식시켰는데,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화사한 채색과 묘사 위주의 작품들 속에서 작가의 일필휘지풍 수묵산수화가 그만큼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는 방증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수향의 화풍은 일본 미술계에서도 인정받아 ‘일본 오원미술연맹’이사로 선임되는가 하면 선생의 작품은 80년대 일본 미술계 최고 작가와 같은 수준의 호당 가격이 매겨졌다. 당시 일본 최고 수준 작가들의 작품 호당 가격은 12만 엔이었으며 수향의 작품 또한 이 수준에서 거래됐다.

사실 수향은 70년대 후반 이미 일본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8년 당시 일본 최고 권위의 미술전문지인 <Art Vision> 봄 호는 수향의 작품을 폭넓게 소개하면서 평론가들의 작품평을 곁들인 바 있다. 그때 평론가 미즈카미 쿄헤이(水上杏平)씨는 수향의 작품에 대해 “한국 전통 수법으로 그가 추구하는 산수화에 대한 진지함과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그림 속에 현저히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굳이 이 같은 평가가 아니더라도 수향의 작품에는 여성의 손길이라고 보기 힘든 붓 터치를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풍경은 웅장하고 기운을 뿜어내는 듯 힘이 넘친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강한 흡입력이 있다.

그런 한편 수향이 호주로 이주한 이후 완성한 작품들 중에는 굵은 선을 이용해 몇 번의 터치로 묘사해낸 작품들도 다수 눈에 띈다. 시드니 하버(Sydney Harbour)의 요트 등을 굵은 붓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묵직한 힘을 느끼게 한다.

때론 섬세한 붓놀림으로, 때론 선 굵은 터치로 만들어내는 풍경과 사물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수향의 종교화에서도 크게 돋보인다. 성지순례 길에서 작가가 만난 풍경, 예수 시대의 사물들은 세세한 묘사 또는 단순하면서도 생동감을 주는 굵은 선을 통해 역사의 흔적과 함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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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길에서 작가가 만난 풍경, 예수 시대의 흔적을 담아낸 수향의 종교화는 섬세하거나 때론 단순하면서도 생동감을 주는 굵은 선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케 한다는 평이다. 사진은 2005년 완성한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요한 2 : 5. Do whatever he tells you, 왼쪽)와 ‘베드로의 집’(Peter's home in Caparnaum, 오른쪽).

 

대표작 ‘비봉폭포’,

‘국가지식포털’의 ‘유물’로 선정

 

이 같은 수향의 독특한 화풍은 진경산수화의 맥을 이으면서 작가 나름대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수향의 작품 중 대한민국 국전 ‘특선’ 수상작인 ‘비봉폭포’(고려대학교 박물관 구입, 소장. 1960년 국전 출품 당시 제목은 ‘적취’였다)는 지난 2013년 ‘국가지식포털’(한국의 각 기관별로 전산화된 국가 지식 자료를 통합 검색으로 제공해 모든 이들이 지식 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한 포털 사이트)에서 ‘대한민국 한국화’ 부문 유물로 선정된 바 있는데, ‘국가지식포털’은 수향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거친 암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습과 바위의 질감에 충실한 이 작품의 조형 감각은 그 표현법에서 매우 서구적인 시각이 가미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보다 불과 10여년 연배였던 서세옥, 안상철, 천경자, 박래현 등과 같은 많은 선배들이 전통회화의 현대성을 찾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을 이 작품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료나 기법 등의 형식적 요소만으로도 동-서양화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간파한 윗 선배들은 전통 회화가 지닌 요소만을 취하고 버리는 실험을 계속하면서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우리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고답적인 전통 회화와 지나칠 정도로 전위적인 현대 회화 사이를 줄다리기 하면서 나름대로의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가게 된다. 비록 옷을 바꾸어 입었지만 그 근저에는 항상 전통이라는 뼈대가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봉폭포’에서는 서구적인 조형어법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는 듯하다.>

또 미술평론가 조정육씨도 “선배들이 고민해온 조형감각의 현대화를 이루는데 있어 이 작품은 이미 성취된 모습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작가의 이 같은 실험과 이를 통해 그가 성취한 화풍에 대한 평가는 수향이 호주로 이주한 뒤 완성한 작품들에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난다. 서울대 미대 교수이자 화가이며 평론가인 김병종 교수는 “수향의 산수화는 전통적 방식의 화법을 자기만의 필치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주를 이루었는데, 호주로 이주한 뒤에는 삼원구도 등을 뛰어넘는 서구 풍경화적 방식을 자신의 준묘법에 과감히 도입해 제3의 새로운 양식을 세우기에 이른다. 거대하고 밋밋한 그곳의 암산(巖山)이나 토산(土山)을, 그가 나서 자랐던 우리나라 강원도 금강산 풍이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준법으로 새롭게 재해석해낸 것”이라는 말로 수향의 화풍을 설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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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대 교수이자 화가, 평론가인 김병종 교수는 “수향의 산수화는 전통적 방식의 화법을 자기만의 필치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주를 이루었는데, 호주로 이주한 뒤에는 삼원구도 등을 뛰어넘는 서구 풍경화적 방식을 자신의 준묘법에 과감히 도입해 제3의 새로운 양식을 세우기에 이른다”고 평한 바 있다. 시드니 하버(Sydney Harbour) 풍경을 담은 일련의 작품들은 이를 가장 보여준다.

 

수향이 호주 이민 직후, 가장 왕성하게 창작에 전념하던 당시 완성한 ‘세 자매봉’(Three Sisters in Blue Mountains), ‘허미트 베이’(Hermit Bay), ‘시드니 하버 뷰’(Sydney Harbour View), ‘주말의 하버 뷰’(Weekend Harbour View) 등은 김병종 교수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시드니하버에 떠 있는 요트를 주제로, 먹빛의 굵은 선으로 만들어낸 일련의 작품들 또한 마찬가지이며 특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붓을 들지 못하다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 호주 중앙 내륙의 울룰루(Uluru)와 카타추카(Katatjuta)를 직접 찾아 스케치한 뒤 시드니로 돌아와 아타몬(Artarmon)의 작업실에서 완성한 ‘울룰루 시리즈’는 지난 수십 년간 그가 지속적으로 시도했던 그만의 화풍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작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산수화의 기본을 지키면서 추상, 즉 이념미술을 지향한다. 흔히 산수화는 동양문화의 장르라고 하는데 외상보다 내면의 본질에 더 무게를 둔다. 그래서 한국의 은은한 먹 색깔의 한국화는 오래도록 사랑받는다.”

선생은 지난해 5월 서울시 의회 초청으로 서울시 의회 중앙홀에서 ‘64년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을 가진 바 있다. 이어 그 시간 동안의 작품을 모은 도록이 나왔다. 이는 이제 붓을 놓을 때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아쉬움이 크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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