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을 거닐며 전주를 생각하다
[2018년 세언협 대회 지방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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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한옥마을 입구의 전동성당 ⓒ 김명곤
 





수 년 전 일이다. 20여 년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모친상을 치르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광주 망월동을 방문하겠다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전주에 먼저 들렸다 가지 그려"

광주 가는 길목이니 하룻저녁 자기 집에 자면서 회포를 풀고 가라는 간청이었다.

'하긴 그려... 전주에 먼저 들러 숨을 고르는 것도 좋겠지'

지난 70여 년 한반도 땅에서 숨쉬며 살아온 한국인들이라면 아무런 감정 없이 발음하기 쉽지 않은 지명이 참 많다. 너무 많으니 아랫녘 몇군데만 예로 들자면, 광주, 제주, 대전 골령골, 여수-순천, 산청-함양-거창, 부산-마산, 통영 등. 안타깝다 못해 슬프고 미안한 감정을 불러오는 사연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지명들이다.

아마도 하늘은 광주에 가겠다는 나에게 전주를 먼저 가도록 친구를 부추겼는지 모른다. 불쾌와 분노와 불편한 감정의 순환을 오랫동안 겪게한 광주를 잰걸음에 달려갔었다면 제 성질을 못 이긴 나머지 위령탑이 보이는 먼 발치에서 뻗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주는 언제나 쉬었다 가는 곳이다. 어렷을 적 전주 인근 40분 거리 산자락에 있던 우리집 사랑채에서는 쉬었다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비람이 몰아치거나 눈보라가 길을 막는 날이면 두 세 명의 행상이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런 날 오밤중이면 여지없이 사랑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하고..."

그들이 어설프면서도 탁하게 내지르는 남도창 소리는 아슴아슴 잠을 끌어오는 수면제 같은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엿가락과 복숭아와 박대 꾸러미 등을 놓고 갔고, 우리는 며칠 동안 포식을 했다.

전주는 쉬었다 가는 곳이다. 급한 마음을 붙잡는 곳이고, 분노를 녹이고 불같은 성질을 순화하는 곳이다. 전주에 며칠만 묵으면 복잡하고 너절한 마음은 전주천 맑은 물 만큼이나 청량해지고, 억세고 거친 눈빛도 미풍에 허리 숙이는 만경강 여린 갈대처럼 부드러워 진다.

쉼과 여유의 전주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항상 물잔의 물이 반이나 남아 있고, 해는 석자나 떨어져 있다.


정과 포용


전주는 시간이 느린 곳일 뿐 아니라 정을 '낭비'하는 곳이다. 전주를 전주답게 하는 것은 정이다. 정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쉼과 마음의 여유로부터 나온다.

전주의 어느 식당을 가든, 친지 집을 방문하든 반찬이 10가지 아래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아직도 시내 곳곳의 한식집에서 최소 20가지 이상의 반찬을 상에 올리는 것을 놓고 낭비라며 비난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 정성이 담긴 후함을 모욕하는 것이며, 선택을 존중하는 전통적 환대문화를 곡해하는 것이다. 적어도 음식문화와 관련하여 전주인들에게 낭비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

보통의 인간은 정이 넘치는 것을 과유불급으로 여기며 주춤 물러선다. 자신이 따라 할 자신이 없고 속임수를 의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이 넘쳐서 껴안을 수 없는 상대를 껴안게 되면 포용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환대하는 것은 삿되고 얄팍한 서구식 개인주의 열매라 할 수 있다. 전주 사람들은 이같은 '참을 수 없는 정의 가벼움'을 배격한다.

전주에 살면서는 악착같이 이웃을 딛고 일어설 이유도 없고, 눈 부라리며 이웃의 잘못에 싸대기를 부칠 일도 없다. 그저 터벅터벅 자기의 길을 가면서 느긋이 이웃을 기다려 주면 그만이다.

전주 한옥마을 초입의 경기전 앞마당에서 고개를 살짝 쳐들고 앞쪽을 보라. 1914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의해 세워진 비잔틴풍 전동성당이 보인다. 일제시절 외세에 의해 세워진 건물이니 철거해야 마땅하다는 여론이 한 때 일었다. 태조의 어진이 모셔진 민족 성지의 코앞에 서양 오랑캐 신전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은 민족자존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전주는 포용했다. '다름'을 배격하고 파쇄할 대상이 아닌 평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문화적 가치 보존을 넘어 정으로 살아온 전주인들의 평상심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보존해야 할 것은 물체에서 나오는 문화적 가치가 아닌, 그 물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멘탈(정신)이라는 사실을 전주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의 제법 큰 실수에도 '에이, 괜찮여 괜찮여!'라는 전주인들의 언어습관을 외부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옥마을에는 '매급시'(까닭없이) 들어선 건물도 없고, 매급시 비어진 공간도 없고, 매급시 휘어놓은 용마루나 서까래도 없다. 400여년 전에 세워진 경기전 건물의 크고 작은 기둥들도 매급시 시간 내서 둥글게 둥글게 깍아놓은 것이 아니다. 둥글둥글 정이 넘치는 전주인들의 성정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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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마을을 가로지르는 태조로 ⓒ김명곤
 



뒤섞임


사람들은 '전주' 하면 '비빔밥'을 떠올린다. 음식문화가 발달한 고장의 표징으로 머리 속에 박혀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고장을 대표하는 음식에 본토인들의 삶이 진하게 녹아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특히 인간의 일차적 욕구의 대상인 '먹거리'에 대해서는 좀처럼 사고의 폭을 넓히지 못하는 것이다.

굳이 음식으로만 한정하여 얘기하자면, '전주 비빔밥'은 서로 다른 음식들이 뒤섞여 어떻게 조화를 이뤄 전혀 다름 음식으로 거듭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성정이라는 면에서는 이웃과의 뒤섞임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주인의 포용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쩌면 빈부귀천이 없는 대동세상을 세우려던 이 동네 동학농민들이 가졌던 꿈이 전주 비빔밥에 녹아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음식문화를 포함한 전통문화는 당대인들의 삶과 꿈이 담겨진 것이라는 점에 이르러 당돌한 제안 하나 해본다. 전주 비빔밥을 남과 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통일조국에 대한 꿈의 표징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부조리와 불합리의 한국 현대사로 인해 여적(여전히) 고통받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주를 방문하기를 권한다. 꿈꾸는 듯 조는 듯 한옥마을 태조로를 반나절 걸은 다음, 향교 마룻바닥에서 낮잠 한소금 붙이고, 해질녘 송사리가 노는 맑은 전주천을 거닐어보라.

전주에 가면 쉼과 포근한 정과 뒤섞임의 미래조국을 앞당겨 체험할 수 있다.

4월 14일, 전주 한옥마을과 그 인근에서

[공동취재단] 김명곤 기자 - 코리아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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