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벗님들께 보내는 쉰두 번째 편지

 

 

벗님여러분, 한가위 명절 뜻있게 보내셨는지요. 이곳 미국에서는 한가위 명절을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이민 연륜이 짧은 동포일수록 그나마 한인마켓에서 송편을 사다 먹는 것으로 추석을 기억할 뿐입니다. 음력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조국에서는 한창 한가위 연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량으로 고속도로가 붐빌 것 같습니다. 조국에 있을 때 매년 보던 그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이번 추석연휴가 제발 코로나 대확산의 계기가 되지 않기만을 멀리서 기도드릴 뿐입니다.

 

저는 추석당일 이른 새벽 동네 공원을 두 시간에 걸쳐 걸었습니다. 중천에 커다란 보름달이 훤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쟁반 같은 보름달의 위세에 눌려 주위의 잔별들은 존재감을 잃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12시간 전 조국 땅 한반도를 비추었던 같은 달일 것입니다. 보름달에 고향의 그리운 많은 얼굴들과 제 삶에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유명을 달리하신 어른들의 얼굴이 한 분씩 떠오릅니다.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 그리운 얼굴들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보름달과 무언의 대화를 나눕니다. 또 현대사의 질곡에서 무고하게 가족을 잃고 명절 때마다 가슴앓이 하는 수많은 유족들의 아픔도 생각합니다.

 

저는 유별나게 보름달을 좋아합니다. 달에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모성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까지는 매년 보름달 뜨는 것을 보려고 존스비치 해변에 달맞이를 가곤 했습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정월대보름이나 추석에 서부 사막지대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모래사막에서 보는 보름달은 다른 곳보다 몇 배나 크게 보이는 느낌입니다. 또 수많은 류성우(流星雨)의 장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 새벽 초단위로 다른 색깔로 보이는 일출광경도 장관이었습니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는 저의 조그만 사치였습니다. 지금은 젊은 시절 인생의 추억으로만 남을 뿐입니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는 매일같이 특별한 세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한 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길냥이 아버지’입니다. 제가 이 분을 처음 뵌 것이 20년 전인데 지금은 많이 늙은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의 차 소리를 기다리는 세 군데 수 십 마리 고양이들이 곳곳에 무리를 지어 나타납니다. 고양이들은 그분의 차를 멀리서도 알아보고 늘 같은 장소에서 기다립니다. 길냥이 아버지는 차에서 먹이를 꺼내 물과 먹이를 그릇에 담아줍니다. 이분은 고양이마다 이름을 붙여줘 한 마리라도 보이지 않으면 “탐” “조지” “피터”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고양이들이 멀리서도 알아듣고 달려옵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보통일이 아닙니다. 사료 값도 만만치 않은데다 어느 한 마리라도 병이 들면 데려가 치료해줍니다. 물론 실비로 치료해주는 가축병원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보통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폭우와 폭설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간단합니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굶길 수는 없지요, 우비 쓰고, 파카 뒤집어쓰고 와야지요.” 한 동안 새벽에 보이지 않아 오랜만에 만나 물었더니 그동안 코로나에 걸려 두 달 동안 딸이 대신했는데 늦게 나와 고양이들이 고생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바싹 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저와 가깝게 지내는 뉴저지 어느 분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러한 휴머니스트들이 있어 그나마 인간사회가 유지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분들은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의인들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저 혼자 ‘폭스바겐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매일 새벽 폭스바겐을 타고 정갈한 복장으로 나타나시는 70세 정도 할머니는 꼬챙이와 큰 쓰레기봉투를 들고 두 군데 주차장과 다섯 군데 경기장을 돌면서 쓰레기와 담배꽁초 등을 주워 담아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처음에는 공원에 고용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조심스레 대화해보니 ‘즐겁고 보람 있게 운동’한다는 대답입니다. 악천후([惡天候] 날 외에는 그렇게 하루 3시간 운동하면서 건강을 챙긴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한 분은 93세 샘 할아버지입니다. 매일 공원을 산책하면서 아침인사를 나누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제 나이를 묻기에 일흔다섯이라고 했더니 저를 ‘kid'(어린애)라고 부릅니다. 10여 년 전 부인을 사별하고 혼자 사신다고 합니다. 아들도 죽고 60세 넘은 막내딸이 한 달에 한 번 방문한다고 합니다. 취사와 세탁을 손수하시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십니다. 저와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할 때는 저의집 앞을 지나면서 ’하이‘하며 손을 흔드십니다.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제가 매일 새벽 공원을 걸었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주로 해변과 숲속을 걸었기에 한동안 이런 소중한 이웃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매일처럼 얼굴을 보고 가끔 이야기 나누던 공원벤치의 노숙자 피터가 보이지 않아 궁금합니다. 코로나시대 희생자가 되었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 새 동녘하늘에 시나브로 먼동이 트기 시작합니다. 보름달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고 인자한 느낌으로 중천(中天)에 머물러 있습니다. 공원을 한 바퀴 더 돌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동녘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보름달은 어느새 희미해집니다. 동녘하늘은 옅은 주황색에서 차츰 황금색으로 변하다 7시가 가까워지면서 눈부신 찬란한 아침햇살로 변합니다. 이는 맑은 날의 현상이고 어느 날에는 구름 때문에 하늘이 시뻘건 핏빛으로 물들기도 합니다. 문득 아침기도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찬란한 아침햇살 밝아오면서

세상에 밝은희망 미리알리고

태양빛 온누리에 두루비추니

만물도 오색으로 제빛발하네 (아침기도 찬미가 중)

 

조국 대한민국에 부디 밝은 희망이 도래(到來)하기를 기도합니다. 벗님 여러분 코로나 시대에 용기를 잃지 마시고 마지막 고비를 힘차게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2021년 9월21일

 

뉴욕에서 장기풍 드림

 

 

장기풍 칼럼니스트.jpg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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