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가의 섬, 민족 수난의 섬 거문도 (2)

2차 조국순례 이야기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영국군 묘지로 가는 언덕길에 거문초등학교가 있다. 영국군의 테니스장 자리다. 거문도 주민들은 건설작업에 참여하면서 일당으로 식품과 술 담배 설탕 등 진기한 서양음식물을 받았다. 아픈 사람은 치료도 받았다, 주민들은 영국군 체제에 빠르게 적응해 몇 달 후에는 영어로 간단히 소통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주민들에게는 영국군 철수가 자신들이 또다시 어려웠던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섬 주민들에게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 가운데는 의식 있는 지식인도 많았다. 그 사람들은 주민들은 돌보지 않고 나라의 풍전등화 위기 속에서도 당파싸움과 가렴주구(苛斂誅求)만 일삼는 조정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거문도라는 지명도 간접적으로는 영국군과 관계가 있다. 청나라 정여창 제독이 현지조사차 섬에 들어 왔을 때 몇몇 선비들과 필담으로 대담했는데 그들의 뛰어난 문장력에 놀라 거문도(巨文島)로 부르도록 조선 조정에 건의했다. 클 거(巨) 글월 문(文) '거문도(巨文島)'로' 큰 문장의 섬'이란 뜻이다. 사실 거문도는 조선의 6대 성리학자로 손꼽힌 율곡학파 귤은(橘隱) 김유(金瀏 1814-1884) 선생이 태어나 평생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곳이다. 정여창을 상대한 주민들은 김유 제자들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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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묘지에서 바라본 정경. 보이는 섬 끝부분이 영국군 포대자리

 

 

영국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기 31년 전인 1854년에도 러시아함대가 거문도를 무단으로 침범해 통상을 요구했다. 이때 김유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문서를 보냈다. 김유 문집에 ‘해상기문’이라고 전해지는 이 문서는 우리나라와 서양이 최초로 작성한 외교문서인 셈이다. 동도에는 김유 선생 학덕을 기리는 귤은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절해낙도의 가난한 선비가 해외인사들과 학문을 겨루어 지명마저 바꿔 놓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유는 거문도 뿐 아니라 청산도와 여호도에도 서당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는 등 평생 선비다운 기품을 잃지 않았다. 김유는 1884년 71세로 타계하는 날까지 완도 청산재(靑山齋)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유가 타계하자 거문도 제자들은 낙영재에서 매년 9월9일 제례를 지내다 해방 후 고도에 새로 귤은당을 지어 그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이러한 학문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 김상순은 1899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부관리로 재직하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 고향 거문도에 사립 '낙영학교'를 설립했다. 낙영학교는 광주 송정리와 목포에 이어 전남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근대교육기관이다. 여러 차례 교명이 바뀌고 현재는 거문초등학교 서도 분교가 되었지만 섬 학교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학교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거문도가 ‘문장가의 섬’임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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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 주둔한 영국군 규모는 2백에서 3백 명으로 많을 때는 7~8백 명까지 주둔했다고 한다. 군함도 5~6척에서 최대 10척까지 주둔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수백 명 장기간 주둔하면서 여자문제가 없을 리는 없다. 여자 무당을 짝사랑하던 수병이 죽은 후 젊은 여자가 죽으면 영국군 귀신이 잡아간 것이라는 괴담도 전해진다. 나는 오래 전 어디선가 거문도에 영국인 혼혈 후손이 살고 있다는 기사를 분명히 본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가서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들어 본 사람을 찾지 못했다. 다만 당시 영국 해군기록에는 한 일본인이 여성 5명을 데려와 거문도 서도에서 유곽(성매매 업소)을 운영했다고 한다. 1886년 6월18일 저녁 2척의 보트에 영국병사 12명이 나눠 타고 유곽에 놀러 가다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났으며 11명은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나왔지만, 해병대원 피터 와드 일병은 익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빙성 있는 사실이다. 영국 해군기록에는 와드 일병이 수영이 미숙했고 주머니에 유흥비로 쓸 은화를 잔뜩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영국군은 다음 날로 유곽을 폐쇄하고 와드 일병 시신을 찾아 준 조선인에게 사례했다고 한다. 와드 일병은 영국군 묘지에 묻혔다 본국에 이장되었으며 다른 6명과 함께 지금도 묘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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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에서 거문도 등대를 연결하는 목넘어재

 

 

영국 해군이 민폐를 끼치지 않아서인지 섬사람들은 계속해 무덤 관리를 잘해줬다. 영국군은 진지구축 공사에 주민들을 동원하면서 임금을 주고 땅을 사용할 때에도 사용료를 지급하는 등 신사적인 방식으로 주민을 대한 이유도 있다. 당시 일화가 재미있다. 영국군은 대민 물의를 최소화하려는 지휘관 엄명으로 주민 거주구역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으며 특히 빨래터 근처를 지날 때는 여자들 쪽은 눈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히려 주민들이 영국군을 반기기까지 했다. 영국군은 진지보수나 포대작업 시 주민들을 고용하면서 보수는 물론이고 식사까지 챙겨주고 아픈 사람은 군의관이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영국화폐는 주민들에게 쓸모가 없어 통조림이나 술 담배 등 물건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당시 심한 노역(勞役)을 시키면서도 백성을 착취했던 관리들의 행태와 달리 영국인들은 일을 시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 주니 주민들도 영국군을 물심양면 도왔으며 2년 후 철군할 때는 주민들이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거문도와 영국과의 인연으로 주한영국대사관은 2005년부터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때때로 무덤을 참배하기도 한다. 특히 1999년 4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했을 때 이곳을 참배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정상 무산되었다. 나는 거문도에서 백성에게 버림받은 국가의 초라함을 보았다.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정부는 망하고 만다는 것이 고금 역사의 교훈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경험했다. 나는 영국군 묘지를 떠나 해변을 따라 거문도의 큰 섬인 서도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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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등대옆 관백정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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