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내 성을 찾은 사연

왜 성에 ‘두음법칙’을 강제하나

 

 

Newsroh=로창현 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오래전 중학교 2학년때입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비후염 수술을 하는데 동네 H병원에서 돌팔이(정식 의사였으나 사람잡을뻔한)한테 잘못 걸려 죽다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출혈로 시내 메디컬센터로 긴급 이송해 큰 수혈병을 6개나 맞는 등 3주간 입원하는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통에 개학하고 열흘도 더 지나 학교에 돌아갈 수 있었는데요.

 

친구가 그러더군요. 모 과목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노창현’이 계속 결석하자 “얘는 성이 노라서 학교에 안오는 모양이다”라고 했답니다. ‘노(No)’라는 부정 의미의 영어 단어를 빗댄, 썰렁한 농담이었습니다.

 

노는 한자어로 ‘성(姓) 盧(로)’입니다. 노가 아닌 로가 맞습니다. 아다시피 이씨의 한자어는 오얏 ‘李(리)’입니다.

 

‘로’가 ‘노’로, ‘리’가 ‘이’로 바뀌게 된 것은 소위 ‘두음법칙(頭音法則)’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두음법칙은 1933년 한글안 맞춤법을 계기로 만들어졌는데 ‘ㄹ’과 ‘ㄴ’이 초성과 이중모음 앞에 나올 때 ‘ㄴ’과 ‘ㅇ’으로 고쳐 쓰는 것입니다.

 

ㄹ과 ㄴ이 초성일 때 발음이 쉽지 않아 그랬다지만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두음법칙의 예외인 외래어의 경우, 발음이 전혀 어렵지 않으니까요.

 

라디오, 러시아, 레알 마드리드, 로망, 르네상스를 발음해 보세요. 뭐가 어려운가요? 되레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혀짧은 소리가 되어 더 어렵습니다. 나디오, 너시아, 네알 마드리드, 노망(?), 느네상스.

 

설사 발음이 조금 어렵다해도 어느날 갑자기 문법 법칙(?)까지 만들어 일상의 수많은 단어들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더욱 우스운건 왜 남의 소중한 성씨까지 두음법칙을 적용하냐는 겁니다. 문법이 있을지언정 성만큼은 예외로 두어야 할 판에 오랜 세월 불러온 성을 강제하는건 언어도단(言語道斷) 입니다.

 

한글안 맞춤법이 일제 강점기에 통과됐다는 점에서 그 배경에 우리의 언어표기를 흔들어 민족혼을 훼손하려는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듭니다.

 

생각해 보세요. 리씨는 한국에서 김씨(약 1천만명) 다음으로 가장 많은 약 700만명입니다. 열 번째로 많은 림(林)씨를 비롯해 류(柳)씨, 로(盧 魯 路)씨. 라(羅)씨 등 두음법칙이 적용되는 성씨들을 합치면 우리 인구의 약 40%가 해당됩니다. 이 많은 성씨들을 다른 성으로 둔갑시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게다가 두음법칙은 애초에 달랐던 성씨들이 한글표기에서 똑같아지는 문제점을 초래합니다. 류(柳)씨와 류(劉)씨가 본래부터 ‘유’인 ‘兪(유)’씨와 한글로 같은 성이 되버린 것이죠. 그러니 일제의 또다른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두음법칙은 해방후 남북이 갈라지면서 남한은 따르고 북한은 폐지하면서 오늘날 남북간 언어 이질화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남북간 오랜 단절로 서로 다른 낱말도 생겼지만 남북이 같이 사용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두음법칙으로 외형상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와 관련, 법원은 2006년 6월 '버들 류(柳)'를 쓰는 류씨 가문이 제기한 소송에서 성씨에 두음법칙을 적용해 무조건 ‘유’ 씨로 쓰도록 한 것은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결 했습니다.

 

이듬해 대법원은 성씨에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예규를 개정해 류씨는 물론, 리씨, 라씨 성을 가진 적잖은 이들이 진짜 성씨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적상 이름을 한글로 기재하기 이전부터 주민등록등·초본이나 학적부, 졸업증명서 등 일상생활에서 소리나는 대로 발음하고 표기해온 이들만 적용한다’는 조건을 달아 대부분에겐 여전히 장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70~80년대 대학가 의식화교육의 필수교재로 통한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故 리영희(李泳禧) 교수는 80년대초만 해도 ‘이영희 교수’ 였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어느날 ‘이영희가 아닌 리영희로 불러줄 것’을 요청하며 ‘리영희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뒤늦게 ‘리’라는 성을 찾은 이유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난 실향민으로서 원래 리씨이기도 했고 성을 두음법칙에 적용하는게 사리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겠지요. 그가 이영희 교수에서 리영희 교수가 되자 일부에선 요즘말로 ‘종북’이라도 된 양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종북을 즐겨 찾는 수꼴들의 ‘건국대통령’ 리승만은 ‘원조 종북’인 셈입니다. 식민지시절 들여온 두음법칙을 정부 수립후에도 방치해놓고 왜 정작 자신은 북한처럼 두음법칙을 무시하냐 이겁니다.

 

 

힐러리클린턴과함께.jpg

 

 

아이러니컬하게도 저는 미국에 와서 제 성씨를 찾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영어로 성이 ‘Roh(로)’였으니까요. 덕분에 여기선 제 이름에서 부정적인 선입관이 느껴질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만난 같은 노씨 중에서 ‘Noh’를 고집하거나 심지어 ‘No’라고 쓴 분도 만난 것입니다. 리씨 중에서도 ‘Yi’라고 쓰는 분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알타이어족의 많은 언어들에서 어두에 ‘r’ ‘l’ 음이 오는 것을 꺼리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며 두음법칙의 필요성을 합리화(?) 합니다. 그렇다고 ’루천년(累千年)‘ 멀쩡히 써온 성을 바꾸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노창현’ 대신 ‘로창현’을 쓰는게 맞다는 칼럼의 취지에 공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더불어 저처럼 한글에서 본래 성을 박탈당한 많은 분들이 ‘내 성 찾기 운동’에 동참하였으면 하는 소망도 피력해봅니다.

 

 

蛇足(사족) : 요즘 ‘로창현’으로 표기된 많은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더러는 ‘노창현’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갑자기 바꿔버리면 ‘노창현기자는 대체 어디로 갔나?’ 헷갈리실까봐 과도기를 거치는 과정입니다.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no

 

 

  • |
  1. 힐러리클린턴과함께.jpg (File Size:57.3KB/Download:21)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역사인식 file

      [열린창]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2일(현지시간)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오늘 ...

    역사인식
  • 미중 싸움에 등 터지는 한반도, 피할 길은 없나 file

      [시류청론] 남북정상, 제2의 민족상잔 피할 길 모색해야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북한전문사이트 <분단을 넘어=Beyond Parallel>는 얼마 전 모두 6차례 찍은 북 서해안의 남포 해군조선소에 대한 위성사진 분석 보고서...

    미중 싸움에 등 터지는 한반도, 피할 길은 없나
  • 양복포비아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양복을 입는 것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목사가 되기 전 나는 양복 입기를 정말 좋아했다. 다양한 패션의 양복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양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설교나 집...

    양복포비아
  • “백신으로 코로나지옥에서 벗어나는 미국입니다” file

    뉴욕에서 벗님들께 보내는 마흔아홉 번째 편지 도쿄올림픽 새로운 코로나지옥 가능성..참가 재고해야       벗님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욕은 며칠 전 쿠오모 주지사가 주 전체 비상령을 해제하고 거리두기 기준을 완화했습니다. 지난 해 하루 수천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

    “백신으로 코로나지옥에서 벗어나는 미국입니다”
  •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 없이 북미대화 어림없다 file

      [시류청론] 문재인 정부, 형제애 발휘해 북 식량난 고통 덜어줘야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바이든 미 행정부의 첫 대북 대화 제의는 북의 거부로 일단 실패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 및 경제 악화를 장기간 견디지 못해 북이 머지않...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 없이 북미대화 어림없다
  • 탈성장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코로나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면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회 예배가 가져왔던 절대성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삶에 안심하게 되었다. 사실 ...

    탈성장
  • 미국, 평화 원한다면 한반도 문제 당사자에게 맡겨야 file

      [시류청론] 초강력 무기 완비한 북한… 무력대결은 답이 아니다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중앙일보> 6월 18일치를 보면, 미국 ‘국가-국토안보를 위한 EMP 대책위원회’ 사무총장 빈센트 프라이 박사는 6월 6일 공개한 ‘북한의 EMP(전자기파) 위협 평가 보...

    미국, 평화 원한다면 한반도 문제 당사자에게 맡겨야
  • 필화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나도 모르게 나는 글 쓰는 목사가 되었다. 나는 글 쓰는 목사가 아니라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내 생각이지만 그 일을 하면 잘 할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내게 다른 길을 가게 하신다. 글쓰...

    필화
  • 문재인 정부, 도쿄올림픽 불참-지소미아 종료 선언하라! file

      [시류청론] 올림픽 지도에 “독도는 우리 땅” 생떼 쓰는 일본, 두고만 볼 건가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7월 24일부터 열리는 도쿄올림픽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교과서에서까지 한국 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 일본은 이번 올림픽 성화 봉송 ...

    문재인 정부, 도쿄올림픽 불참-지소미아 종료 선언하라!
  • 미국 현충일에 file

    미국은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을 현충일(Memorial Day)로 지냅니다. 제가 속한 Veterans for Peace(평화재향군인회)에서는 보통 맨해튼 남쪽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행사를 합니다. 전쟁에서 죽었거나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을 그날 기억합니다. 제게 발언 기회가 주...

    미국 현충일에
  • 한미정상회담 합의, 미국의 실행 의지가 문제다 file

      [시류청론] 미 국무부, 한국 화해 노력에 '제재' 언급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한미정상회담 10일 만인 5월 31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김명철 국제문제평론가의 글을 통해 ‘한미 미사일지침 종료’와 관련 “고의적 적대행위이자 미국의 대북적대시정...

    한미정상회담 합의, 미국의 실행 의지가 문제다
  • 아! 지구촌교회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지구촌교회는 내가 좋아하는 교회였다. 나는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성가대지휘를 했다. 교회를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수요일에는 다른 교회를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좋은 교회로 소문난 교회들을 수요일에 ...

    아! 지구촌교회
  • ‘지구의 마지막 연필’ 시리즈 19 file

    조성모작가의 '지구의 마지막 연필' The Last Pencil on Earth 문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 Title : The Last Pencil on Earth https://youtu.be/yDit97GrdaQ https://youtu.be/QvxtxXESECo https://youtu.be/8tQNy4g5HmA Product Year : 2020 Size : Object Size...

    ‘지구의 마지막 연필’ 시리즈 19
  • 바이든의 ‘싱가포르 합의 존중’ 일단 반긴다 file

    [시류청론] 한반도 비핵화 실행 구체적 언급 없어… 북의 반응은?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한미 정상은 5월 21일 정상회담에서 대화와 외교를 통한 대북 접근법을 택하며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존중한다는 데 합의했다. 북한이 김정은 총비서의 최대...

    바이든의 ‘싱가포르 합의 존중’ 일단 반긴다
  • 카이사르의 교회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황교안 전 국무총리의 기사를 보았다. 그는 미국의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자신이 “방미 기간에 미국 주요 업체 백신 1,000만 개를 한미동맹 혈맹 차원에서 대한민국 쪽에 전달해줄 것을 정·재계 및 각종 ...

    카이사르의 교회
  • 누구를 위한 ‘쿼드’ 참여인가 file

    “쿼드참여는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     지난해 6월 3일 이수혁 주미 한국대사가 미중 갈등과 관련해 “일각에서 우리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서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우리가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

    누구를 위한 ‘쿼드’ 참여인가
  • 목사가 필요하다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나는 스스로 담임목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목사와 교제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목사라는 호칭을 붙이는 목사와도 교제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전화를 걸건 메일을 ...

    목사가 필요하다
  • 문 대통령 4년차 특별 연설에 거는 기대

    [시류청론] 평화의 길 트고, 검찰개혁, 경제 혁신 성장 지속하길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4년차 특별연설에서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우리와 긴밀히 협의한 결과 바이든 미 행정부는 긴 숙고의 시간을 끝내고 대...

    문 대통령 4년차 특별 연설에 거는 기대
  • 공동의 식사

      [종교칼럼] 하나님 나라의 예표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코로나19가 오기 전 나는 두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 교회는 교사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다른 한 교회는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방문해서 설교도 아니고 강의도 아닌 나눔의 시...

    공동의 식사
  • 미국의 ‘단호한 억지’, 북핵 해법 아니다

      [시류청론] 바이든 발언에 격분한 북한, 북미관계 개선에 난기류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바이든 대통령이 4월 28일 의회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이 미국과 세계의 안보를 위협한다. 동맹국과 협의해서 외교와 단호한 억지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억...

    미국의 ‘단호한 억지’, 북핵 해법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