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침 날씨는 쌀쌀하지만 겨우내 옷 속에 감춰져 있던 피부가 봄 햇살의 기분 좋은 도발을 충분히 즐기도록 반팔을 입고 나섰다. 그것이 어느 해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 손이 아직 고사리처럼 가늘고 부드러울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연도에 서서 이 대회를 보면서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내 눈에 이 길을 달리던 마라토너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종족이 달라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고 감히 내가 이 길을 달리고 싶은 욕망조차 가질 수 없는 피안(彼岸)의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르고 흘러 이제 내 나이 육십에 이 대회 스타트 라인에 섰다. 나는 이제 충분히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미국 대륙횡단 마라톤을 단독으로 해냈으며 대한민국 일주 마라톤을 하고 이 자리에 섰다. 감회(感懷)가 물밀 듯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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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총성이 울리고 엘리트 선수들이 달려 나가고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앞에서 출발하여 숭례문을 지나 시청광장을 지나서 을지로를 달려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 사거리에서 다시 을지로를 타고 올라와 다시 청계천을 따라 달려갔다. 10 km를 지났지만 2만 8천여 명이 한꺼번에 뛰는 길은 복잡하여 제 속도를 내며 달릴 수가 없었다. 한 방울의 물방울 같은 사람들이 모여 폭포수(瀑布水)처럼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청계천 길을 따라 흐른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장관을 이룬다. 온 인류가 이렇게 건강한 육신 속에서 넘쳐나오는 환호를 지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평화의 길로 함께 달려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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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거리에 혼신을 다하는 것은 달리는 사람만이 아니다. 아직도 가지는 앙상한 채로 있지만 거리의 가로수들이 대지에 내리는 봄의 생기를 빨아올리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는 생명의 건강한 소리가 들린다. 시선은 노랑나비가 되어 도심의 길거리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꽃보다 아름다운 봄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자태를 쫒는다. 모진 추위 속에서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들의 군더더기 없는 몸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출발선에 서서 같은 목적지를 향해 살갗을 비비고 달리면서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우는 최고의 인간정신이 발현(發現)되는 순간이다.

 

청계천을 한 바퀴 돌고 종각을 돌아서 종로로 들어서니 이제 길이 넓어지고 몸도 예열이 되고 모공이 열리면서 우주선이 궤도(軌道)에 들어선 듯 속도가 실리면서 기분도 한층 고조되기 시작한다. 햇살 좋은 봄날 도심의 한복판을 맘껏 활보한다는 것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가온다. 이제 흥인지문도 지나고 천호대로로 들어선다. 오늘 마음의 부자들은 강남의 집을 갖지 않고 좋은 차도 없고 명품이 하나도 없어도 건강한 육신과 영혼을 소유하고 봄의 화려한 색체를 눈에 담고 바람처럼 자유로움을 누린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 달리는 행위이다. 달리면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소유하지 않고도 소유하는 풍요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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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점을 지나 신답지하차도를 지나면서는 함성을 지르면서 소리의 울림도 즐긴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위로와 기쁨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스스로를 잘 경영한 최고의 사람 중에 일원이 되어 최선을 다해 달리며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나면 또 다시 거친 세상에 나가도 충분히 살아갈 열정과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온갖 세파(世波)를 다 헤쳐 살아온 날들이 기적이다. 이제 다시 그 삶의 경이를 바라보며 살아갈 날들의 기적의 터널 속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어린이대공원도 지나고 건국대학교도 지나고 30 km 지점을 지나면서 마라톤은 후반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기운은 점점 소진(消盡)되고 있지만 아직은 뛸만하다.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진정한 레이스를 펼칠 때이기도 하지만 간혹 훈련이 잘 안된 사람들이 다리에 경련이 나서 멈추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다. 마라톤은 아주 정직한 운동이다. 좋은 체질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는 있지만 연습을 안 하고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잠실대교 밑으로 한강물이 넘실대며 흐른다. 결승점을 향하여 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봄 풀밭에 풀어 논 양떼들의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 정면으로 롯데월드의 웅장한 모습이 시야를 꽉 채운다. 거리에 응원을 나온 악단의 장단에 맞춰 스텝도 밟아보고 어린아이들이 내미는 고사리 손도 잡아가면서 어느덧 발걸음은 골인지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아직도 남은 힘이 있다면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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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결승점이라는 것이 아주 깊은 기쁨과 환희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보물찾기 같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서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적어도 인생의 수많은 난제(難題) 중에 다만 몇 가지라도 풀어줄 열쇠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의 덫이 두려워 사랑도 못해본 노총각 노처녀들도 마라톤에 열정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이 끝난 후에 몰려오는 그 허전하고 배심감보다도 더한 달릴 때 몰려오는 그 고통 속에서 밀려오는 오묘하고도 감미로운 생의 비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봄에는 모든 총기(聰氣)가 오감에 쏠린다. 눈에 잔득 신경이 곤드서서 갓 솟아오르는 생명의 활기찬 움직임을 쫓고, 코는 또 꽃향기에, 귀는 또 생명의 노랫소리에 넋이 나가고 만다. 피부가 그렇게 햇빛과 애무를 즐기고 혀는 푸성귀 맛을 탐한다. 명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 삶에 명품 마라톤을 뛴 추억을 하나 더 가슴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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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명구

 

* 2015년 만 57세의 나이에 아시안 최초로 특수유모차를 밀며 나홀로 미대륙횡단마라톤을 해냈다. 그 해 가을엔 모국으로 귀환, 역시 특수유모차를 밀며 독도와 제주도를 포함, 한국을 일주하는 마라톤에 성공했다. ‘글로벌웹진’ 뉴스로에 ‘강명구의 마라톤문학’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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