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얼을 지니지 못한 민족은 

수 천 년 역사를 지닐 수도 없다. 

다민족 사회에서 

고유문화를 다른 민족들과 공유하며…… 

 

9022ec53ce73e75b6a4f84da2efccbb3_1520994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설날보다 대보름날이 더 특이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민 생활을 하다 보니 절기에 대한 감각이 없이 지내는 게 현실이다.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우리 조상들은 음력 절기에 따라서 농사일을 집행해 나갔다. 또한 어업에 종사하는 선조들도 음력을 기준으로 조수의 들고 남을 파악했고 거기에 따라 어업활동을 펼쳐나갔다. 

 

농경민족적인 기층문화를 형성해온 우리 조상들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여러 가지 대보름 행사를 치러왔다. 달을 기준으로 한 농업이기에 달은 한 해 농사와 관련된다. 정월대보름에 집중적으로 행해지는 여러 풍속은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많다. 한 예로 달맞이 할 때 보름달이 크고 밝으면 풍년으로, 윤곽이 엷거나 붉으면 흉년으로 점치기도 했다.

 

농사일은 하느님과의 동업(?)으로 하는 사업이었다. 인간의 힘은 하느님의 위력 앞에선 너무 초라했다. 가뭄, 풍수해,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명절이 있었기에 마음은 풍요로웠고, 인심은 후하였다.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는 새해맞이 잔치분위기가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전통적으로 이어 내려왔던 대보름 풍습을 회상해본다. 

 

대보름날 아침에 땅콩, 호도, 잣, 은행, 날밤 등의 껍질이 딱딱한 과일을 깨물며 ‘일년 열두 달 무사태 평하고 부스럼(종기)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축원한다. 

 

부럼은 껍질이 단단한 과일들의 총칭이기도하고 부스럼의 줄인 말인 ‘부럼’이기 도 하다. 피부가 이처럼 단단해져서 종기가 안 나도록 해주십사하는 뜻과 부럼을 깨물어서 치아를 튼튼하게 하려는 의미가 있다.

 

대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다니며 이름을 부르고 상대방이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게’한다. 이렇게 하면 그 해의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내 더위를 사 가게’하면 오히려 더위를 사는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되었다.  

                

정월 첫 자일(子日, 쥐날)에 밭두렁이나 논두렁에 일제히 불을 놓아 잡초를 태운다. 불의 크기가 그 해의 풍년, 흉년을 좌우한다하여 마을끼리 경쟁적으로 불을 키우기도 했다. 이날 들판을 불 지르는 것은 쥐를 박멸함과 동시에 논밭의 해충을 제거하고 새싹을 왕성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횃불 싸움은 주로 청년들끼리 마을 대항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그 집의 가족수대로 싸리나 짚으로 홰를 만들어 풍악을 울리며 횃불로 때리며 싸운다. 승패는 항복하는 사람이 적은 마을이 이기는 것으로 가려지는데 지는 쪽은 그 해 흉년이 든다고 했으므로 장관을 이루며 치루는 행사였다. 

 

이 외에도 귀밝이술, 과일나무 시집보내기, 지신밟기, 다리밟기, 장승제, 연날리기, 윷놀이, 사자놀음, 놋다리밟기, 강강술래 등이 대보름에 행해졌으며, 마을 사람들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 힘차고 진취적인 놀이인 고싸움놀이, 차전놀이, 나무쇠싸움, 용호놀이, 줄다리기 등도 했다. 이렇게 한바탕 잘 놀고 나면 마을끼 리의 단합도 잘되어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농사일도 한결 수월하게 해내게 되는 것이다.   

  

이민 사회에서는 문화의 동결현상( 凍結現狀)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민을 떠날 때의 생활 문화가 보존되어 몇 십 년이 흐른 뒤에도 그 생활습관을 재생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지난 50여년 사이에 너무 변해버려 전통문화가 보존되지 못하고 있을 정도이다. 농촌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더욱이 농촌에서는 자라나는 세대를 볼 수가 없는 현상이다. 오히려 해외 이민 사회에서 이를 재현하고 후세들에게 조상의 얼을 전수시키는 일이 더 수월할 지도 모른다. 조상의 얼을 지니지 못한 민족이 수 천 년 역사를 지닐 수도 없는 일이며 그러한 후손들이 뿌리 깊게 다민족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확립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가는 곳 마다에서 박해와 차별을 받으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집시들을 되돌아본다.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없고 나라도 없었으므로 신분을 보장받을 기록물도 없다. 

 

우리 한민족도 세계만방에 그냥 뿔뿔이 흩어져 개별적인 삶만 이어간다면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도 집시 같은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조상의 역사와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고유한 문화를 다민족 사회인 뉴질랜드에서 다른 민족들과도 공유하면서 뿌리내리기를 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인보다 규모가 크기도하지만 그들은 결속력이 강하여 뉴질랜드 내에서도 중국커뮤니티는 중량감이 크게 작용한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기간에 오클랜드 시내 도메인 파크에서 실시되는 랜턴 페스티벌(Lantern Festival)은 금년으로 19년 째 계속되는 행사이다. 연 인원 수십 만 명이 참여하는 오클랜드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한인 사회에서도 정월대 보름 기간에 한인의 날을 개최하고 이를 계기로 전통 문화를 다른 민족들과 함께 즐기도록 하는 프로그램 이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 오클랜드 한인의 날은 10월-11월에 실시되어오다가 2002년부터 민족 고유 명절인 설날기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받아들여 2월로 앞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연초 준비 기간 등으로 날짜가 밀리다가 4월에 시행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가고 있다. 날씨 사정을 참조하더라도 4월 보다는 2월이 훨씬 유리하다.

 

칼럼니스트 한일수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변화의 바람 거센 NZ 정계

    지난 2월 국민당은 당의 새 얼굴로 ‘사이먼 브리지스(Simon Bridges, 41)’의원을 내세웠다. 당 역사상 최초의 마오리계이자 나이 역시 마흔을 갓 넘긴 젊은 제1야당 대표의 등장은 작년 총선 직전에 노동당이 재신다 아던(Jacinda Ardern) 현 총리를 선택한 변혁의 바람...

    변화의 바람 거센 NZ 정계
  • 이슬람

      전세계 17억 신도를 가진 이슬람은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     그나마도 왜곡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슬람 세계는 오랫동안 서구 기독교 세계의 ‘적’으로 간주되어 부...

    이슬람
  • 정월 대보름 감상

    조상의 얼을 지니지 못한 민족은  수 천 년 역사를 지닐 수도 없다.  다민족 사회에서  고유문화를 다른 민족들과 공유하며……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설날보다 대보름날이 더 특이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민 생활을 하다 보니 절기에 대한 감각이 없이 지내...

    정월 대보름 감상
  • 자기 무덤파는 개발업자들

    최근 3년 동안 아파트 개발 계획들이 줄을 이어 중단되고 있다.     중단 이유는 향후 시장의 변화에 따른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거나 청약율이 낮아 은행으로부터 건설 자금에 대한 융자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시중 은행들의 개발업자들에 대한 투자 거부감은 같은 ...

    자기 무덤파는 개발업자들
  • 상념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엔 너무 아깝다.’  영국의 문인인 죠지 버나드 쇼가 한 말이라 합니다. 94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니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들을 시샘하며 입술을 툴툴거렸을까 상상하면서 설핏 웃곤 하지만 한편으론 그의 말이 절대...

    상념
  • 탈무드(Talmud)

      종교문제는 다분히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많은 주제이지만 한 번쯤은 짚고 넘어 가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로 유대인을 택했다.    유대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상 최강의 성공 민족이다. 전세계 약 1300만 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 인구의 약 0.2%...

    탈무드(Talmud)
  • NZ 여성들 “자녀 적게, 늦게 갖는다”

    뉴질랜드 여성들이 평생 동안 출산하는 자녀의 수가  이전에 비해 크게 줄면서 출산 나이 자체도 늦어지고 있다.      지난 2월 하순 발표된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이른바 ‘합계출산률(total fertility rate)’이 작년에 사상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

  • 검은 보석같은 친구‘릴리앙’

    여름이 저만치 물러나면서 손짓해 불러들인 다음 손님. 가을이 왔다. 따가운 햇살속으로 안겨오는 바람이 제법 상큼하다.    이 때 쯤일게다. 다알리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다알리아 꽃을 생각하면 문득 잊고 살았던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탐스럽게 검...

    검은 보석같은 친구‘릴리앙’
  • 21세기 문명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21세기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문명은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휴머니즘을 발견해야……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조국이 신음하고 있을 때 일본은 그 말기적 증상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바로 그날 세상에 태어났다. ...

    21세기 문명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 그리스, 로마신화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었을 때 기적(奇蹟)이라고 하고 그 스토리를 신화(神話)라고 부른다. 신화(神話)는 우리에게 꿈을 주고 역사를 심어주는 중요한 매체이다.    신화학자인 웬디 도니거 시카고대 교수는 신화는 현미경 기능과 망원경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그리스, 로마신화
  • 한 많은 한민족의 한풀이

        잘 사는 게 최대의 복수이다.  핏 속에 응축된 한풀이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이민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나가야……     벌써 26년 전의 일이다. 1992년 말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보고 승가사 쪽으로 내려오는데 젊은 아가씨들의 창(唱)소...

    한 많은 한민족의 한풀이
  • 2018년 뉴질랜드 이자율 전망

    뉴질랜드 이자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요인들을 먼저 살펴 보자.    중앙은행 금리  지난주 8일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국제원자재가의 상승과 세계 경기회복에도 여전히 예상보다 낮은 국내 인플레이션과 안정된 주택시장 등의 요인으로 OCR(중앙은행 금리)을 1....

    2018년 뉴질랜드 이자율 전망
  • 학교에 교사가 부족하다

      학교들이 긴 방학을 마치고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학교에서 아직도 필요한 교사들을 구하지 못해 반을 재편성하거나 과목을 줄여야 할 형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육계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사 부족 문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학교에 교사가 부족하다
  • 오싹한 풍경 속에 즐기는 만찬

    평소 이색적인 즐길거리와 먹거리를 찾아 다니고  거기다 모험심까지 충만한 이들에게 딱 어울리는  레스토랑이 뉴질랜드에 등장했다.    ▲ 하늘에서의 결혼식​   2월 초부터 중순까지 오클랜드 항구 옆에 문을 열고 영업 중인 ‘Dinner in the Sky’라는 이름의 하늘 레스...

    오싹한 풍경 속에 즐기는 만찬
  • 2018년 뉴질랜드 이자율 전망

    뉴질랜드 이자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요인들을 먼저 살펴 보자.    중앙은행 금리  지난주 8일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국제원자재가의 상승과 세계 경기회복에도 여전히 예상보다 낮은 국내 인플레이션과 안정된 주택시장 등의 요인으로 OCR(중앙은행 금리)을 1....

    2018년 뉴질랜드 이자율 전망
  • 손님 싫어하여 망한 부자 이야기 5편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경주 최부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또는 ‘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해진 것으로,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

    손님 싫어하여 망한 부자 이야기 5편
  • 신기루에 꿈은 없다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려워  일확천금을 노리고 투기 열풍에 뛰어든다.  그러나 전문 투기꾼들의 농간에 휘말려……     나폴레옹의 군사들이 이집트 원정 중에 일어났던 일이다. 분명히 앞에 보이던 호수가 소멸되는가 하면 풀잎이 야자수로 보이는 현상...

    신기루에 꿈은 없다
  • 소박함 속에 있었네. 어떤 행복이....

      벌써 십여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그 옛날 어머니가 해 주었던 호박 칼국수 타령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친구가 있었다. 시대가 변해서 쉽게 먹을수 있는 먹거리들이 수없이 많아졌다. 옛날 칼국수는 손으로 밀어서 했기에 편하게만 사는 세상에 드문 음식이 되어 ...

    소박함 속에 있었네. 어떤 행복이....
  • 파스칼의 팡세

      이 번주부터는 그 동안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양을 벗어나 서양 인문학으로 넘어 가려 한다. 그래서 첫 책을 고르는데 조금은 신중을 기했다. 서양 인문학의 처음 시작을 종교적 색채가 깊은 철학 책을 택했다. 결과적으로는 무거운 것을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파스칼의 팡세
  • 여전히 어려운 내집 마련의 길

    내집 장만을 비롯한 주거 문제는 현재 뉴질랜드 정부와 국민들이 안고 있는 오랜 숙제거리 중 하나이다. 특히 대도시 주민들의 열악한 주거 현황은 매번 선거 때면 중요한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곤 했지만 아직 뚜렷한 해결책 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악화되는 실정이...

    여전히 어려운 내집 마련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