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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살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어머니가 병이 나셨나?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무슨 일인지 약간의 긴장을 하면서 달려갔다.

 

함께 살던 아들들 가족 분가시키고 두분만 오롯이 남아 사는 헐헐한 집이었다. 어머니가 역시 안 보였다. 그럴리 없는 일이지만 혹시 부부 다툼이라도 있었던걸까? 아버지의 표정부터 살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나를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네 어머니는 장에 가셨다. 이리 좀 들어와 봐!”

장난끼가 보이는 눈빛으로 한발 먼저 들어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장농서랍 깊은 곳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한참 찾는 아버지. 긴장이 풀리고 맥이 빠지려는 찰나 아버지의 손에는 빳빳한 고액지폐 몇장이 들려 있었다. 비상금을 털어 딸에게 용돈을 주시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잠시 설레었다.

 

“이 돈 가지고 가서 왜 그거있지...”그게뭔지 한참을 주춤거린후 생각난듯이“여자들 들고다니는 빽... 핸 드 백...그거 하나 사다주렴... 아무도 모르게...비밀이다..”

 

눈이 동그랗게 놀래서 바라보는 딸을 등떠밀어 내쫓듯 돌려세웠다.“네 어머니 선물이니까 알아서 잘 골라봐”

 

의구심 가득한 딸을 안심시켜야하는 아버지의 구차스러운 변명섞인 부탁이었다.

 

그럼 그렇지. 마누라 바보로 칭해도 좋을 아버지. 지금으로 말하자면 깜짝 이벤트를 하시겠다는 뜻이었다. 딸의 눈치를 알아차린 아버지께서 민망한듯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 날 어머니가 한번도 손에 들어본 적 없는 고급 핸드백을 당당하게 사 들고 왔음은 물론이다. 어떤 방법으로 이벤트를 했는지는 두분만의 비밀로 물어보지 못했다.

 

어렸을 적엔 몰랐었는데 결혼해서 살다보니까 아버지는 대단한 애처가였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늘상 마누라 덕에 산다고 어머니를 추켜세웠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지대높은 집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골목에 보이면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저기봐라 호박같이 둥글둥글한 네 엄마가 오시잖니 골목이 화안하다”아버지가 어머니를 호칭하는 호박같이 둥글다는 표현은 복있는 마누라란 뜻이었다.

 

당신은 복 붙은데가 없는 인상이지만 엄마 얼굴엔 잔뜩 복이 붙어있다고 은근히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랑조랑 육남매 건강하게 잘 키우고 따뜻한 가정 일구는게 전부 아내의 덕이라고 공을 돌리는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아버지 사업이 잘 풀리던 호시절 어머니가 늘 하는 불만은 있었다.

 

모든 여자들이 그렇듯이 돈만 갖다주지 말고 뭔가를 직접 사서 들고 오기를 많이 원했던 어머니였다. 바쁘다는 핑계였지만 아버지는 그게 안되어서 칭찬을 못 받았다. 뭐라고 군말 안할테니 맘대로 사라는 소신이었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그 소원을 풀지 못했다. 6.25전쟁이 휩쓸고 간 몰락과 잡아둘 수 없는 세월은 저만치 흘러가버렸다. 이젠 그런걸 탐할 나이도 지났다고 접어둔 모양이었다. 얼마나 긴 세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셨을까? 역시나 아버지의 아내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느 여름날 두 분이 나드리를 간다고 나섰다. 얌전하게 푸새손질한 눈이 부시게 새하얀 모시옷을 입은 아버지. 자랑스럽게 남편을 앞세우고 뒤따르는 어머니의 손에 예의 그 핸드백이 들려 있었다.

 

“우와... 핸드백 멋지다. 언제 샀어요?”

 

모르는척 호들갑을 떠는 딸에게 이번에는 어머니가 민망해 했다. 소녀처럼 살짝 볼이 달아오른 어머니. 비둘기 한쌍처럼 길을 나서던 두 분. 지금도 그 화사한 그림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우래옥’에 가서 냉면 먹고 남산에 올라가 놀다 왔다며 스냅사진을 내밀던 어머니의 행복한 모습. 겨울인생이 참으로 따뜻했던 부부였다.

 

이지적으로 냉정한 인상이었지만 인정많고 너그러운 아버지는 우스갯 소리도 잘 해서 식구들을 자주 웃겼다. 누군가 밥에서 돌을 씹었다고 투덜대면 그런것 삼켜둬야 무거워서 바람에 날라가지 않는다고 웃음으로 달래주었다.

 

“얘들아 나 지금 뒷간(화장실)에 가고싶다 근데 추워서 나가기가 싫거든. 내대신 갈사람...?”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놀던 긴 겨울밤. 갑자기 아버지가 툭 내뱉은 한마디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천국을 만든다.

 

꼬맹이 막내동생만이 무슨 영문이지를 몰라 아버지를 바라본다. 그게 또 웃겨서 웃고... 항상 웃음 꽃 피는 봄날같이 따뜻한 가정. 다복한 집안이라고 이웃들이 부러워 했다.

 

그렇다고 부부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직선적인 아버지가 어머니의 심기를 먼저 건드려 시작되는 언쟁이었다.

 

평생 울궈먹는 어머니의 한풀이가 흘러나오기 시작이다. 어리디 어린 나이에 이 집에 시집와서 모진 시집살이에 어린 시동생이 어쩌고 저쩌고...이 때부터 아버지는 말을 잃은 벙어리가 되고 천천히 돌아간 몸은 어느새 완전히 뒤를 보고있다. 혼자서 맥이 빠진 어머니가 조용해지면 그 때 바로앉아 한 말씀 하신다.

 

“이제 다 끝났수? 속이 시원하겠네... 얘들아 네 엄마 냉수 한그릇 떠다드려라!”

 

혹 취기라도 있는 날이면 발소리도 안들리게 방으로 직행을 했다. 아버지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밤이 그런때 였다.

 

평범한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참으로 반듯한 인품으로 사셨던 아버지.

가끔씩 친정에서 자고 오는 밤이 있다. 추운 겨울 비워 두었던 방이 혹시라도 추울까봐 어둠속을 들어와 봐주는 사람도 아버지였다. 바람들까봐 이불깃을 올려주고 벽에 걸린 옷가지들까지 내려 더 눌러 덮어주고 조용히 나가시는 자상한 아버지.

 

철이 들어서일까? 아버지가 방을 나가고나면 왠지 그렇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만 내세우는 어머니보다 언제나 칭찬으로 대해주는 자상한 아버지가 더욱 정이 깊은 딸이었다.

 

요즘은 황혼 이혼이니 졸혼이니 해서 나이든 부부들이 갈라서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예전에야 여자들이 무조건 참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남자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된 것 아닐까? 동등한 고학력. 고능력 시대이니 위아래가 있을 수 없나보다.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간다는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주변에서 늙어가는 남자들의 삶을 보면 안타깝다. 세태파악을 못하고 아직도 옛날 남자를 고집하는 사람들. 그들의 겨울은 늘상 외롭고 춥기 마련이다.

 

아내사랑에 부족함이 없었던 아버지의 겨울은 춥지않았다. 늘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아들들도 한결같이 애처가들이어서 가정이 원만하다. 그들 인생에도 꽃샘추위가 있었을것이다. 폭풍우인들 왜 없었을까?

 

모든 시련을 잘 견뎌내고 맞은 겨울인생들. 아버지의 겨울처럼 언제까지나 그렇게 따뜻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칼럼니스트 오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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