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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만난 그대

 

김인숙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몇 달 전부터 자주 그를 만나고 있다. 우린 금방 친구가 되었다. 사실은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선 것이다. 우린 대화 아닌 대화를 어둠이 이슥하도록 나누는데, 대부분 나 혼자만 커피나 티를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건네곤 한다. 가끔 나의 출근길 전철에도 훌쩍 올라타서 내 옆자리에 앉지만 말을 걸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린다.

한번은, 당신에게 있어 인생은 어떤 의미냐고 당돌하게 물었더니 ‘결코 두뇌에 닿지 않는 졸음’이라고 답한다. 나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자신의 두뇌는 언제든 그 안에서 슬퍼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라고 말한다.

슬퍼하며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게 우리 삶의 길인가? 난 여행을 좋아한다며 살며시 동의성 질문을 해 본다. 그는 ‘새로운 삶과 낯선 장소는 질색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과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다 보았기 때문에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만 샐쭉하여, 꼭 그렇지는 않다고 투덜거린다.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친구가 된 것도 여행의 결과다, 당신의 고향을 찾았고, 당신이 매일 드나들던 카페 앞 벤치에서 우연히 같이 사진을 찍은 후 부터였다고 항변한다. 여행은 우리 인생의 텃밭에 의미의 씨앗을 뿌리고, 자그마한 사람 마음을 조금씩 자라게 하며, 종래에는 아름다운 꽃무늬의 흔적을 들판의 바위에 새길 거라고 설득한다.

도라도레스 거리에 사는 그를 내가 방문하기도 하고, 모간 스트리트에 사는 나를 그가 찾아오기도 한다. ‘운명은 내게 단 두 가지를 베풀었다. 회계장부와 꿈꾸는 능력’이라는 그는 시인이며 회계사무원이다. ‘인생을 살 필요는 없으며 느낄 필요만 있다’고 노래하며 ‘문장에 음악을 들려주는’ 슬픈 심미주의자이다.

 

어느 날, 시티의 내 일터로 찾아 온 그에게 한바탕 하소연한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들 때문에 뇌가 흔들리며 괴로울 때가 많다고…. 조금 낡은 오층 빌딩으로 파고드는 자동차 바퀴들이 굴러가는 소리, 버스가 끼익하고 급하게 서는 소리, 명분 있다는 이유로 막무가내 앞서가려는 구급차와 경찰차의 날카로운 사이렌, 백화점과 지하철 출구가 있는 십자로를 건너는 행인들의 발소리, 말소리, 맹인들을 위한 신호등 소리, 벽에 기대어 한쪽 다리를 올려 포개고, 군중 속에서의 고독한 몸짓으로 연주하는 남자의 어설픈 섹스폰 소리….

‘음악은 마음을 달래고, 미술은 기운을 북돋우니’ 그는 내게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려 보라고 권했다. 그 뒤로 태어난 나의 그림들, 돌아간 자들의 머릿돌들이 석양에 꽃으로 피어나는(그 중에 Colleen McCullough 것도 있다) Norfolk Island의 풍경 <섬은 섬을 품고 있어요>, <St.James역전의 섹스폰 연주자> 그리고 지금은 <Menindee 호수의 빛>을 그리고 있다. 시인의 글은 시대의 아픔과 서글픈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노래인가. 정말 그의 충고는 내게 부작용 없이 효과 높은 처방전이 되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심술궂게 따져 묻기도 했다. 당신은 지나간 시간에 누군가가 써야했고 미래에 누군가가 써야할 심상을 혼자 다 표현하며, 사람마음을 기막히게 꿰뚫어 봐서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고. 그러나 그는 ‘나는 세상에서 혼자다. 영혼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 모든 것을 본다. 나는 어찌나 철저히 혼자인지 나와 내 옷 사이의 거리마저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해, 속 좁은 내 마음을 미안함으로 빨갛게 물들였다. 그는 얼른 분위기를 바꿔 그의 친애하는 친구 ‘아미엘’씨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고 둘러대었다. 실은 그와의 만남을 더욱 순수하고 내밀하게 이끌어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 친구들에게, 특히 문학회 문우들에게 그를 빨리 소개 해주고 싶다.

 

오래전, 한국의 한 시인이 인도여행기에서 자신의 전생이 인도 어떤 부족의 왕자였다고 깨달았다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었다. 그런데, 몇 권의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시인과 혁명가를 만나고 여러 사람과 교우한 뒤에, 그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왕자였던 시인처럼 또 다시 그 땅에 가고 싶고 말도 통하지 않을 시골 마을에서 살아보고프고, 지금까지 사무치니, 신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그리 오래전이 아닌 몇 백 년 전 쯤에, 나도 한사람 포르투게스(portuguese)였나. 누군가도 이 글을 보면 나처럼 피시식 웃을 것만 같다. 진정 나는 백여 년 전 도라도레스 거리에 있는 한 카페의 웨이터이고 싶다. 식사 후 포도주를 반병이나 남긴 그에게 ‘안녕히 가십시오. 소아르스씨,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하며 그의 수십 개의 이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름으로 부르며 인사하고 싶다.

‘빗줄기 속에 나의 불안이 녹아 있고, 빗방울과 함께 오늘의 슬픔이 헛되이 땅으로 떨어진다’는 그,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속속들이 파헤친 사람이 또 있을까? 소낙비가 창문을 때리는 날이면 그는 투명한 빗방울로 내게 찾아올 것이며, 해질녘 노을이 언덕과 숲을 비스듬히 비출 때면 부드러운 바람으로 불어와 우리의 우정을 되새길 것이다.

 

이제 내가 누구와 친구가 되었음을 눈치 채셨나요?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

 

* ‘ ’ 부분은 그의 명저 <불안의 책>(오진영 옮김: 문학동네)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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