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여행기 10]

중-소국경분쟁의 흔적들.... 타-키 국경엔 한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땅

거대한 산맥을 품으며 수많은 물줄기를 만들어 내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그곳엔 혹독한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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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을 내려온 뒤 찍은 사진.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파미르의 고봉들이 여행을 마무리하는 나를 배웅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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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갑에서 타직-키르기즈 국경을 향해 달리다 보면 철조망이 쳐진 중-소 국경분쟁의 현장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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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000미터가 넘는 타직-키르기즈 국경검문소앞에 대형 화물트럭들이 서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떠난 나는 카라쿨호수를 뒤로 하고 파미르 여행의 마지막 관문인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향해 북쪽으로 달렸다.

  간밤에 살짝 뿌린 비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수은주를 뚝 떨어뜨려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였으나  며칠전 두샨베에서 폭염을 경험한 나는 이런 날씨가 오히려 여행하기에는 좋은 날씨라 여겼다.   

  저 멀리 보이는 산(천산산맥의 남쪽 기슭으로 추정되었다)에는 하얀 눈이 아래쪽으로 성큼 내려 와 있었다.

  창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뭐랄까?  그리 싫지 않는 적당한 차가움이 오히려 청량감을 더해주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창밖으로 한국의 휴전선에서나 봄직한 철조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이런 오지에 웬 철조망이냐고 물어보았다.

  "저 철조망은 중국과 소련의 국경선 양쪽에 설치되었던 민간인 통제선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중소국경분쟁이 얼마나 치열했기에 민통선까지..."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국이라고 알고 있던 나는 솔직히 기사아저씨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원래 중소 국경 분쟁은 우수리 강에 홍수로 인해 다만스키 섬의 소유권이 불명확해지면서 중국과 소련 국경수비대간에 벌어진 충돌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운전기사는 자신의 군대시절 무용담들을 한참 떠든 후 "스탈린 사후 중국과 이념대립이 극심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의 감정들이 폭발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이 분쟁은 공산권의 분열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고, 소련을 견제하려던 미국은 중국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에 반공 우익의 대명사였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였고 중국은 이를 계기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권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20여년 뒤 소련 붕괴를 가져오는 한 원인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은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자 베리야, 몰로토프, 말렌코프, 불가닌 그리고 니키타 흐루쇼프 사이에서 처절한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최종 승자는 흐루쇼프였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전세계의 공산당 대표단이 참관하고 있는 가운데 무려 5시간에 걸쳐서 "스탈린은 독재자이자 악당이다.  우리는 스탈린 때문에 2차대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 이었음에도 승리한 것이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이념을 배신했다"라는 내용의 충격적인 비공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내외적으로 대대적인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과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고통받던 이들의 민심을 일거에 획득하고 자신의 권력을 다져나갔다. 이 때문에 창당 때부터 스탈린을 맹주로 추종하던 중국 공산당은 이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이전까지 중소 관계는 거의 동맹에 가까운 관계였다. 양쯔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난징 대교는 1956년 소련 기술진의 전폭적 지원 하에 건설되었고, 모스크바에는 수많은 중공 유학생들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전의 반서방 대결주의 노선을 고수하면서 소련을 변절자'수정주의자'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은 소련을 제치고 스스로를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게 되지었다.

  반면, 소련 입장에서도 중국은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는데, 노동자 세력이 주도한 혁명으로 이룩된 소련과 달리 중국의 혁명은 농민 기반의 혁명이라서 공산주의 논리에 안 맞아 보였을 뿐 아니라, 중국의 공산주의 대외정책은 지나치게 확장 일변도였기 때문에 힘을 아끼고 안정적으로 나가려던 소련 입장에서는 중국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런 노선 논쟁으로 인해서 1960년대에 접어들면 양국간의 군사/과학기술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고 소련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유학생은 전원 귀국하고 중국과 소련 사이의 국경지대에는 대규모 병력이 배치된다. 중국과 소련은 서로를 적국으로 간주하면서 군사전략을 짜게 된다. 소련은 유사시에 만주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혹은 산동반도 지역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까지 검토했고, 중국은 소련의 공격에 대비해서 내륙지방에 군수공업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중국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손을 떼고 있었으나, 청나라 말의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서방과 중국을 중재해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숙원이던 연해주를 손에 넣고 만주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중국 측은 이를 일단 인정하고 넘어갔으나, 러시아가 연해주를 강탈해갔다는 악감정은 계속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념 관계로 양국의 사이가 악화되자 잠재되어 있던 역사적 악감정이 드러나게 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선은 평화가 온 뒤에도 불확실하다가 결국 소련이 해체된 뒤에야 국경 분쟁을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다만스키 섬은 1991년에 중국으로 공식 반환되었다. 만주와 시베리아 간의 미확정 국경선은 2004년에 들어와서야 확정되었다.

   어느듯 내가 탄 짚차가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는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국경에 도착하였다. 운전기사는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중국 그리고 타지키스탄 등 네 개 나라가 이곳을  중심으로 인접해 있어요. 그래서 아주 민감한 지역입니다. 우리가 국경을 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라고 귀뜸해줬다. 

  타지키스탄 - 키르기스스탄 국경은 구름도 쉬어갈 수 밖에 없는 해발 3000미터가 넘는 파미르고원에 있지만 중-소 갈등의 증거인 녹슨 철책선 대신 소련해체 후 주변국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또다른 갈등의 현장이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미르를 이루는 산봉우리들은 이 국경을 넘어 키르기즈 오쉬에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할려는 나를 배웅이라도 하는 듯 하얀 드레스와도 같은 흰눈을 머리에 이고 나를 반기는 듯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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