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현의 뉴욕편지
뉴스로=노창현 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안희정(53) 충남도지사를 만난 것은 두 번입니다. 그냥 만난게 아니고 술잔을 기울이고 대화를 한 것이니 평이한 만남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사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계 한인미디어들의 모임인 재외동포언론인협회의 행사 차원이었으니까요.
2012년 4월 부여에서 도지사 3년차인 그는 40대 끝자락의 나이보다 더 젊어보였고 세련된 한편으로 충청도 어조가 구수하게 느껴졌습니다.
그해 재외동포언론인들은 4박5일의 행사(재외동포언론인대회) 기간동안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하여, 김두관 경남지사,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류우익 통일부 장관 등 지방의 도백(道伯)들과 주요 장관들을 연이어 만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다름아닌 안희정 지사였습니다. 겸손하면서도 매끄러운 화술의 그는 공식행사후에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 함께 해 50여명의 재외동포언론인들과 일일이 술잔을 나누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기분좋은 자리가 끝나고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재외언론인들을 향해 식당 앞에서 끝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작별하는 모습도 참 정감이 넘쳤습니다.
솔직히 고위 정치인들은 워낙 바쁘기도 하거니와 공식행사에 잠깐 눈도장 찍듯 왔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한데 동포 언론인들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고 끝까지 함께 있어준 도백은 안희정 지사가 유일했으니까요. 물론 그가 요행히 덜 바쁜 날이기도 했겠지만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도 충분히 생색이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후인 지난해 4월 재외동포언론인들은 또한번 부여에서 행사를 가졌고 재선된 안희정 지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차기 대선의 ‘잠룡(潛龍)’으로 거론되는 그였던지라, 만남에 앞서 미묘한 대선관련 질문 대신 충남 도정에 관한 얘기로 제한해 달라는 도관계자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이제 5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안 지사는 여전히 세련된 풍모에 중후한 연륜도 묻어났습니다. 여당 정부하의 야당 도지사로서 어려움 속에서도 이룬 성과들을 소개하고 소신과 정치철학을 설득력있게 제시하였습니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좋은 질문들은 많이 나와 굳이 저까지 보탤 일은 없었고, 뭔가 유머러스한 덕담을 해줘야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안 지사를 4년만에 다시 보는데 오늘도 참 인상적인 말씀을 해주신 것 같다. 대선 관련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저도 얘기는 하지 않겠다. 앞으로도 계속 도지사를 해달라, 기왕이면 언젠가는 ‘한반도 지사’가 되면 참 좋겠다..”
왁자하니 웃음이 터졌습니다. 한반도의 도지사(?)가 미래의 통일대통령을 에둘러 말한 것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녁 만찬은 4년전처럼 식당 온돌방에서 가진 자리가 아니라 우아한 호텔 연회장의 테이블이었지만 운좋게 안 지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또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입장이었는데, 저는 몇 달전 방문한 모스크바에서 느낀 소회를 전하며 한반도를 둘러 싼 주변 4대 강국중 상대적으로 소홀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당부한 생각이 납니다.
어쨌든 두 번의 만남은 안희정 지사에 대한 호감을 증폭(增幅)시켰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있는듯 하여 참 괜찮은 정치인으로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대선 후보로 등장하였습니다. 처음엔 문재인 전대표와 돌풍의 이재명 성남시장에 묻혀 미풍에 불과했는데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대선포기이후 두자리수 지지율로 수직상승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걸 봅니다. 중도층이나 기존 후보들이 어쩐지 마뜩찮은 유권자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젊고 세련된 외모, 충청이라는 출신 배경, 진보이면서 합리적이고 포용력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매력포인트로 꼽기도 합니다.
이대로만 가면 민주당경선에서는 제2의 노무현돌풍을, 본선에서는 중도 유권자들까지 사로잡는 통합형 지도자로 각인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법 합니다...
그런데...
안희정 지사의 최근 발언들이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하는 수많은 유권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된 새누리와의 대연정(大聯政)은 안지사가 대체 어떠한 정책 비전을 갖고 대통령을 하겠다는지 심각한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안지사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원내 다수파와 대연정을 꾸리는 것이 노무현정부때 구상한 헌법 실천방안으로, 미완의 역사를 완성하겠다”고 대연정론을 공식화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선 “새누리당도 연정 파트너가 될수 있느냐?”는 질문에 “누구든 개혁과제에 합의한다면 구성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안 지사가 언급한 미완의 역사란 2005년 7월 당시 노무현대통령이 선거제 개편을 전제로 야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에 총리 지명권과 내각지명권을 주는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한나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에서조차 강하게 반발해 무산된 일을 말합니다.
안 지사의 느닷없는 제안에 노 전대통령의 동지였던 문재인 전 대표측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안 지사가 지지율 상승세에 취한 것 같다”며 “노 전대통령의 대연정 제안도 선거제도 개편에 방점(傍點)이 있었던 것이고 나중엔 노 전대통령이 지지자들에게 상처를 줬다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다”고 완곡하게 비판했습니다.
지지율 2위를 놓고 경쟁하는 이재명 시장은 “역사와 촛불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안 지사의 대연정은 청산대상과 함께 정권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라며 대국민 공개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대표도 “선거전에 섣불리 연정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게 우려스럽다.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은 박근혜정권 실패에 책임이 있는 세력으로 다음 정권을 꿈꾸면 안된다”고 일갈했습니다.
반면 새누리당 정신적 전 원내대표는 “내부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열린 연정’의 필요성을 웅변하는 안 지사는 책임있는 정치인이다”라고 찬사를 보냈고 바른정당 남경필 경기지사도 “동의한다. 경기도에선 이미 시행하고 있는 일”이라고 반색했습니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안희정 지사는 “자꾸 곡해들을 한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의회와 협치해야 한다. 재벌개혁법 하나 통과시키려고 해도 안정적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협치를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한 대연정은, 그 대상이 새누리당이 될지, 바른정당이 될지, 누가 될지는 당 대표들이 의회의 안정적 과반을 점하는 과정에서 논의할 주제”라며 “그것(대연정 언급) 하나 갖고 갑자기 30년 민주화 운동의, 소신과 원칙의 정치인 안희정을 한꺼번에 폄훼(貶毁)하면 안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시장의 사과요구에 대해선 “맥락이 뭔지 모르겠다. 웬 뜬금없는 사과냐?”는 말도 했더군요.
형평성을 위해 양쪽의 얘기를 길게 소개했습니다. 제 입장은 안 지사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대연정이든 소연정이든 정치공학적 셈법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안 지사가 지금이 대체 어떤 시국인데 이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는 것이지요.
안 지사님,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할 일이 없어서 엄동설한(嚴冬雪寒) 수 개월을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까? 새누리든 바른정당이든 개혁과제에 합의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구요? 새누리와 바른정당이 어떤 세력입니까. 건국이래 최악의 국정대농단 대한민국 국격을 망신창이로 만든 ‘박근혜게이트’의 주역들과 부역자, 공동정범들이 한가득 들어있는 세력입니다. 오직 청산해야 할 대상입니다. 준엄한 역사의 심판이 내려진 후 이들중 뼈를 깎는 참회로 석고대죄한다면 훗날 혹여 선별 구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절대 아니라 이겁니다. 그런 발상조차 나와선 안되는데 노무현이 하지못한 미완의 역사 운운하다니요.
협치가 뭐길래..
대통령이 누가 되든 ‘여소야대’라 의회와 협치해야 한다구요? 여소야대가 되어 법안 하나 통과시키기 어렵다고 하소연인데 대통령 되기전부터 앓는 소리 하는겁니까? 여소야대가 되었다면 그것도 국민의 뜻입니다. 국민의 준엄한 뜻을 헤아리고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헤쳐가는 것이야말로 안 지사님과 같은 정치인, 당신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일하기 어려우니 협치를 하자구요? 아직 국민들에게 낯선 ‘협치(協治 Governance)’란 단어는 ‘타협정치’를 줄인 말이기도 합니다. 애당초 협치는 정치의 기본입니다. ‘여대야소’라도 다수가 힘의 논리로만 나가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하나의 의견에 찬성과 반대가 있으면 조정과 양보로 타협을 응당 봐야겠지요. 하지만 타협도 원칙이 있고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차제에 안 지사의 문제적 발언과 행보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명박과 박근혜의 녹색경제, 창조경제를 이어가겠다고 했다지요. 재벌 개혁을 말하면서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불구속한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싸드)엔 반대하지만 한·미 정부 간 합의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안 지사의 발언을 긍정과 ‘이른바’ 보수매체와 보수인사들은 통합의 신선한 목소리라고 환영합니다. 그덕에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비율도 현재 14%라는데 더 올라가도 이상할게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안희정 지사의 정체성이 퇴색하는 것도 모자라 점점 진공화(眞空化) 되는게 아니냐 의구심이 듭니다.
안 지사가 고려하는 보수와의 협치에서 과연 그들이 진짜 보수인지 신중하게 고려하기 바랍니다. 전 그들을 진정한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수는 부패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수구가 아니라 깨끗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 보수입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이들 가짜 보수를 식별하는 훌륭한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하며 통합을 외치는건 좋습니다. 지도자는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요. 지금은 통합과 협치의 시기가 아니라 국정대농단 세력을 심판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엄혹한 시기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수많은 진실이 아직 미궁(迷宮)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을 밝혀내라고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박근혜는 국민 앞에서 특검에 협조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청와대에서 한발짝도 안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농단의 온상(溫床)이 된 청와대에 대한 압수 수색도 국가기밀이라며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최순실과 부역세력은 태극기를 희롱하는 가짜보수들에 고무됐는지 도리어 큰소리를 칩니다. 서민의 사소한 범법은 눈하나 깜짝않고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법원이 이재용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듯한 상황에서 안희정 지사가 이러면 안됩니다. 당신이 잇겠다는 이명박근혜의 녹색경제 창조경제가 4대강으로 국토를 훼손하고 최순실-정유라의 배를 불리기 위한 그야말로 창조적 전방위 농단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지난 6년간 여당 정부하에서 야당 도지사를 하느라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도정을 위해 중앙정부에 쓴소리를 하는 것도 가급적 인내하고 협치를 강조하는 고육책도 이해못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야당 시장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중앙정부의 비협조에 눈치보고 타협하기 보다는 때로는 단식투쟁을 하고 시민과 국민에게 호소하며 성공적인 시정을 편 것을 우리는 목도(目睹)했습니다.
이재명 시장이 성남시 환경에 맞춰 시행한 ‘청년배당’의 합리적 평가를 도외시하고 “국민은 공짜밥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포퓰리즘적 발언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안 지사 발언의 진의가 공짜보다는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이 시장의 정책을 ‘공짜 밥’ 한마디로 폄하(貶下)해서는 안되겠지요.
386운동권 출신인 안 지사가 자신에 대해 좌파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들을 고려해 의도적 우클릭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과거 젊은 시절, 생각하지 못했던 사고의 차이, 긍정적 의미의 확장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것이 변화 아닌 변질로 비치지 않는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27년전인 1990년 1월,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합당을 선언했을 때 노무현은 '밀실야합'이라고 강력 비난하고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였습니다. 그때 스물여섯살의 혈기왕성한 안희정은 당시 잔류한 18명의 당직자중 하나였습니다.
원칙주의자 노무현은 1995년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 “전근대적 정치행태”로 비난하며 합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다는 명분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지요. 그리고 마침내 정권교체를 이루었습니다.
YS의 3당합당을 저는 ‘트로이의 목마’로 예견했습니다. 정권교체를 위한 징검다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외형상 그것은 야합으로 비췄지만 여전히 쿠데타 세력이 건재하고 YS와 DJ가 분열된 상황에서 노태우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었듯 정상적인 정권교체는 기대난망이었습니다. 박정희정권 이래로 빨갱이로 매도된 김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이 야당 지도자로 대선에서 당선된다 해도 반세기 적폐(積弊)가 쌓인 군부를 통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YS는 여당의 옷을 입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부내 하나회를 해체하였고 금융실명제로 검은돈의 고리를 끊는 경제혁명을 이뤘습니다. 또한 5.18특별법을 제정,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사형판결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오히려 DJ가 훗날 집권후 정치보복으로 비칠까 우려해 ‘국민화합’을 앞세워 ‘역사 바로세우기’에 한계를 보인 것과 비교할 때 YS의 행보에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여 묻습니다.
안 지사님, YS의 철 지난 ‘트로이 목마’를 흉내내는 겁니까? 아니면 ‘문재인의 샌더스’ 효과를 노리는 겁니까?
만약 1990년의 안희정이 2017년의 안희정을 만난다면 뭐라고 얘기할까요. 제가 안 지사님에게 덕담으로 건넨 ‘한반도 지사’의 희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도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직 국민들만 바라보고 가십시오.
끝으로 정청래 전 의원이 5일 트위터에 남긴 글로 저의 심정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박근혜를 탄핵하기 위해 국민들은 촛불 들고 얼마나 몸서리치며 몸부림쳤나. 세월호 유가족들은 또 얼마나 절규했나, 지금은 오로지 정권교체를 통해 지긋지긋한 이명박근혜 부역세력을 척결하는 대청소를 할 때다. 촛불국민은 이명박근혜 부역 세력을 척결하라는데 그들과 연정하자는 건 민심과 동떨어진 주장, 철회해야 마땅하다.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한 방에 훅 간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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