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들이 모여 토론을 한다.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열띤 공방을 펼친다. 둥근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이 ‘원(圓)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사각형 모양의 우물 개구리는 ‘네모’라고, 삼각형 우물의 개구리는 ‘세모’라고 각각 맞서고 있다.
원형과 사각형 우물의 숫자가 비슷하게 많아 둘의 의견이 팽팽하다. 모두 자신의 우물 속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모습이 곧 세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우물 밖을 나간 적이 없으니 다른 모습의 세상을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모습을 틀렸다고 주장한다.
보기 드문 세모 우물 개구리는 세(勢)가 부족해 다른 두 그룹 개구리들의 눈치만 살핀다. 그러다 일부는 원형이란 주장에, 또 다른 개구리는 사각형이란 주장에 동조한다. 이들에게 ‘변절자’라고 비난하면서 끝까지 ‘세상은 세모’라고 고집하는 개구리도 있다.
같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서 다 그곳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올챙이 때 다른 곳에서 우르르 몰려 들어오기도 하고 개구리가 된 이후에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우물로 옮겨가기도 한다. 또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물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간 개구리도 있다.
다른 우물에서 왔거나 우물 밖 세상을 본 일부 개구리들은 처음엔 세상의 모습이 다양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우물에서만 있었던 다수에 의해 입을 다물게 됐다. 같은 주장 안 하려면 우물을 떠나라고까지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한 우물 안에서 다른 주장은 용인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나 주장이 있는 게 정상이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하나만으로는 완벽하지 않으니 다른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이의 생각이나 의견도 듣고 이해하고 때로는 자신을 보완하기도 하면서 사는 게 세상이다. 나와 다른 이와 함께 사는, 그게 바로 공존이다.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알게 되는 이 평범한 진리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게 되면서 무너지는 걸 심심찮게 보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건 모두 틀린 것이라는 진영의 벽이 점점 견고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린 사안에 있어선 ‘사실(fact)’도 둘로 나뉠 정도로 첨예하다. 내가 보는 뉴스가 맞는 것이고 너희들이 보는 뉴스는 틀렸다는 것이다.
우리 편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거나 침묵하고 상대의 잘못은 엄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이른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연일 입에 오르내린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을 상징하는 표현이 될 정도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4월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원인으로 ‘내로남불(naeronambul)’을 꼽았었다.
한국 사회 특히 정치에서 진영 싸움이나 진영논리에 따른 ‘내로남불’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 심해진 건 사실이다. 과거엔 아무리 같은 진영이라도 억지 주장이나 말 안 되는 논리에 대해선 제재나 내부 비판이 있었고 그게 제동장치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기 살기로 내 편은 무조건 옳다며 싸우고 있다.
불필요한 ‘내로남불’은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지난 3일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여권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 쪽에서 야권의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술꾼’이라고 비난한 일이 이 지사의 ‘음주운전 논란’으로 부메랑이 됐다. 이 지사의 과거 음주운전 전력을 감싼 캠프 대변인은 사퇴했고 음주운전이 재범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후보자가 지난 1일 사퇴한 것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2년 전 국회의원일 때 현 정부의 다주택 소유 공직자 후보자를 강하게 질타했었는데, 이번에 자신도 부동산 4채를 보유한 게 드러나 결국 스스로 후보에서 물러난 것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같은 체제에서 함께 하는 다른 진영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체제가 다르거나 말이 다른 국가나 정권과는 공존할 수 있다고 하는 아이러니다. 지금 정부와 여당, 그리고 지지자들은 야당이나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각을 세우면서 김정은과는 끊임없이 공존을 이야기한다. 또 보수진영 일각에선 현 정부를 비판할 때 미국을 동원한다.
가족 간의 다툼이 남보다 더 심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아프고 힘들 때 곁에 있는 사람은 가족이다. 일상에서 매일 다퉈도 가족이 남보다 낫다. 가족이나 함께 사는 이들과의 공존이 남이나 다른 체제와의 공존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김인구 / 세계한인언론인협회 편집위원장, 전 호주한국신문 편집인. gginko7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