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지탄(老馬之嘆)

 

오래 묵으면 누구나 구박덩어리가 되기 쉬운 삿된 세상이다. 10여 년 전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땐 뭐든 마음만 먹으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은갈치 몸매를 뽐내면 다들 나와 함께 거리를 달려보고 싶어 했어. 심지어 예쁜 아가씨들이 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얄궂은 자세로 사진을 찍겠다고 들이대기까지 했다구. 최고급 럭셔리는 아니라도 동급 최강이었지. 누가 나의 인생 동반자가 될까? 궁금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근데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더구먼. 어느 날 사랑의 열쇠를 들고 찾아온 사람은 평범한 중년남이었어. 30대 후반인데 20대처럼 팍팍하게 살아가는 그저 그런 수준. 나도 최상급들과 어울리긴 스펙이 딸리긴 했어. 아담한 크기에다 첨단기능도 별로 없고. 그래도 혹시 했는데 역시더군.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가 꽤 잘생긴 동안(童顔)의 소유자라는 거야. 색안경 끼고 운전석에 앉으면 가슴이 울렁이곤 했어. 하지만 성격이 엄청 까칠해서 속을 많이 끓였어. 그런 말 있잖아. 운전대 잡으면 성질 나온다고. 말이 걸쭉한 편은 아닌데 나이가 들면서 짜증이 심해지더라고. 자잘한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남자들이 50대가 되면 그렇게 변한다고 하더군. 양복 입고 넥타이 매면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식전에 헐렁한 츄리닝 입고 나서면 영락없는 동네 백수야.

그 남자와 특별한 추억은 없어. 장거리 여행이라고 해봐야 시드니에서 캔버라 한번 다녀온 게 고작이거든. 그때는 그가 한 120까지 밟는 바람에 발바닥이 온통 타버리는 줄 알았어. 평소엔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일상의 반복이야. 남자가 자기 소지품을 챙겨 사무실로 올라가면 난 온 종일 혼자 기다려. 어두컴컴한 지하에 꼼짝없이 엎드려 있는데 정말 심심해. 낮잠도 한두 번이지. 어쩌다 그 남자가 낮에 날 데리고 나갈 때가 있어. 그럴 때면 군대 외출처럼 기분이 좋아.

요사이 그 남자를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있어. 나름 열심히 사는데 아이 넷에다 아내까지 녹녹하지 않아 좀체 형편이 피지를 않네. 50줄에도 머슴처럼 일하고 있으니 측은하기까지 해. 하지만 내 신세 생각하면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지. 나도 그 남자의 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든. 걔들은 나를 아예 무시해.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기 일쑤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곤 해.

 

그런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해. 내 잘못이 아니거든. 그 남자가 몇 달 동안 목욕을 시켜 주지 않으니 냄새가 날 수밖에. 더군다나 몸에 난 상처도 도무지 치료할 생각이 없어. 보기에 흉해도 거동하는데 지장이 없으면 괜찮다는 거야. 광택이 사라진 은색만큼 초라한 건 없는데 내가 딱 그 꼴이야. 아예 흐릿한 회색이 됐다니까.

하지만 그 남자의 태평한 모습에서 이상하게 위안을 얻어. 아이들이 불평을 하건 말건 탈 없이 움직이기만 하면 100점이라는 거야. 게다가 일주일에 한번 먹여주는 밥은 어김없이 가장 비싼 걸로 챙겨주고 있어. 늙어서 만만하게 대한다 싶어 서럽다가도 이 인간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대상이 나라는 사실이 흐뭇하게 다가와. 한창 혈기 왕성할 때 만나 이제 반백의 나이가 된 걸 보면 묘한 동지의식도 느껴져.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만 가지 서운함을 다 잊기로 했어.

가족들은 형편 되는대로 빨리 바꾸라고 난리지만 어떻게든 나와 함께 늙어가겠다고 다짐하는 그 남자가 얼마나 갸륵한지 몰라. 나처럼 나날이 노쇠해지는 그를 태우고 발바닥이 닿아 없어지도록 달리다가 그의 손에 의해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노마의 마지막 소망이야.

 

정동철 사진 파일 .jpg

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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