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이 학년 때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 순간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카락 다 빠진다’라는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런데도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사람들은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앞만 쳐다봤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차갑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살아 있었다. 

 

오클랜드에 와서도 한동안 빗소리에 푹 빠져 지냈다. 어떤 때는 밤 늦게까지 앙철 지붕에 떨어지는 비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었다. 

 

산성비 때문이었을까. 머리 가운데 숱은 동그라미가 보일 정도로 많이 빠졌다. 줄어드는 머리숱과 함께 비에 대한 열정도 사라져갔다. 

 

지금은 비를 맞던 그 날을 떠올리면 ‘한여름이라 감기에 안 걸린게 다행이었지’하는 생각은 든다. 

 

오십이 넘어가면서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비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밤늦은 시간에 비가 오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바빠진다. 괜히 바닥을 쓸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가라앉은 먼지도 닦는다. 그런 날에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밥에 김치를 넣어 볶아 먹기도 한다. 

 

그러다가 ‘비 오는 날에는 왜 가만히 못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비로 단절되는 밤에는 더 많이 외롭다. 또한, 앞날을 걱정하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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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우 (Maslow)는 욕구단계설(Hierachy of Needs)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처럼 ‘나도 먹고 살만하니까 애정이나 소속의 욕구로 인한 결핍을 자주 느끼는 걸까.’ 

 

많은 내담자들이 자라오면서 경험했던 결핍으로 인한 아픔을 못견뎌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그 고통을 달래려고  술과 마약같은 물질중독이나 쇼핑이나 섹스같은 행위중독에 빠진다. 

 

사실 나도 그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위해감축(Harm Reduction)이란 측면에서는 나을 지 모르나 나도 라면이나 쌀국수 국물을 통해 축 처진 기분을 종종 바꾼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배웠다. 인간은 서로 어울려 살지 않으면 생활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말의 뜻을 잘 안다. 또한, 뇌 과학자나 신경 과학자들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러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고 있다. 

 

많은 사람과 부딪히며 살면서도 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비 오는 날에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롭다. 동네에서 축구를 할 때 ‘언제 나를 끼워줄까’하며 거의 마지막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 고등학교 때 교련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던 모습과 같은 여러가지 형상으로 비오는 밤에 찾아온다. 그런 날에는 화를 내는 대신에 수치심(Shame)과 죄의식(Guilt) 사이에서 번민한다.

 

‘네가 문제지’라는 비판적인 내면의 소리가 가슴을 막 찌른다. 미국의 비영리재단에서 운영하는 테드 톡스(TED Talks)라는 강연회가 있다. 테드 톡스에서는 기술(Technology), 오락(Entertainment), 디자인(Design) 등과 함께 과학이나 국제적인 문제까지 각 분야의 저명한 인사가 나와 이십 여분 안되게 강연한다. 

 

이 강연회에 출연해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사회복지사면서 교육가인 버네 브라운 (Brene Brown)이 있다. 그는 수치심을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 인정, 일체감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감정이라 정의한다. 또한, 그는 수치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얘기하듯이 자신을 대하면서 믿는 사람을 찾아 본인의 얘기를 공유하라 한다. 

 

그는 수치심은 말로 표현되면 그 영향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오랫동안 나의 수치스런운 모습과 상처받기 쉬운 모습을 숨기지않고 보이려 노력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대신에 많은 면에서 만족스럽거나 괜찮다고 위로했다. 그런데도 가슴 이 허전한 날에는 과거의 경험이 날 자유스럽게 놔주지 않고 아프게 한다. 

 

나에 대한 용서가 아직 안 되었나. 용서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에 중점을 두고 과거를 보내버리는 거’라고 많은 자기계발 책(SelfHelp Books)의 지은이들이 얘기한다. 

 

하지만 현실은 책의 내용과 다르고, 좋은 가르침은 적용하기 쉽지 않다. 이럴 때는 과거로부터 숨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가끔가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이 좀 더 관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하였으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라고 상상해 본다. ‘세상을 지금보다 더 관대하게 보거나 남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했겠지’라며 혼자서 결론을 낸다. 

 

비가 올때의 적막감을 피하기 위해 바쁘게 행동하는거나 다른 사람 탓을 하는게 자기방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기방어는 살아가는데 도움은 되나 인생의 질을 높이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 

 

자기방어에 치중하게 되면 남들을 못 믿고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 한다. 그럴 때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는데 주저한다. 아마도 그건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책임을 전가할 때 순간의 위로가 된다. 나이 들어서는 순간의 위로에 빠져 숨거나 피하는 모습이 조금 창피하다는 느낌도 든다. 수치심과 약점을 인정하고 자기방어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빗소리를 다시 즐기자고 다짐한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올거라는 생각이 머리 안에서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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