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평전을 세심하게 꼬치꼬치 따져가며 읽었다. 책 제목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출간 이후 7년간 새 책을 내지 않았던 그녀가 하나둘 사라져 가는 친구들에 관한 짧고 강렬하게 인상 받은 글에서 따왔다. 이 책은 그녀가 보여준 당당함에서 출발해 누구나 겪는 생활 이야기가 점철되어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또렷해지는 역사와 인물을 만난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 ‘안색이 창백하고 유령처럼 재판정에 나온’ 아이히만과 그 재판에 직접 참여한 한나 아렌트에 집중해야 한다.
흔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표현되는 상황은 영화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백만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사건을 직업상 책무였다고 말한 아이히만. 그에게 옳고 그름은 애초부터 없었다. 단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는 ‘악의 평범성’. 그와 함께 체포된 동료들도 자신들은 죄가 없다며 모두 아이히만에게 떠넘겼다. 이를 ‘뉘른베르크의 변명’이라고 부른다. 66차례나 이어진 재판에서 100명에 이르는 ‘멸절 수용소’ 생존자들 증언이 이어졌지만 아이히만에 관한 직접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법정에서는 유죄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죄’라고 말한 그녀 한마디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내용, ‘악(惡)이란 본질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 대중사회 부류’라며 아이히만은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표류하거나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기회를 잡은 당시 이스라엘 벤구리온 정권과 일부 뒤가 구린 인사들은 격렬히 반대 했다. 유대인 학살 잔혹성이라는 멋진 아젠다를 뿌리치기 어려웠다.
청년들에게는 애국심을 고취 시키는 기회로 독일 나치 일당에 협력했던 부역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빠져나가기 좋은 기회였다. 법정에서는 생존자 증언을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되지만 아이히만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녀가 특정 이념에 치우친 과격한 인종주의 혹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희생양으로 만들어 덮어씌운 셈이다. 심지어 동료들조차 그녀를 흠집 내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최종보고서에 담긴 내용에 대한 반응은 일부분으로 전체를 장악하려는 일당이 펼친 마수(魔手)였다. 그녀는 ‘사람들 내면에는 작은 아이히만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 저작물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 사랑과 이별, 만남과 분노…. 이런 단어들이 혼재되어 있으나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그녀가 받아들인 또는 살아온 삶에는 그리 살도록 만든 자양분이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고향 사람이었다. 어릴 적 이미 칸트 저작물은 다 읽었다. 프리츠 랑, 아도르노, 마르쿠제, 남편이었던 귄터 슈테른, 사촌 발터 벤야민 등 동시대 인물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충돌하고 불꽃을 튕기며 주의와 주장이 난무하던 시대, 난파선 난민처럼 살아왔다. 다행히 카를 야스퍼스, 발터 벤야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 20세기 한복판을 살아가며 재능과 용기로 어두운 시대에 빛을 던진 사람들도 함께하였다.
인생역전(人生逆轉), 인생유전(人生流轉), 어느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를 그리 말하고 싶다. 사상(思想)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평생을 그렇게 살도록 운명지어진 삶. 독일, 프랑스, 미국으로 흘러들어온 그 자체가 역사였고 시민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제공한 인물, 비통한 사랑을 했던 이야기는 짤막하게 해둔다.
하이데거를 사랑했던 한나 아렌트. 입학한 마르크부르크 대학에서 연인이자 스승인 하이데거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절망에 이른다. 서로 다른 철학과 나치라는 피할 수 없는 논쟁은 둘을 갈라서게 하였다. ‘부디 금요일에 오시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이라며 사랑을 고백하였던 하이데거도 친나치 행각이 드러나고 아이히만에 대한 견해차로 큰 혼란과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들 사랑은 부러운 시선이 아니라 부러진 삶이 되고 말았다.
‘자신과 합의하지 않는 것보다는 온 세상과 합의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말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한나 아렌트에게도 유용하고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