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집단학살 만행의 력사 현장을 찾아


   중국 해남성 삼아시 교외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1000여명을 학살한 후 집단 매장한 일제의 만행 현장-'조선촌 천인갱'(朝鲜村千人坑)이 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인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비참하했던 력사가 묻혀있는 이 '천인갱'에 수차 찾아가 술을 붓고 벌초도 하면서 수난자들을 추모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 대한 일제 침략자들의 만행을 밝히기 위하여 사료들을 수집하고 증인들을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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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력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는 말이 있다. 하여 세계 반파쇼전쟁및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지난 력사를 돌이켜 보고 아직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제의 '조선촌 천인갱' 학살 만행을 폭로한다.


  오늘 날 일본의 우경 정치세력들은 일제시대의 만행을 숨기려 하지만 그 만행의 증거로 '조선촌 천인갱'이 있고 또 수많은 '만인갱' 의 력사 현장이 남아있다. 일제가 감행한 만행은 숨길 수 없고 지워 버릴수도 없다.


  일본군 삼아에 침입


  1939년 2월 14일, 일본 침략군 '일항련합륙전대'는 제4기지 사령관 후도다(太田泰浩) 해군소장의 인솔하에 삼아 유림황으로부터 등륙하여 삼아를 점령하였다. 삼아를 수비하던 애현(崖县) 경비중대는 저항을 하다가 산으로 철퇴, 일본군은 이튿날에 애현 현성까지 점령하였다. 삼아를 점령한 일본 침략군은 삼아를 해남도 침략기지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여름, 일본군은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3년후인 , 1943년에 삼아군용비행장이 완공되였다. (지금의 삼아군용비행장 위치이다.)


  일본침략군은 또 해남도의 철광자원을 략탈하기 위해 1941년부터 전독(田独), 삼아, 석록을 잇는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여 1943년에 길이 210킬로미터 되는 철도공사가 준공되였다. 1942년에는 삼아만에 군항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천수(浅水)부두를 건설하였다.





  일본 침략군은 '해남 해군경비부'를 세우고 삼아에 대해 군사관제를 실시했으며 해남도 남부지구의 군사, 행정권을 장악하고 삼아 인민에 대하여 파쇼적인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촌 천인갱'


  '조선촌 천인갱'은 지금의 해남성 삼아시 길양구 삼라촌에 있다.(삼라촌은 처음엔 리즈거우진, 후에 전독진. 지금은 길양구에 속한다) 일본침략군은 해남도 자원 략탈을 강화하기 위해 해남도 각지에서 로동자를 강제 징용해 로역을 시키는 외에 조선반도로부터 감옥에 수감되여있는 정치범들을 강제로 끌고와 '조선보국대'란 명의로 삼아에서 철도, 비행장, 터널항만건설공사, 철광 채굴 등 고강도의 고역에 내몰았다. 조선로동자들은 발목에 족쇄를 찬채 10명 혹은 20명씩 한개조로 되여 일본군대의 총칼 아래서 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불복하면 물매를 맞기가 일수이고 지어는 맞아 생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매일 고된 로동이 끝나면 집중적으로 군영에(지금의 남정소학교 교사) 감금시켜 놓았으며 기아와 질병에 시달려 죽으면 모두 한곳에 매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한 후 일본침략군은 저들의 만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9월초에 1000여명의 조선로동자들을 리즈거우 남정산기슭에 끌고가 전부 학살한후 산기슭 황막한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집단 매장을 했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당지 사람들은 이곳을 '천인갱'이라 불렀다.


  력사 자료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이곳에 끌려와서 고역을 할 때 이 곳에는 리씨성을 가진 인가 10여호가 살고 있을뿐 마을 이름조차 없었다. 해방후 이 비참했던 력사를 기리기 위해 당지정부와 군중들은 이곳을 '조선촌'이라 이름을 지어 부르다가 1975년에 '삼라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촌민들은 습관상계속 '조선촌'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해남성 정협 문사자료위원회에서 출판한 '철발굽아래서 일어난 피바람과 혈우, 부제: 일군 해남성 침략죄행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1945년 8월, 삼아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제16 수비대는 일본 천황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한 소식을 듣고 무기와 군용물자를 중국정부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조선인 징용자 1000여명을 강박해 남정촌 부근의 산기슭에 굴을 파게 한 후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매장했으며 이 작업에 참가한 조선인들을 전부 살해한후 시체를 집단 매장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곳을 '천인갱' 이라 불렀다 이 '천인갱' 유적지에는 지금도 그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유해가 묻혀있다."


  삼아시 정협에서 1995년에 출판한 '일군 애현 침략죄행 실록'에도 똑같은 내용이 기재되여 있다.


  '삼아시 지'에는 "1944년 일본침략군은 조선으로부터 1000여명을 강제징용해 와 리즈거우 남정, 락필 일대에서 군사용 터널을 파게 했다. 터널공사가 끝난 후 1000여명을 전부 학살하여 남정산기슭 언덕에 매장했다. 남정 천인갱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고 기록되여 있다.


  삼아 전독철광의 '만인갱' 설명서에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전독철광 략탈기간 일본군은 선후로 2만 5000명의 로동자를 징용해 왔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인이 있는 밖에 또 중국의 대륙, 대만, 홍콩인 그리고 인도인도 있었다" 고 기록되여 있다.


  삼아 삼라촌의 주학근(周学勤) 로인은 "일본군은 약지 굵기의 쇠사슬로 조선로동자들의 두 손을 뒤로 결박하거나 허리를 묶어서는 나무에 매달고 매질하여 죽이거나 휘발유를 뿌린후 불에 태워 죽였다."고 증언했다.


  조선 보국대


  중국에는 도합 80여개의 '만인갱'이 유적지가 있으나 조선인의 '천인갱'은 삼아 한곳 밖에 없다. '만인갱'과 달리 '천인갱'은 기편성, 강박성, 략탈성 등 특점을 갖고있다. 삼아의 '조선 보국대' 에 징용된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들이다. 당시 일제는 "해남도에 가면 형량을 감해준다 ", "높은 월급을 준다" 면서 그들을 속여서 끌고왔다.


  삼아 '조선 보국대' 생존자의 한 사람인 한국 인천 연수구 동춘동 로인 료양시설 '련락원'에 거주하고 있던 여차봉( 94세, 2008년 작고)씨는 증언에서 " 1944년 6월 광주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중 일제에 강제 징용됐다. 당시 11명 수감자들이 차출됐었는데 모두 가지 않겠다고 하자 교도소측에서 해남도로 가면 매달 30원 (당시 일본 순사의 한달 월급에 해당됨)씩 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누구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강제로 해남도로 끌려갔다." 고 말했으며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규슈와 중국 대만을 거쳐 해남도에 도착했는데 20일 정도 걸렸으며 조선인 징용자들은 짐짝처럼 배의 맨 아래칸에 갇혀서 끌려갔다" 고 말했다. 삼아에 끌려온 여차봉씨는 일본군 비행장건설공사장에 나가 일했다. 여차봉씨는 그 때를 회억하면서 " 매일 오전 다섯 시 반에 기상해 오후 9시까지 일했다. 무더운 열대지방에서 8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으며 음식과 위생조건이 열악해 말라리야에 걸리는 동료가 많았다", " 병에 걸렸거나 몸을 다쳐서 더는 일할 수 없게 되면 외진 산으로 끌고가서 집단 생매장했다 " 고 증언했다. 그는 "1945년 8월에는 같은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로동자 200여명중 30명 정도만 살아 남아 해남도는 지옥 그 자체였다"고 회상했다. 고강도 로역이였지만 돈을 한푼도 받지 못하고 략탈당하는 그야말로 죽음의 현장이였다.


  이 비인간 적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고복남 (2012년, 96세에 작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평양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느 하루, 친구 3명과 함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일본 순경과 시비가 붙었는데 "폭행상해 치사죄"로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여 있던중 1943년에 해남도에 끌러갔는데 그 때 나이가 22살이였다.


  고복남씨는 "일본인 간수가 찾아와 해남도에 가 일하면 형량을 줄여 준다고 했다. 그 때 형무소에 갇혀있던 약 50여명이 차출되였다." "해남도에 끌려 간 후 도착한 곳은 비행장 건설현장이였다. 우리는 5명씩 한조가 되여 비행기 방공호를 파는 공사를 했다. 조금도 잘못하면 곡갱이 자루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매 맞아 죽고 병들어 죽는 로동자가 늘어났다. 그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일단 붙잡히면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고 증언했다.


  고복남씨는 해방된 후 두달만에 위안부, 광복군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국인 '기념비'를 세워


  1998년 6월, 당시 이곳에 끌려와 로역에 시달리다 도주한 4명중의 한 사람인 (현재 미국에 살고 있음) 장달웅씨가 한국 KBS 방송국 기자와 함께 삼아 '천인갱'을 찾아와 '조선인 천인갱' 취재했다. 그해 8월 해남성에 와 농업개발에 종사하던 한국 신우주식회사 서재홍사장이 한국에서 우연히 KBS에서 방송하는 "해남도에 묻여있는 조선혼"이란 다큐멘터리를 보고 민족의 수난사를 알게 되였다. 해남도에 돌아온 후 서재홍씨는 일부러 삼아에 가 '조선촌 천인갱' 현장을 확인했다.


  1999년 9월 1일, 서재홍씨는 삼아시 정부의 허가를 받고 '천인갱 유적지'에 중한 두 가지 문자로 된 '일제시기 박해 받아 숨진 조선동포 추모비' 를 세웠다.


  비문에는 "1942년 일본침략군의 박해를 받아 숨진 조선 동포 1000여명이 이곳에 매장되여 있다. 우리동포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고 마을 이름을 '조선촌'이라 개명하고 현재까지 관리하고 보존해 준 당지 중국인민정부에 대한민국 국민과 유족들은 깊은 감사를 드린다.한국신우회사가 이 유적지를 개발하여 보존할 수 있도록 허락한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중한 량국 인민들의 우의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신우농업종합개발유한공사 1999년 9월 1일" 이라 적혀있다.


  그후 서재홍씨는 '천인갱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삼라촌민위원회와 '천인갱' 주변의 황막한 언덕 150무를 30년 도급 계약를 체결하고 보호성 개발하기로 했다.


  2000년 1월, 서재홍씨는 한국에서 유해 발굴 전문가와 기자 8명을 모시고 삼아에 와 '천인갱'에 묻혀 있는 부분적 유해를 발굴, 고증하게 했다. 두달 남짓한 발굴을 거쳐 조선인 유해 109구를 발굴해 냈는데 일부 유해들 손목에는 쇠로 만든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두개골에는 굵은 쇠못이 밖혀 있었다.


  서재홍씨는 그중 104개 유골을 화장하여 골회를 단지에 넣어 골회 보관실(迎乐斋) 진렬해 놓았고 비교적 잘 보존되여 있는 유해 5구는 그대로 유리관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주인 없는 유적지


  삼아의 '조선촌 천인갱'은 일제 의 조선침략 및 중국 해남도를 침략한 죄행의 증거이다. 집단 학살당한 1000여명 조선인의 넋은 피눈물로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중국이나 한국 정부차원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삼아의 '조선촌 천인갱' 그리고 그 기념비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 기념비 주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쓰레기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 민족의 비참한 력사가 이와같이 외면을 당한채 설음을 받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필자가 기념비건립 당시 서재홍씨와 계약을 체결한 삼락촌민위원회 원 주임 리창덕씨를 찾아 보았다. "한국인 서재홍씨는 우리측과 30년 도급 및 개발계약을 맺고 매년 인민페 5000원씩 주기로 했다. 그러나 3년동안만 계약대로 돈을 바치고 기념비를 세워놓고 개발은 시작하지 않았다. 그 후로 10여년이 지났는데 전혀 련락이 없다. 중국 토지관리법에는 도급 계약을 체결한 후 2년내에 개발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토지를 회수 하게돼 있다. 기념비는 촌민들의 공동묘지에 세워져 있는데 적지않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촌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재홍씨를 찾을 수도, 련락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리창덕씨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했다. /서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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