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5월 CBMC(한국기독실업인회) 파리대회를 맞아, <파리 CBMC 특별전>이 갤러리 퐁데자르(Galerie Pont des Arts)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전시에는 권순철, 정하민, 진유영, 손석, 임동락, 이배, 남민주 작가가 초대되었다. 갤러리 퐁데자르가 올해 서울에도 개관했다. 작년 전시의 풍성함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파리 CBMC’에 속하는 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를 한다. 이번 전시에는 권순철, 정하민, 진유영, 신성희, 손석, 남민주 작가가  초대되었다. 

 

6인 초대작가들의 작품을 바라보며, 공통된 주제로 담을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찾았다. 

“내가 곧 길(οδος)이요 진리(αληθεια)요 생명(ζωη)이니…” (요한 14:6a). 

 

이처럼 성서의 구절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삼은 이유는,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활동해 온 여섯 명의 작가들의 작업은, ‘여기서 지금’ (hic et nunc)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예술은 우리에게 하나의 ‘길’로써 혹은 하나의 ‘진리’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이끄는 제시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빠르고 가벼워지는 이 시대에, 이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여 깊은 사색과 명상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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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CBMC 특별전, "길과 진리” 

 

2015년 11월7일 ~ 12월7일

오픈시간: 11시~19시

갤러리 퐁데자르 서울

서울종로구 삼청로 7길 27

전화 : 02-733-0536

모바일 : 010-9386-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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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데자르 갤러리 서울에서 CBMC작가들과 함께

 

권순철, 진리의 감성 : ‘열정’과 ‘수난’(passion)

 

권순철 작가는 <얼굴> 연작을 꾸준히 작업하면서, 또한 그의 신앙고백과 같은 <십자가>, <성령>, 등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얼굴> 연작을 볼 때마다, 형언하기 어려운 패러독스가 느껴진다. 오랜 세월 동안 고난과 슬픔을 겪은 듯한 <얼굴>인데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천사와 같이 정결한 모습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에서 영원성의 모습이 다가온다. 새로 지은 날렵한 건물에서보다 폐허가 된 옛 성터에서 영원의 감각을 더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화폭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 얼굴의 주인공이 걸어온 인생의 ‘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걷고 있노라면, 이 얼굴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대지 같기도, 흔들리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아버지의 등이나 든든한 반석 같기도, 힘들 때마다 생각만으로도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기도, 그리고 고국의 산천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과 고통을 겪어낸 인고의 <얼굴>에는 우주의 섭리가 담겨 있는 듯 하다. 이처럼 첫 눈에는 분명히 <얼굴>이었는데, 그 안에 우리에게 친숙한 대지, 자연, 우주의 섭리가 드러난다.  

너무 오랫동안 그의 <얼굴> 그림을 보아온 탓일까? <십자가>나 <성령>과 같은 작품에는 얼굴의 모습이 없는데도, 고통과 연민이 가득한 예수 혹은 남북의 분단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듯한 성령의 강렬한 움직임이 담긴 “타자의 얼굴”(엠마누엘 레비나스)이 오버랩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성령>, <십자가>, 등은 첫 눈에 보면 추상화 같다. 하지만,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신앙의 실체가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실체적으로 다가온다. 

화폭들 위를 가로지르는 ‘철조망’들이 눈에 띤다. 작품 제목 [<십자가>, <성령>, 등]의 영향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쓴 가시관이 먼저 떠오른다. 다음으로, 10월 26일 종료된20차 남북이산가족상봉으로 인한 애잔함 때문일까? 전세계 유일한 분단국인 한국의 남북을 아프게 가르고 있는 철조망이 연상된다. 이 철조망의 가시가 심장에 박혀있는 듯, 사랑과 연민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성령과 예수의 ‘passion’(두 개의 다른 감성인 ‘열정, 격렬한 사랑’과 ‘고통, 수난’을 동시에 의미)이 전달된다.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저절로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게 된다.

 

 

정하민, 진리의 방법 : 동심 속의 시간적 양의성

 

권순철 작가의 작품에서 휘몰아치는 열정적이고 고통스런 감성에 압도되었다가, 정하민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면 차분하고 넉넉한 마음이 들며,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깨닫게 된다. 이처럼 권순철 작가가 양극단적인 감성[열정과 수난]을 회오리처럼 몰아 한 화폭에 재현했다면, 진유영은 시각예술에 비시각적인 것을 도입하고, 신성희는 ‘안’과 ‘밖’을 비연속적인 연속성 기법으로 묶는다. 반면, 손석은 아날로그의 극대화에서 디지털로의 질적 변화를 보여주고, NAM은 수평적 초월의 날개에서 수직적 초월의 날개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이들 작가들은 ‘부정적인 양극적 조건’을 ‘긍정적인 양의적 상황’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양의적인 상황 내에서 자유로운 사고가 전개되고, 폭넓은 감동의 울림이 퍼질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하민은 추억과 현재, 동심과 성숙이라는, 시간적 양의성을 화폭에 재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작품 <서로가 서로에게>, <천년의 미소>, <고향의 정>, <모두를 향하여>, 등은 빨강과 파랑, 혹은 노랑과 검정, 등 거의 보색 대비거나 노랑, 빨강, 파랑과 같은 원색 대비가 폭넓게 사용되었는데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반되어 분리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생각 없이 들뜨게 하는 경망스러움이 아니라, 차분한 경쾌함을 선사한다. 어린 동심의 세계로 관람객들을 조용하고 천천히 이끌어 간다. 동심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서양의 요란하고 화려하며 기적으로 가득한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와 같은 그러한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장미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어린왕자의 마음이나, 엄마와 누나와 함께 강변 사는 것이 행복한 어린 소년의 바람이 담긴 그러한 소소한 삶에서의 동심이다. 정하민 작가의 그림 속에는 꽃, 나무, 새, 바람, 구름 한 점까지 모두 소중하고 생명이 있다. “들에 피어있는 백합”을 입히시고, “하늘에 나는 새”와 “들풀”까지 보살피고 거두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은은하게 배어 나온다. 

이러한 느낌을 주기 위해, 작가는 다양한 크기의 페인팅 나이프를 사용해 작업을 한다. 또한 동그라미나 점을 찍을 때는 면봉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붓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강하면서도 찰나적인 예민한 터치나,  또한 부드럽고 규칙적인, 그러나 어느 것도 같지 않은 수많은 원들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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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영,  시각 예술 속의 비시각적 진실

 

진유영 작가는 ‘빛’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빛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창문과 벽은 그리지만,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은 그리지 않는다. 우리의 눈으로 거기에 그려진 시각적인 빛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빛이 배어 나온다. 형태가 없는 것은 없는 데로 재현한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다. 작가는 형태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나 명백히 느껴지는 빛을 형태가 보이는 것[창문, 벽, 등]을 그림으로써 드러낸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중세에 신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신학’과 같은 방법론이기도 하다. 감히 신을 규정할 수 없으므로, 신의 속성이 아닌 것을 하나씩 하나씩 말함으로써 신에게 겸손히 다가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신은 선이다’라고 하면, ‘신=선’으로 규정짓는 것이 됨으로, ‘신은 악이 아니다’와 같이 말함으로써 신을 비-규정 하려는 의도다. 요즘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정의되고 단정되는 시대에 다시 요청되는 겸허한 방법론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이상적 방법론 외에도 실천적이며 테크닉적인 또 다른 방법론인 ‘화소분실 주조법’ (lost-DPI casting)을 개척했다[‘화소분실 주조법’에 대해서는 “근원적 감각”(퐁데자르 개관전 도록, 2015)이나“진유영 전”(신세계 도록, 2014) 참조].  

이처럼 진유영은 가시적이지 않는 것은 가시적이 아닌 상태 그대로, 형태가 부재하는 것은 부재하는 그대로 둔다. 물론, 신처럼 빛의 형태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진유영이 ‘드러내고 싶은 것’[‘탈은폐’, 알레테이아, 진리]은 바로  이 ‘비가시적인 빛이나 신’[‘은폐’, 레테]이다(아래, 신성희에서 ‘알레테이아’ 참조).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시각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시각 미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원근법이 발견된 뒤, 회화는 조각화 혹은 공간화 하려는 삼차원적 시도가 꾸준히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유영은 이러한 원근법에 개의치 않고, 회화의 고유한 2차원적 영역을 탐구한다. 대신 그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땅에 있는 별>과 같이 다폭(polyptyque)의 형태로 작품을 한다. 비록 이 다폭 회화들이 아틀리에에서 그려지나, 이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독특한 안료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이 다폭 안료를 가지고 전시장의 벽을 캔버스 삼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설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회화’는 공간과 어우러진 ‘설치in situ’ 작품이 된다. 

 

신성희, 진리의 심장 속에 놓인 ‘에포케’

 

새로운 ‘누아주’(nouage엮음) 분야를 개척한 신성희 작가는 이번에 ‘누아주’ 이전의 작업인 <연속성의 마무리>(Solution de continuité,  1995)를 보여준다. 사실 신성희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화업 초기부터 ‘누아주’의 씨앗이 그의 작업 속에 뿌려져 있고, 여러 번의 단계를 거치며 성장하고 있는 ‘누아주’를 보게 된다. 신성희가 <연속성의 마무리>에서 말하는 ‘연속성’(continuité)은 사상사나 미술사적으로 20세기 이상을 지배해 왔던 ‘자기동일화(Mêmeté)적 역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연속성의 ‘해결’(solution)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단순한 2원론적 구조 속에서 대답되는 ‘비연속성’(discontinuité)은 물론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의 그림은 캔버스의 앞면 만을 보여주는 것(자기 동일화적 ‘연속성continuité’)이었다면, 신성희는 과감하게 캔버스의 뒷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몇몇 현대 작가들의 시도처럼 캔버스의 뒷면만 혹은  캔버스의 틀만 보여주는 것(타자적 ‘비연속성discontinuité’)이 아니다. 이는 동일자/타자, 로고스/카오스, 이성/감성, 앞면/뒷면, 등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또 다른 이원론적 도식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희는 캔버스의 앞면과 뒷면을 정확한 비례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을 바로 자기동일화적인 역사나 연속성의 역사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이는 또한 ‘진리’[αληθεια<α(부정, 탈) + ληθε(망각, 은폐)]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하이데거 이전까지 사상가들은 진리란 감춰진 것(ληθε)을 드러내는 것(α)으로만 여겼다[그러나, 드러나면서 감춰지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진리에 이러한 성격도 있지만, 하이데거는 ‘아-레테-이아’ (α-ληθε-ια진리)의 심장에는 ‘레테’(ληθε)가 있다고 했다. 인간이 ‘진리’, 즉 탈은폐되고 밝혀졌다고 믿는 것[고전적 ‘진리’]에는 이미 그 안에, 인간의 언어로서는 인간의 사고 구조로는 밝힐 수 없는  ‘레테’(ληθε, 여기서는 ‘은폐’ 혹은 감춰진 것)이 있다는 ‘에포케’(판단중지, 유보)가 있다. 신성희의 <연속성의 마무리> 혹은 연속성의 ‘해결’은 이러한 의미에서 정확하게 ‘보이는 것’(앞면, 탈은폐)과 ‘감춰진 것’(뒷면, 은폐)의 ‘비연속적이면서 연속적’인 ‘연속적이면서 비연속적’인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리듬과 공간이 섞여 들어가면서 마침내, 신성희의 독특한 ‘누아주’ 기법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손석, 진리를 향한 태도: “기다림”

 

아주 복잡하고 많은 손이 가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손석 작가의 작업과정은 캔버스를 짜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의 캔버스는 일반 캔버스와 달리 평면이 아니라, 약간 둥글게 굴곡이 있다. 그 위에 주형 (鑄型 moule)을 뜬 것을 붙이고 아크릴 칼라로 그림을 그리며 마치 작은 점 크기의 물감 블록을 쌓듯이 그렇게 형체를 쌓아 올린다. 물감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또 물감을 바르며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물감 층을 형성하면서 볼륨을 준다. 그는 이렇게 붓으로 조각을 한다. 

그 결과 그의 그림을 보면, 마치 수십 개의 그림을 품고 있는 듯 모든 방향에서 다 달리 보인다. 특히 옆에서 볼 때는 공상과학영화에서 모눈종이 같은 벽에서 갑자기 사물이나 사람이 확 튀어나오는 듯한 그러한 느낌마저 든다. 작가의 표현대로 “지독한 아날로그가 디지털의 컨셉으로 도달되었다.” 

1999년 이후, 손석 작가의 모든 작품제목은 <기다림>(L’attente)이다.  현재 만연해 있는 사무엘 베게트 식의 ‘부조리한 기다림’이 아니라,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기다림 (마태복음 25:1-14)이다. 그래서 이 기다림은 희망이 있고 가슴 두근거림이 있으며, 때로는 조바심이나 두려움도 든다.  ‘기다림’은 또한 구약과 신약을 총괄할 수 있는 말이다. 구약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옛 약속이라면, 신약은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는 새로운 약속이다. 

손석 작가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기다림>의 자세는 적극적인 에포케, 즉 판단을 보류하는 자세다.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처럼, 감춘 것이 드러나기까지 판단하지 않고, 그리고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처럼 적극적인 에포케적인 자세로 판단을 중지하고, 그러나 두근거림과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cf. 위르겐 몰트만)  

 

NAM, 진실을 향한 날개 짓

 

NAM 작가는 오랫동안 날개를 주제로 작품을 해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는 한 쌍의 날개가 아니라 하나의 날개만 등장한다. 그리고 그 날개의 의미도 시기마다 달리 전개된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날개 없이 태어난 새”(하늘에다 날개를 두고 잠시 “소풍” 온 영혼처럼, cf. 천상병 시인의 “귀천”)와 같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날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재력으로, 또 다른 이는 권력으로, 혹은 명예로 날개를 만들려고 한다. 이러한 재질로 만들어진 날개는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하늘[여기서는 ‘진리’] 가까이 가면 녹아 버린다. 사람들의 ‘망각’에 가슴아파하며, NAM의 날개의 모습은 그래서 때로는 흐르는 눈물 같은 형태가 된다. NAM의 작업 가운데는, 주루룩 흐르는 눈물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있다. 여러 사람 혹은 천사들의 눈물이 흐를 때, 하나 하나 바로 응고되어 쌓여있는 듯 그렇게 길다란 눈물들이 섞이지 않고 모여있다. 이러한 눈물들이 겹쳐서 형상화된 것이 NAM의 <날개>의 원형적인 모습 같다.

NAM은 그의 “작가노트”에서 보면, “처음 날개를 만들었을 때,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날개 짓”이라고 적혀 있다. 문학가 이상이 희망과 야심이 거세된 자의식에서 외부로 나가기를 바라며, 날개가 돋아나기를 바라는 심정이 오버랩 된다 :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이상, “날개”).

때때로  NAM의 날개는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어하는 손가락 같기도 혹은 손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마치 천상병 시인이 날개를 달라고 하나님께 두 손 모아 비는 모습 같기도 하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천상병, “날개”)

이 단계를 지나, 현재의 날개에 대해서 NAM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그러나 모든 삶을 새롭게 만든 후의… 난, 자유 안에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한 날개 짓을 한다”(작가노트). 바로 자아와 자기동일자의 방에서 벗어나, 외부와 타자의 세계로 나아가고[수평적 초월], 이제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향한[수직적 초월] 날갯짓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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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은록 (미술 비평가, 감신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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