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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성실로 걸어온 고독한 길

- 박현 선생을 추억하며 -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 제각기 자기만의 길을 간다. 그 길이 험난하든 평탄하든, 높은 낮든, 혹은 밝든 어둡든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걸어주지 못한다. 감히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남의 운명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있으랴! 그래서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길이 있고 각각의 길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연과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화사한 봄날에 피어난 크고 작은 꽃들이 온 세상을 갖가지 색깔로 가득히 물들이듯이…

피어난 꽃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양과 색깔이 화려하여 멀리서도 환히 잘 보인다. 하지만 드문드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다소곳이 피었다가 이내 져버리는 꽃들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잠깐 무대에 올라와 주연배우를 돋보이게 해주고는 곧바로 퇴장해버리는 조연배우를 보는 것처럼 쓸쓸하다. 그러나 조연은 조연 나름대로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는 만큼 그를 주연배우와 결코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오히려 조연이 주연보다 훨씬 더 고귀한 가치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연배우가 자기가 절실히 받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주연배우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이기심 없는 사랑과 헌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더 깊은 눈으로 들여다보면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서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같이 협력하고 같이 고민하고 함께 울고 웃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작가, 기자이자 방송인이었던 박현 선생이 바로 이와 같은 조연배우의 삶을 사신 분이다. 그분은 평생을 화려한 인생무대의 뒤편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으며 그 길을 늘 겸손과 성실로 채웠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역할이 그리 돋보이지 않아 생전에는 당신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고, 비록 지인들 사이에서는 늘 생생히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는 세인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은 사라질지라도 그가 남긴 자취는 변함없이 남아 세인들에게 궁금증을 안겨주는 법이다. 이제라도 그분의 행적을 밝은 빛 아래 드러내 정당하게 평가해드려야 한다. 너무 늦지 않도록!

본명이 박영준인 박현 선생은 1936년 평양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느 아이들처럼 꿈을 키우며 유년기를 보냈고 누구보다도 착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소년 박현은 유독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일반학교를 졸업한 뒤 꿈을 찾아 자연스럽게 평양문과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으로서 문학의 이론과 실재를 배우며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고 1963년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청년 박현의 가슴은 작가가 될 사명으로 불타올랐다.

헌데 운명의 여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무슨 변덕을 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여신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순간, 기존의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되거나 사정없이 내팽개쳐지며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학교 졸업 이듬해 박현에게도 일생일대의 감당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졸지에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으로 강제추방 되었던 것이다. 박현은 꼭두벼랑으로 내몰렸고 작가로서의 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당장 육체적 생존도 언제 끝장날지 모를 판이었다. 청년 박현은 두만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하여 그곳으로 추방되어 들어온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 중 한 젊은이와 의기투합하여 1차 도강을 시도했다. 그러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박현은 다시 강물의 흐름과 강의 폭과 깊이, 날씨 등을 세심히 살피고 비가 내리던 1965년 캄캄한 어느 늦은 봄날 감시를 따돌리고 2차 도강을 시도해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소련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았다. 이듬해에는 사할린으로 파견 받아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두 번째로 운명의 여신을 만났다. 이번에는 여신이 웃음을 지었고 그에게 커다란 복을 안겨주었다. 사할린에서 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직장에서 일하던 우경란의 삼촌 되는 분이 그의 성실성과 사람 됨됨이에 반하여 조카와 짝을 맺어준 것이다. 그렇게 우경란(나중에 남편 성을 따라 박경란이 됨)과 백년가약을 맺은 박현은 남들이 두고두고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되어 아내를 평생 살뜰히 사랑하며 살았다. 박현과 박경란의 금슬이 얼마나 살갑고 애틋했는지는 지금도 지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몇 해 후 박현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흑해연안 크라스노다르로 이주했다. 그곳은 기후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 박현부부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세상시름 다 잊고 좋은 이웃들과 어울리며 일생을 편안히 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런 바람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평생을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헌데 그런 삶이 과연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년전부터 소련 고려인 한글신문 <레닌기치>사에 들어가 일하던 사할린 출신 지인들에게서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이 계속 오곤 했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을 떠나기 싫어 많이 망설였지만 꿈을 펼치고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제안에 박현은 결국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는 1974년에 카자흐스탄 서부도시 크즐오르다에 있는 레닌기치 신문사 문예부 기자로 입사하였다. 크즐오르다는 크라스노다르에 비해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기후가 몸에 맞지 않아 적응하는데 한동안 애를 먹었지만 그는 신문사에 들어감으로써 바라고 바라던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4년 후 신문사가 수도 알마아따로 이전한 덕분에 그는 좀 더 마음에 드는 환경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박현의 창작활동은 그러나 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신문사에 투고된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연구하며 소비에트 고려인 문학의 흐름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 그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박현은 오랫동안 레닌기치 문예페이지 란에 실린 글들을 교정, 교열, 편집하는 일을 도맡았다. 그건 평양에서 전문문학교육을 받아 뛰어한 모국어 실력을 갖춘 인재를 알아본 선배기자들이 계속 그곳에서 일하도록 그를 붙들어둔 탓도 있다. 그래서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1970년대 후반부부터 1980년대 중반부까지 <레닌기치> 문예페이지 란에 실린 작품들의 상당수는 박현의 꼼꼼한 교정에 힘입어 세련된 문학적 표현이 살아난 글로 탈바꿈되었던 것이다. 긴 시간에 걸친 그의 세심하고도 숙련된 손길이 없었더라면 그 시기에 문예페이지 란에 실린 작품들 중 적지 않은 것들은 수준 이하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박현의 손길을 거쳐 레닌기치 문예페이지의 주연배우 중 하나로 떠오른 고려인작가가 있는가 하면 모국어 표현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작가도 있었다. 박현은 다수의 러시아어 작품이나 노래가사도 번역하여 실었다.

이렇듯 박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유의 성실함과 겸손으로 양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인정도 요구하지 않았다. 조국에 있었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목숨을 소련에서 건져 제2의 인생을 사는 만큼 소련 땅에서 사는 삶을 덤으로 생각하고 늘 감사하며 살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친척이나 피붙이 하나 없는 땅에서 걸어간 길은 늘 고독했지만 그는 그걸 변함없는 성실과 겸손으로 채워 빛나는 길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점차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창작활동을 개시했다. 대학에서 시문학을 공부했던 만큼 그는 꾸준히 시를 써서 신문에 투고함으로써 작가의 탄생을 조용히 알렸다. 그는 넘치는 열정으로 다작을 하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중단 없이, 굴곡 없이, 소박하게, 꾸준히 시를 써나가는 작가였다. 그렇게 쓴 시들이 하나둘 모이고 모여 어느덧 고려인 공동 시작품집 『해바라기』(알마아따, 사수싀, 1982)와 『꽃피는 땅』(알마아따, 사수싀, 1988)에 다수가 선정되어 실렸다. 또 한국인 최초로 김연수 교수가 펴낸 고려인 공동시집 『치르치크의 아리랑』(서울, 인문당, 1988)에도 십여 편이 수록되어 실렸다. 말년에는 평생 소원이던 개인시집을 고국에서 간행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1997년 여름 한국에서 『꼴호즈의 들길에서』(의성출판사)란 박현 개인시집이 나온 것이다. 박현은 다른 욕심은 없었으나 평소 본인이 쓴 시집 한 권을 손에 쥐고 묘지에 누울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노라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안 한국의 지인 몇 분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그는 결국 소원을 이루었다.

박현은 1984년 카자흐스탄공화국 국영방송사 고려말 라디오 방송국 해설위원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려인들에게 우리말 방송을 내보내는 일을 하였다. 그는 틈만 나면 구소련 고려인 작가나 운동선수나 사회일꾼들을 찾아다니며 방송취재를 했고, 한국인이 소련에 들어오기 시작한 1989년부터는 여러 한국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받아 카자흐스탄 전역에 퍼져 사는 고려인들에게 육성으로 널리 소개했다. 그는 진정 소련 ‘기자의 노래’에 나오는 바대로 “우리는 한 줄의 진실을 찾아 사흘을 걷고 사흘 밤을 새웠다.”라는 경구를 몸으로 실천한 기자였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운명의 여신이 그 앞에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이후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여신은 어떤 깨우침을 주려고 그랬을까? 두 번째와 달리 이번에는 그 얼굴에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박현은 1991년 늦가을 한 학술기관에 초대받아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갔다가 불시에 병을 얻고 말았다.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양쪽 신장의 기능이 거의 멈춰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신체조직과 맞는 신장을 기증받아 이식받기 전까지는 정기적인 혈액투석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한국 지인들의 도움으로 몇 달간 치료를 받다가 나중에 알마아따로 돌아와 오랜 투병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1994년에 하늘의 도움으로 신장이식수술을 받았고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가 수술을 받은 후 4년 반의 시간만을 지상에 더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이 비밀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만이 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방송 일과 나중에 다시 시작한 신문사 일에 땀방울을 흘렸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후에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방송국 고려말 라디오 해설위원으로서 방송을 내보내는 일과 고려일보 문예부 기자로서 고려인들의 문예작품을 심사, 선정, 편집하는 일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이는 그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60주년을 맞이한 1997년! 박현은 기자로서 그 해를 뜻 깊게 마무리하고 마감 달에 심한 감기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1월 7일 운명의 여신이 그의 수고로운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거두어들인 것이다. 더없이 성실한 인생무대의 조연배우 박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들에게 가득 남겨주신 채.(김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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