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와 헤어지지 않는다

 

술 마시고 새벽이 되도록 쉴 새 없이 토해낸 말은 다 어디로 갔나?

 

20대는 말의 시간이었다. 토요일마다 연합 서클 모임에 갔다. 사회과학 책을 읽고 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2시간 동안 세미나를 했다. 그리고는 음주 가무 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명동성당 맞은 편 골목에 있는 ‘동해’라는 허름한 중국집이 아지트였다. 짜장면, 짬뽕, 군만두, 소주로 3시간을 버텼다. 식탁마다 온갖 말이 넘쳤다. 군부독재 타도와 혁명으로 울분을 토하는가 하면 실없는 농담과 연애담이 난무했다. 얼큰하게 취한 어린 것들의 혀에서 설익은 철학, 미학, 문학이 튀어나왔다. 젊음과 치기와 술기운이 어우러져 시시껄렁한 말을 매혹스러운 이야기로 둔갑시켰다. 맥주집에서 2차를 하고 밤이 늦으면 감자탕집을 찾았다. 말은 끊어지지 않고 어둠을 따라 재잘거렸다. 모두가 울고 웃고 화나고 즐거워한 그 시간을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련한 분위기와 흐릿한 장면들이 고작이다. 밤하늘에 한번 반짝하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유성처럼 잊혀진 시간이다. 그때 그 시절의 사람과 말과 사건을 기록해 두었다면 눈부신 나의 젊은 날을 망각의 강 아래 묻어 두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28년 전 대학을 마치고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시드니에 정착했다. 부모형제, 친구, 선후배가 없는 땅이었다. 10년 넘게 알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공간이었다. 안 지 겨우 1년 된 철없는 아내와 아옹다옹 날마다 싸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뾰족한 가시였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밖은 바삭바삭 말랐다. 이러다가 별안간 쪼개질까 겁이 났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해외체험기’ 필진에 호주가 없는 걸 발견했다. 내가 써보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신문사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연재를 시작했다. 시드니에 살면서 겪은 자잘한 사건과 생각과 느낌을 글로 썼다. 내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단어와 단어 사이에 똬리를 틀었다.

 

아픔이 있었구나. 고통도. 우습고 유치해. 치사한데 치열하네. 재미 있어. 에구 슬퍼라. 완전 망쳤어. 불쌍해라. 힘 좀 내라. 이제 푹 쉬어도 돼. 무리하지 마. 흐뭇하다. 대견스러워. 잘 참았어. 다시 시작해.

 

나를 써내려 가면서, 쓰여진 나를 읽으면서, 읽혀진 나를 보며 겨우 내 안에 나를 품을 수 있었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지만 그때 쓴 200편 글 덕분에 웃음 지으며 떠올릴 수 있게 됐다.

 

50대 중반 나이에 이제는 일상에서 휘발하던 말을 글자로 잡고 있다. 젊었을 때의 흥분과 감동은 없다. 그저 눅눅한 뻥튀기처럼 생기 없고 맛없는 중년의 삶이다. 내가 쓴 기록을 읽으면 시골에서 막 자란 촌뜨기 소년 같다. 세련미는커녕 주먹구구로 이리저리 갈겨 놓았다. 그래도 한 사람, 한 마디, 한 만남을 알뜰하게 갈무리한 게 기특하다. 영영 어둠 속으로 잃어버릴 뻔한 나의 가난한 일상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다. 삶은 공허한 과정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는 여정이다. 지금은 술 마시고 새벽까지 열정으로 토론을 벌일 일도 없고, 그럴 만한 대상도 없다. 모든 것이 빈약하고 빈약한 중에 어떻게든 써서 남기려고 애쓴다.

 

일상기록은 온라인 지식정리 앱인 노션(Notion)을 사용한다. 전화기로 앱을 열어 ‘기록폴더’를 펼치면 웬만한 사건은 다 있다. 언젠가 지인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며 싹 잡아뗐다. 자기가 불리하면 정치인처럼 선택적 건망증 환자가 되는 이가 많다.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노션을 열어 어렵지 않게 두 달 전 기록에서 문제의 발언을 찾았다. “봐요. 이런 말을 했잖아요?” 한 마디 하니 더는 우기지 못했다.

 

기록은 언제나 기억을 이긴다.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 앞에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무자비한 망각의 칼춤 아래 과거의 기억은 조목조목 도륙 당한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나 싶게 아득하다. 기록이 없다면 나는 어제의 나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다시는 뚜렷하게 만날 수 없는 20대의 나처럼. 시간이 흘러도 나는 기록을 통해 현재의 나를 꼭 붙들고 그와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와 헤어지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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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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