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생

 

“비호감의 극치다. 아무리 선거에서 폭망한 정당이라고 초강경 보수 인사를 대표로 세우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으니 버리는 카드를 골랐나?”

 

9년 장기 집권을 한 자유당은 2022년 5월 총선에서 패하면서 현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의 노동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야당이 된 자유당은 피터 더튼 전 국방장관을 대표로 선출했다. 더튼 대표는 정치, 사회, 외교, 이민 등 모든 분야에서 강경 보수 노선을 지향하는 정치인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극우 보수층을 제외하면 일반 대중에게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한다고 알려졌다. 노동당의 한 의원은 대머리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더튼을 두고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악한 ‘볼드모트’를 닮았다고 비하하기도 했다.

 

호주는 3년마다 총선이 있는데 집권 1기 후에 곧장 정권교체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느 당이라도 일단 집권하면 웬만하면 한 번 더 3년 임기를 수행할 기회가 주어진다. 노동당이 오랜만에 정권을 잡았으니 자유당이 다음 총선에서 정권을 되찾아 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총리가 되고 싶다면 정권교체를 당한 직후 야당 대표를 맡는 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차기 총선에는 승산이 낮고 여기서 패배하면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권을 되찾아 올 가능성이 있는 차차기 선거에 야당 대표로 도전해야 총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사정으로 강한 비호감에도 더튼이 자유당의 대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여론조사의 총리 선호도에서 더튼은 앨버니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앨버니지 총리의 선호도가 50% 중반을 달릴 때 그는 겨우 20% 초반에 머물렀다. 30% 이상 격차는 정부 여당이 대부분의 의제와 국정을 주도하는 의원내각제에서 야당 대표가 어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차피 3년간 야당 대표를 하다가 차기 선거에서 자유당이 패하면 조용히 물러나겠구나 싶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지만 더튼 대표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답이 있어 보였다.

 

2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2월 오스트레일리안파이낸셜리뷰(AFR)와 프레시워터 스트레터지가 실시한 여론조사의 총리 선호도에서 앨버니지 총리는 42%, 더튼 대표는 38%를 기록했다. 30%가 불과 4% 차이로 마법처럼 줄었다. 이번 달 조사에서는 조금 더 차이가 벌어졌으나 이전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차기 총선에서 노동당이 집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그럼에도 양당 지지도는 물론 총리 선호도까지 바짝 추격하고 있는 만큼, 더튼 대표와 자유당 입장에서 정권교체는 더 이상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은 아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는가?

 

더튼 대표가 잘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대표가 된 뒤에도 원주민 보이스 헌법 개정, 국방, 외교, 경제 이슈에서 자신의 보수 견해를 일관되게 유지했을 뿐이다. 오히려 앨버니지 총리가 저지른 정치적 자충수 덕분에 더튼 대표가 바짝 추격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작년 10월 원주민 권리 보장을 위해 추진한 ‘보이스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사건은 치명적이다. 앨버니지 총리가 야심차게 추진한 헌법 개정 운동이 민의에 의해 무산되면서 그의 지지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다 고물가, 고금리, 고에너지비용으로 인한 생활비 압박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서민들은 생계비 걱정으로 살얼음판을 걷는데 총리는 잦은 외국 방문과 호화로운 의전 장면을 연출했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더튼 대표는 반사이익을 알뜰하게 챙겼다. 결과적으로 더튼의 선호도를 50% 가까이 끌어올린 일등공신은 앨버니지 총리 자신인 셈이다.

 

정치는 최선과 최악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는 쉬운 게임이 아니다. 최선의 씨가 말라버리고 온통 최악이 판치는 세상이다. 가능한 한 차선을 찾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차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때문에 정치의 세계에서는 상대에 따라 최악을 겨우 면한 차악이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적대적 공존을 상호 생존의 기본 토양으로 삼는 역설이다.

 

더튼의 예상치 못한 반전에서 한국 총선을 앞두고 급부상 중인 조국혁신당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조국혁신당을 이끄는 조국 대표는 현 한국 정부 탄생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이른바 ‘조국사태’는 검찰총장이 곧장 대선으로 직행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명분과 계기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가 ‘도륙’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제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과거 조국을 수사했던 대통령은 반대로 날마다 조국의 파상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내세우는 ‘정권심판론’은 총선을 앞두고 지지세를 불려 나가고 있다. 국민 여론에 의해 난자당했던 조국이 정치적으로 부활한 배경에는 현 집권 세력의 실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년 동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줄기차게 벌인 업보를 받는 거다. 심판거리가 아예 없었다면 ‘심판론’ 역시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처한 원수를 자충수를 연발함으로 살길을 열어주었으니 의도치 않게 작동하는 정치의 상생(相生)이라면 상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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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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