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냐 횡이냐?

 

“세상을 종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 또 신라 안에서는 공주님을 따르는 자들, 이 미실을 따르는 자들. 하지만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공주와 저는 같은 편입니다. 우리는 지배하는 자입니다.”

십여 년 전 ‘선덕여왕’이라는 사극에서 주인공 선덕여왕(이요원 분)의 숙적 미실(고현정 분)의 명대사 중 하나이다.

이 대사처럼 종(縱)으로 보면 종(從)들의 세상이 다종다양(多種多樣)하게 펼쳐진다. 백제, 고구려, 신라, 공주파, 미실파는 물론 한국, 일본, 북한, 중국, 미국에다가 여당, 야당, 전라도, 경상도, 문빠, 조빠, 명빠, 석빠, 준빠, 촛불파, 태극기 부대, 남자, 여자, 청년, 노년, 부자, 빈자, 도시민, 지방민 등 어차피 세상살이는 이런저런 기준으로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다. 백인이 있으면 백 가지 다른 우주가 생겨나고 천인이 있으면 천 가지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한때 유행했던 ‘총화단결(總和團結)’은 애초에 불가능한 허망한 구호일 뿐이다.

미실의 말대로 횡(橫)으로 보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라는 두 진영으로 극명하게 분리된다. 진보니 보수니 극좌니 극우니 하며 ‘미실’과 ‘공주’처럼 대립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지배하는 자’의 편에 속해 있다. 반면 국민들은 지지 정당과 정치인을 위해 가족, 친구, 지인들과 불편과 긴장을 초래하면서도 언제나 ‘지배당하는 자’로 남아 있다. 권력을 기준으로 하면 다종다양한 세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저 지배와 피지배 관계만 드러나는 것이다. 조직된 소수가 뿔뿔이 흩어진 절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이 모든 권력현상의 본색 중 하나이다.

내년 3월 한국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간의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대선과 후보를 둘러싼 갑론을박을 쉽게 볼 수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선거 캠프의 중요 인사라도 되는 양 한치의 양보 없이 지지 후보를 옹호하는 논리를 전개한다. 온통 종(縱)으로 세상을 보면서 다른 진영에 선 이웃에 대해서 전면전을 불사할 정도이다. 한쪽에게는 비천한 집안 환경을 극복한 감동의 주인공이 다른 쪽에게는 천박하고 교활한 사이코패스 정치인이다. 한쪽에게는 공정과 상식을 회복할 정의의 화신이 다른 쪽에게는 사정 권력을 이용해 대권을 거머쥐려는 야심가이다. 진상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모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느 진영인가에 따라 전혀 화해 불가능한 정반대 시각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지향 때문에 일상생활인들 간에 깊은 감정의 골이 패이는 행태이다. 정치가 종교보다 민감한 사안이 되어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와 친구 사이를 마구 헤집고 갈라치고 있다. 횡(橫)으로 보자면 지배자들에 대해 피지배자로서 ‘원팀’이라야 할 국민들이 종(縱)으로 분리돼 무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반면 정치인들은 어떠한가? 선거 때면 사생결단을 벌이다가도 평상시가 되면 상생과 협치를 들먹이며 권력의 파이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어찌 됐건 매일 한 구덩이에서 뒤엉켜 살아가는 동종 업계 종사자들이다. 설사 끝장 싸움으로 치달아도 엄연히 국민의 세금이 지급되는 정상적 직업 활동의 일부이다. 국민 입장에서는 과도한 감정이입을 통해 독립투사처럼 숭배할 이유가 전혀 없는 군상들이다.

다수 국민에게 소수의 정치인은 도구에 불과한 존재라야 마땅하다. 주인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권력과 명예를 위임한 후 종처럼 부려야 한다. 건전한 정치라면, 하는 짓이 시원찮고 성과가 부실한 종은 가차없이 버리고 새로운 종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 퇴행적 정치에서는, 이러한 주종관계가 전도된다. 오히려 다수의 주인들이 소수의 종을 위해 목숨 걸고 헌신하는 기이한 병폐가 노골적으로 횡행한다. 위임 받은 권력으로 국민을 도와야 할 정치인이 생계활동에 바쁜 시민을 향해 공짜로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뻔뻔스럽게 호소한다. 국민의 안위를 수호해야 할 권력자가 지지층을 향해 자신의 안위를 수호해야 개혁이 가능하다고 호도한다. 스스로 자멸한 권력이 선량한 국민을 향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상위 권력자들이 쳐놓은 심란한 종(縱)의 전선에 국민들이 종(從)처럼 동원돼 거리 데모는 물론 댓글 싸움에 관계를 서먹하게 하는 말다툼마저 서슴치 않는 씁쓸한 선거판 현실을 목도한다.

횡으로 나뉜 세상의 하층부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온갖 충성을 다하고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광신자 수준의 헌신충(蟲)들이 득실대고 있다.

횡으로 나뉜 세상의 상층부에서, 이런 헌신충들의 충성을 쪽쪽 빨아먹으며 비둔해진 권력의 배를 두드리며 화합의 악수를 나누는 권력충(蟲)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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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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