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와 독도 셔츠

 

어릴 때부터 오이가 거슬렸다. 오이 하나를 입에 넣고 우득우득 씹어 먹은 적이 있었다. 초록물이 팍하고 터지면서 특유의 향이 미각과 후각을 뒤덮었다. 남들은 그 맛에 오이를 먹는다는데 나는 혀가 개구리 맨살에라도 닿은 듯 비릿하기만 했다. 오이소박이나 무침을 먹을 때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오이가 간판인 음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향이 강해도 흠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다른 음식에 들어가 독특한 향으로 전체 맛의 조화를 흩뜨릴 때다. 특히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면 그 곤혹스러움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김밥은 이름 그대로 ‘김’과 ‘밥’이 주인공이라야 마땅한 음식이다. 오이가 들어가면 이러한 음식의 서열과 질서를 온통 헤쳐 버린다. ‘김밥’이 아니라 ‘오이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이의 맛과 향이 압도스럽다. 여름이면 상하기 쉬운 시금치 대신 오이를 넣은 김밥을 자주 본다. 어쩌다 김밥을 먹는데 오이가 있으면 먹기 전에 젓가락으로 지뢰 제거하듯 하나씩 정교하게 뽑아낸다. 오이를 제거해도 김밥 속에 오이향이 남아 불편함을 느낀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면서 나이 오십이 넘어 철부지 아이들처럼 편식한다고 면박을 주기 일쑤다.

 

억울하다.

 

입이 짧아서 오이를 빼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 조화를 중시하는 철학을 갖고 있는데 이를 거스르는 오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 뿐이다. 끝까지 오이를 빼내서 ‘김’과 ‘밥’이 주인 노릇하는 김밥의 원래 모습으로 즐기고 싶다는 열망이 남들의 빈축을 살 일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아내처럼 오이향이 아무렇지 않는 절대 다수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춰질 수 있다. 실제로 수련회 캠프에서 야채샐러드를 배식한 적이 있는데 나처럼 오이를 거절하는 비율은 5% 미만이었다. 아내를 포함한 95%는 그들을 탐탁히 여기지 않을 것 같다. 여러 사람의 눈총을 받고 있음에도 나는 음식에 든 오이를 빼는 것을 40년 넘게 지켜온 고급 취향으로 자부한다.

 

오이처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년 이상 고집하는 취향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독도 셔츠에 대한 애정이다.

 

15년 전 시드니 도심에서 ‘독도는 우리땅’ 캠페인 행사가 열렸다. 한 지인의 소개로 참석했다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문구가 인쇄된 셔츠를 한 장 얻었다. 흰색 바탕에 태극기처럼 청홍색 띠 문양을 사선으로 넣어 한국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연상케 한다. 조금 올라온 목둘레에는 지퍼가 있어 기온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성이 마음에 든다. 촉감이 야들야들하면서 땀이 배이지 않는 재질이라 운동할 때면 최적의 컨디션을 보장한다. 춥지도 덮지도 않게 애매할 때가 많은 시드니 날씨에는 독도 셔츠가 안성맞춤이다. 양복을 입어야 할 장소가 아니면 집안에서나 외출할 때나 아침에 달리기 하러 갈 때나 거의 매일 독도 셔츠를 애용한다.

1년, 2년, 3년, 5년, 10년, 15년 세월이 흘렀다. 독도 셔츠 앞면은 묵은 때가 껴서 꾀죄죄하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진 때다. 세탁 세제로 불려서 박박 빨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제 너무 낡고 더러우니 그만 버리라고 성화다. 셔츠에 충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 옷을 입은 내 옆에 함께 있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한다. 민감한 성격들이 아닐 수 없다. 남들의 눈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는지.

 

가족이 아무리 불만을 터뜨려도 독도 셔츠를 향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 피부의 DNA를 나눠 가진 듯 입기만 하면 저절로 날렵한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 새옷보다는 오래 입어 편한 옷을 좋아하는 것도 취향이라면 취향이다. 독도 셔츠에 대한 취향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독도는 당연히 한국땅이고 나는 끝까지 독도 셔츠를 사랑할 것이다.

 

취향은 뇌보다는 몸이 기억하는 나 자신과 가깝다. 오이에 대한 미움과 낡은 독도 셔츠에 대한 애정은 남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 몸이 가장 편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김밥을 먹을 때는 오이를 빼야 하고, 달리기를 할 때는 독도 셔츠를 입어야 편안하고 행복하다. 일상의 행복 감각을 일깨우는 나만의 취향을 많이 찾아내고 길러낼 때 나는 더욱 쉽게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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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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