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힘

 

연 7%대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호주중앙은행(RBA)이 지난 5월부터 8개월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4연속 0.5% ‘빅스텝’을 포함해 매달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 결과 기준금리는 사상 최저였던 0.1%에서 무려 3.1%까지 급등했다. 연 2~3% 물가안정을 목표로 닥치는 대로 금리폭탄을 쏟아 부었다. 어마어마한 폭격 앞에서 RBA가 우뚝한 거인이라면 서민은 깨알처럼 흩어진 난쟁이 신세나 마찬가지다. 고물가 때문에 이미 휘청거리고 있는데 이를 잡는다고 금리까지 올리니 이중고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분명 경제 살리기 대책일 터인데 아예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시중에 돈을 너무 많이 풀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이 풀렸다는 돈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홍수처럼 넘쳐난 돈이 유독 내 지갑만 피해서 도망친 것 같다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공급망 마비로 국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다고 한다. 공급 측면에서 발생한 문제인데 금리를 올려 수요를 줄인다고 가격이 내려갈까? 이미 가격이 올랐다면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데 여기다 금리까지 올릴 필요가 있나?

 

일손 부족으로 임금이 올라 용역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단기로 구인난을 해결하려면 이민 문호를 확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취업 관련 이민법규를 빨리 완화하면 되지 않을까? 극심한 구인난 때문에 고용주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지난 5월 출범한 노동당 정부는 아직까지 ‘검토 중’이다. 이민 문호 확대에는 소극 태도를 보이는 반면, 임금 인상에는 전투하는 자세로 나서고 있다. 물가가 7% 상승했는데 실질소득이 줄지 않으려면 임금도 그만큼 올라야 마땅하다. 임금을 올려도 일손 부족을 해결하지 않으면 물가가 잡힐 턱이 없다. 물가가 오르고 임금이 따라 오르고 그래서 물가가 다시 오르고 임금이 또 올라야 하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면 끔찍하다.

 

고금리와 고물가가 이어지고 경제침체가 오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폭락할 것이고 결국 ‘현금이 왕’이 된다. 현금 부자들이 타인의 알토란 자산을 헐값에 사두었다가 경제가 정상을 찾으면 막대한 차익을 남길 수 있는 최고의 ‘대박’ 기회가 오고 있다. 물론 그 반대편에서는 ‘자산 부자 현금 거지’에서 하루아침에 그 자산마저 잃어버린 ‘진짜 거지’들이 넘쳐날 것이다. 어느 경제 위기 때나 한 사회의 부(富)가 재편되는데 종국에는 여지없이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을 낳는 게 기가 막힐 뿐이다.

 

세상은 어차피 RBA를 비롯한 거인들의 게임장이다. 무지막지한 거인들의 ‘빅스텝’에 밟혀 죽지 않으려면 난쟁이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도모해야 한다. 그저 덜 쓰고 더 버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경제대란이 닥쳐와도 아내의 플릇 레슨은 이어진다. 자기가 가르쳐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배워서 돈을 쓰는 레슨이다. 늦은 나이에 배움의 열정은 상찬할 일이나 아이 넷에 더해 주부까지 학생 노릇을 자처하니 뒷바라지하는 가장에게는 상당한 부담이다. 얼마 전 내가 운전을 해서 아내를 플릇 선생의 집까지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그녀가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업무를 했다.

 

1시간 30분 뒤 레슨을 마친 아내는 ‘헝그리인(人)’이 되어 빨리 식당으로 가자고 채근했다. 배고픈 아내가 무서울 때가 많아 후딱 차를 몰았다. 아내는 만둣국 한 그릇을 ‘뚝딱’하더니 쇼핑을 가지고 했다. 레슨비에 밥값에 쇼핑까지 이 어려운 경제시기에 소비에 열을 올리는 자태가 마땅치 않았다. 끌려갔든 따라갔든 어쨌든 아내는 나를 자선단체 ‘적십자(Red Cross)’가 운영하는 가게로 데려갔다. 소박한 매장 내부에는 주로 중고 의료가 걸려 있고 한쪽 진열대에는 잡화, 장신구, 책이 놓여 있었다. 모두 기부 받은 물품이다. 판매 수익금은 적십자 구호활동에 쓰인다고 했다.

 

가게에 있는 물건은 새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품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순수한 가격표가 마음에 들었다. 시중에서 80~90달러 하는 나이키 셔츠가 단돈 25불이었다. 아디다스 달리기용 반바지도 12달러였다. 인플레이션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무풍지대에서 당장 행복한 구매를 완료했다. 아내도 패션 감각이 탁월한 호주 할머니에게 어울릴 법한 아이템들을 알뜰하게 쓸어 담았다. 모처럼 소비 행위에서 푸근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 시간이었다.

 

적십자 가게를 나오는데 벽에 부착된 ‘인류의 힘’(Power of Humanity)이라는 알림판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나약한 개인일지 모르나 전체 인류에게는 신(神) 다음으로 거대한 힘이 있다. 아무리 거인들의 세상이라도 수많은 각성한 난쟁이들이 한마음으로 나서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지긋지긋한 인플레이션의 저주만 해도 온 인류가 동시에 소비를 10%만 줄여도 당장 잡을 수 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소비 행태를 변화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기후변화 역시 인류가 다 함께 나서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이다.

 

거대한 인류의 힘이 적십자 가게처럼 소유와 욕망이 아니라 나눔과 도움에 모아질 수는 없을까?

 

냉소 섞인 의심과 함께 간절한 희망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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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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