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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Gallipoli)의 터키군 사령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왼쪽에서 네 번째). 연합군의 갈리폴리 상륙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그는 후에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됐다.


역사학자 하비 브로드벤트, 터키 입장에서 갈리폴리를 말하다

 


‘과연 터키는 우리(호주)가 패배한 것만큼 갈리폴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전사자 매장을 위해 24시간 동안 양측(안작부대와 터키군)이 휴전을 했을 때 오트만 제국(터키군)의 병사들이 안작부대원과 마주치면서 사진이나 담배를 교환하기도 했던가?’ ‘터키군은 정말로 안작부대가 갈리폴리 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란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터키군은 정말로 안작부대의 정교한 속임수에 당한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호주군(안작부대)이 철수하도록 놓아준 것인가?’ ‘왜 영국군 사령부는 갈리폴리 작전에서 그토록 심한 오판을 했던가?’

 


갈리폴리 작전에서의 각 병사들의 일기와 편지 등을 포함, 터키인이 작성한 2천 페이지 이상의 기록을 번역한 하나의 역사서가 100년 전 전투와 관련해 이 같은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갈리폴리 역사학자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이기도 한 매콰리 대학교(Uni. of Macquarie) 하비 브로드벤트(Harvey Broadbent) 부교수는 터키 입장에서 본 갈리폴리 전투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터키어로 되어 있는 갈리폴리 관련 기록과 글들을 번역하는 데 지난 5년을 투자했다.

 


터키에 대한 승리

 


갈리폴리 전투의 최대 수혜자는 갈리폴리 방어군 사령관이었던 아타튀르크Ataturk), 즉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현대 터키공화국을 세운 인물로 기록됐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그는 오스만 제국이 아닌 공화국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터키인들에게 부여했다”면서 “(갈리폴리의 방어 성공을 통해) 그는 중령의 계급에서 장군으로 승진했다”고 말했다.

 

케말의 전쟁 일기를 번역한 후 브로드벤트 교수는 “터키는 T자를 십자가처럼 쓰고 I자는 점을 찍는 세심한 사람들임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케말은 자신의 모든 기록을 보관했다. 특히 일기에는 아주 자세한 내용을 담아 두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그는 내가 살펴본 다른 어떤 군 지휘관들보다 많은 기록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록은 (아직은 번역하지 못한) 그가 수많은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군사 전략가로서의 명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그에 대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는 감각이 뛰어났다”고 평가하며 “무스타파 케말의 명성은 갈리폴리에서의 승리와 연관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인들에게 자기실현의 의식을 남겼다”면서 “갈리폴리 승리는 당시 세계 강대국의 침입을 막아낸 터키의 첫 승리였다”고 말했다.

 


비화- 한 지휘관의 인간애

 


브로드벤트 교수는 자신의 책 <갈리폴리 방어>(Defending Gallipoli)를 ‘진지한 마음으로 헌신한 터키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전장에서 비명횡사하거나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병사들의 기억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갈리폴리 전투에 대해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병사들을 갈리폴리 전장으로 보내 죽음으로 이끈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연합군은 3만5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이중 호주 병사는 거의 9천 명에 달한다. 터키군의 희생은 더욱 많아 8만7천 명이 전사했으며, 전사자들은 거대한 무덤에 함께 매장됐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비화도 소개했다. 그 하나가, 한 터키군 지휘관이 눈물을 흘리게 된 사연이다. 터키군 지휘관이었던 세피크(Sefik) 중령은 자신의 병사들이 진격한 뒤 병사들이 벗어놓은 옷더미를 발견하고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그 옷더미에 대해 “이는 그들(터키군)의 종교적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터키군)은 죽어 자신의 신에게 갈 때 가능한 깨끗한 상태로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전투에 나가면서 그동안 입었던 옷을 벗고 깨끗한 군복으로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세피크 중령 또한 무슬림이었기에 이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군 전략가였고 그러기에 확고한 투지를 가진 자기 병사들에 대해 기쁜 마음이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물론 그는 갈리폴리 반도의 숲 속에 병사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보면서 자기 병사들이 주검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며 “이것이 기록된 문서를 발견했을 때 나는 ‘한 지휘관의 군인 정신과 인간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오스만 제국 병사들의 강인함은 두 가지였다고 덧붙였다. 그중 명령에 대한 복종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하지만 또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를 통해 드러난 터키군의 투지로, 이는 조국과 종교를 위해 싸우려는 진정한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휴전과 안작부대 철수

 


전사한 병사들을 묻어주기 위해 양측이 협상을 통해 잠시 전투를 중단하고 무덤을 파면서 양측 병사들이 사진이나 담배를 교환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브로드벤트 교수에 따르면 양측의 지휘부 장교들은 연합군, 특히 호주 안작부대와 터키군이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양측 장교들은 자기네 병사들이 적과 너무 친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서 “터키군 지휘관들은 자기네 입장에서 분명한 적인 안작부대에 대해 존중하는 약간의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브로드벤트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 때문에 그들(터키군 지휘부)은 안작부대가 배치된 최전선에 대한 작전에 착수하거나 공격을 시작하는 데 있어 신중을 기했다.

아울러 그는 갈리폴리에서 안작부대가 무난히 후퇴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한 병사가 전략적 퇴로를 잊어버림으로써 성공한 것이 아니라고 추측한다.

 

사실, 1915년 12월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안작부대 철수는 갈리폴리 상륙작전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다. 터키군의 눈을 피해 갈리폴리 반도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단 두 명의 병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이 정말로 안작부대의 후퇴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수년 동안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그는 “1915년 12월 특정 작전과 관련된 다수의 문서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로드벤트 교수는 터키 쪽의 안작부대 철수 관련 문서에서 ‘우리(터키군)는 12월20일 그들(안작부대)이 철수하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후퇴하도록 내버려두었다’라는 기록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가 관련된 많은 기록들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은 이 조각들을 모아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것”이라며 “그것(안작부대의 갈리폴리 철수 시나리오)은, 터키군이 안작부대의 철수 준비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안작부대의 정확한 후퇴로를 알지 못했고 또 언제 작전을 전개할런지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물론 터키군은 안작부대가 후퇴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서 “이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군 사령부는 왜 갈리폴리 작전을 감행했는가

 


갈리폴리를 제안한 작전은 영국군의 잘못된 결정이 아니라는 데 대한 의문도 남아 있다. 사실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지지부진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연합군의 동부지역 동맹군 견제 작전은 계속될 필요가 있었다.

 

브로드벤트 교수는 “영국군 사령부는 이 지역에서 뭔가 작전을 감행해야 했는데, 1915년 연합군 일원인 러시아가 참전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러시아가 병력을 철수할 경우 이는 독일이 동부전선(Eastern Front)의 동맹국 병력 상당수를 빼내어 서부전선에 증강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는 서부전선 전체에 엄청난 위협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갈리폴리 작전은 러시아를 연합군 일원으로 유지시키고 또 독일로 하여금 동부전선의 동맹국 병력을 빼내지 못하도록 교착상태로 이어갈 필요에 의해 시작됐다는 게 브로드벤트 교수의 말이다.

 

아울러 그는 동부전선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연합군 작전은 성공이었다는 데 동의하면서 “갈리폴리 작전을 통해 동맹국 병력을 동부전선에 묶어둠으로써 이는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진단했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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