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객 상담 15분전’

 

식탁에 앉아 통곡물 시리얼에 아몬드 우유를 붓고 계피, 카카오 가루, 벌꿀을 올리고는 막 한술 떠서 입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평소 습관대로 왼손으로 휴대폰의 아웃룩 앱을 눌렀더니 알람 메시지 하나가 툭 튀어 올랐다.

 

“아차! 이걸 어쩌나?”

 

11시 고객 상담 예약을 깜빡한 것이었다. 시계는 이미 10시 45분을 지나고 있었다. 출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레인코브 공원에서 2시간 동안 달리기를 한 후 곧바로 돌아온 상태였다. 러닝 팬티와 셔츠만 입은 채 간단하게 조반을 먹고 출근할 요량이었는데 난감한 처지가 됐다.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최소한 15분이 걸리기에 11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난히 알뜰하게 아침 시간을 보낸 날이었다. 6시에 일어나 ‘매일성경’ 시편 89편을 읽고 다시 ESV 영어 성경을 낭독하고 30분 동안 독서를 했다. 15분 체조 후에 주방으로 내려와 레몬 음양탕을 만들어 마시고 강아지를 데리고 30분 산책을 했다. 8시30분에 달리기 복장을 갖추고 공원으로 가서 13km를 주파했다. 그 긴 시간 동안 11시 상담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일정을 확인하고 일과를 시작했어야 했다.

 

늦었지만 최대한 신속한 출근 준비를 위해 시리얼 그릇을 들고 눈썹이 휘날리게 안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가면서도 허겁지겁 숟가락으로 시리얼을 퍼먹었다. 다급한 마음에 씹는 둥 마는 둥 꿀꺽꿀꺽 삼키다시피 했다. 샤워할 시간은 아예 없었다. 몸부림치듯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헝클어진 머리는 대충 물을 묻혀 빗질로 수습했다. 셔츠와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신발을 신었다. 지갑과 열쇠를 움켜 쥔 채 노트북 컴퓨터와 서류를 넣은 가방을 들고 바람처럼 승강기 쪽으로 뛰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55분이었다. 5분 만에 사무실에 도착하는 건 포기했다. 첫 만남인데 약속 시간조차 지키지 못한 변호사가 되고 말았다. 미안함은 물론 자괴감마저 엄습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자마자 좀 늦는다고 문자를 보내야겠다. 그 때문인지 승강기를 타고 지하 3층을 누른 후 한숨 돌리면서 휴대폰의 메시지 앱을 열었다. 새 문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11시에 만나기로 한 고객이 보낸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눌러 보니 웬걸 상담 약속을 취소한다는 문자가 9시57분에 떡하니 도착해 있었다.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끊어지는 듯 맥이 탁 풀렸다.

조금만 일찍 문자를 확인했다면 10분간 그 난리법석을 떨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당초 계획대로 여유로운 아침 출근이 가능했는데 선불 맞은 멧돼지마냥 좌충우돌했던 것이다.

 

지하 3층 차고에 도착했으나 도저히 그냥 출근할 수 없었다. 억울과 공허가 뒤범벅이 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뇌리 속으로 밀려왔다. 다시 집으로 올라가 평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무언가 속에서 복받쳐 올라오고 있었다. 웃통을 벗은 김에 몇 주 동안 벼르던 머리 염색을 했다. 접시에 정성스럽게 염색약을 섞고 장갑을 끼고 조금씩 머리에 발랐다. 약이 모근까지 닿도록 두피 마사지하듯 손가락 끝을 집요하게 놀렸다. 염색약에 젖은 머리를 보니 어디 가서 한바탕 진득한 소나기라도 맞은 몰골이었다.

 

염색약이 배이기를 기다리는 30분 동안에도 가슴 속에서는 허허로운 바람이 불어 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베란다로 나가 운동화를 신고 줄넘기를 잡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염색약 냄새가 폴폴 코끝을 자극하는 와중에 헉헉대며 일천 번을 채웠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스쿼트 60개를 더했다. 거의 녹초가 될 지경이었으나 이른 아침 심혼을 강타한 허탈감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문득 욕조에 불려 둔 속옷 생각이 났다. 그 옷들을 집어 손으로 박박 빨아 물기를 짜서 건조대에 널었다. 광란의 30분이 지난 후 뜨거운 샤워로 염색약을 씻어냈다. 머리속을 채운 심란함이 하염없이 흘러내는 물줄기에 실려 쑥쑥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나는 다시 말끔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고 집에서 나와 세상으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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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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