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권(病權)

 

“응급실에서 위험하다며 당장 입원해서 수술 받으래요”

단 한 통의 전화로 일상이 무너졌다. 아내가 며칠 사이 눈병으로 응급실과 안과 전문의에게 정밀 검사를 받긴 했으나 갑자기 수술이라니. 자칫 잘못하면 두 눈을 실명할 수도 있다는 말에 현실감마저 상실한 지경이었다. 평소 자기 몸을 황금처럼 귀히 여기는 인사인지라 처음엔 과장이 섞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의 안일함을 비웃듯 상황은 긴박하게 이어졌다. 아내는 나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곧장 시술을 받으러 택시를 타고 세인트 레오나드 종합병원 응급실 안과 병동으로 직행했다. 나도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제한으로 아내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다. 환자 보호자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돼 물품이나 음식만 간신히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25년 넘게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한 사람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 노릇을 하고 있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담담 간호사에게 전화로 상태를 물어야 했다. 병원 측은 안구가 악성 박테리아에 감염돼 이를 벗겨내는 시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연말부터 눈이 가렵고 아프다고 했지만 평범한 눈병으로 여기고 방치한 것이 사태를 키운 것 같았다. 사실 아내는 여러 번 응급실을 가자고 했으나 내가 그냥 일반의를 찾아 치료를 받으면 되지 않겠냐고 만류해 때를 놓쳤다. 일반의가 처방하는 안약을 몇 주 넣었으나 차도가 없어 결국 응급실로 가서 긴급 시술을 받게 된 것이다.

아내는 시술을 받은 후 3일 동안 아예 눈을 뜨지 못했다. 온통 암흑 상태에서 병실에 홀로 있어야 했기에 그 시간이 너무 외롭고 무서웠다고 한다. 간호사의 도움으로 겨우 전화 통화를 했는데 평소 활기찬 느낌 대신 지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새어 나와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아내는 입원한 지 1주일 만에 퇴원했으나 한동안 약물요법과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집에 있어도 정상적 생활은 어려웠다. 치료 후유증으로 눈이 빛에 민감하게 반응해 밤에도 블라인드를 치고 불을 끄거나 조명을 극도로 어둡게 해야 했다. 또한 눈을 보호하기 위해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써야 했다.

아내는 퇴원을 하자 다시 만난 남편을 반가워하기보다 서운한 심정을 토해냈다. 자신이 응급실로 가려고 했을 때 말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불만이었다. 나도 후회막급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아내가 심각한 안구 감염증에 걸렸다고 예상할 수 없었다. 뾰족한 송곳이 돋아 있는 아내의 말에 나는 그녀를 진료한 일반의를 방패로 들이 밀었다. 의사도 몰랐던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냐며 항변했지만 아내의 원망을 피할 수 없었다.

아프기 전부터 집안 대소사에서 아내의 발언권은 분명 나보다 절대 우위에 있었다. 성장하면서 ‘엄마’ 추종세력으로 전락한 아이들의 지지는 당연하고 시댁 어른들까지 네 자녀를 혼자서 든든히 키워냈다며 아내를 우대했다. 눈병이 난 뒤에는 한국 고향의 부모님이 아내에게 “집안의 기둥이 이러면 어쩌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병자지만 며느리를 ‘집안의 기둥’이라고 하면 옆에 있는 아들은 뭐가 되냐 싶었다. 한때는 내가 자타가 공인하는 기둥이었는데 이제는 새 기둥에 밀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사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가족들을 상대로 병자(病者)로서의 모든 권리를 한껏 누리고자 했다. 온 가족 역시 그녀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병자가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이 있으며 신속히 사다 바쳐야 했고, 아침 저녁으로 안구 건강에 도움이 되는 발 부위를 안마해줘야 했고, 통원치료가 있는 날이며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우선적으로 챙겨야 했다. 시력이 약해지면 청각과 후각 등 다른 감각이 상대적으로 민감해지는 것 같았다. 혹여 내가 아이들에게 불만을 털어놓으면 귀신같이 듣고는 즉각 응징하는 탓에 집에서는 특별히 말조심을 해야 했다. 더군다나 말다툼이 벌어지면 이전보다 더 빠르고 정교한 논리를 전개해 좀처럼 수세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픈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잘 하냐고 따지면 “눈이 아프지 입은 멀쩡해”라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오곤 했다.

마음껏 ‘병권’(病權)을 휘두르는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있었다.

“대체 언제 다 나아?”

아내의 치료 일정은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2~3주면 된다고 한 것이 1~2달을 거쳐 2~3달까지 연장됐다. 병세는 그때그때 다르고 완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예상 치료기간이 들쭉날쭉했다. 아내가 병자로서 고통을 겪는 모습은 물론 가슴 아프지만 동시에 ‘병권’을 휘두르는 태도는 가끔 얄밉게 다가왔다. 아내가 권세를 부릴 때마다 나는 더 바쁘고 고단해지기 때문이다. 하루속히 아내가 건강을 회복해 ‘병권’을 내려놓고 ‘돕는 배필’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비로소 나를 둘러싼 우주의 질서가 회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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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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