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싸운다

 

“자유에 홀려 싸우다가 결국 자유로워졌다”

 

내가 남기고 싶은 묘비명이다. 어느 공부 모임에서 자신의 묘비명 쓰기 과제가 주어졌다. 아직 다하지 않은 삶을 한 줄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았다.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음은 언제나 불편하다. 언제 죽음이 삶 속으로 들어왔던가? 묵은 기억을 들추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수학여행 가는 기차 안에서 울고 있었다. 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났다. 문득 부모님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어린 마음을 덮쳤다. 어떤 맥락과 계기 없이 죽음처럼 불쑥 찾아온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슬픔이 아니라 무서움이었다. 아픔이 아니라 상실감이었다. 몸이 갈아져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모래처럼 사그라지다가 흔적이 남지 않는 게 죽음인가?

 

중학교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왜소증을 앓았다. 팔다리가 나무 인형처럼 비쩍 말랐다. 체육 시간에도 늘 혼자 교실에 남아 있었다. 공부는 곧잘 했다. 워낙 체력이 약해 마음만큼 시간을 쏟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주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어쩌다 한 마디 하면 가는 실 같은 웃음으로 답하곤 했다. 그가 며칠째 결석을 했다. 교실에는 불길한 예감이 퍼졌다. 기어코 담임선생이 침통한 얼굴로 그의 죽음을 알렸다. 울음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도 울지 않았다. 다들 처음 겪는 친구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학생 대표로 상가를 찾았다. 아이의 죽음이라 조문객이 별로 없었다. 빈소가 차려진 방에 들어가니 사진 속에서 친구가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회색 평면으로 접힌 듯했다. 어디에도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사진 속의 그와 나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이게 죽음인가?

 

절을 하고 일어서는데 눈물이 났다. 응축된 기억에서 친구의 모습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아우성쳤다. 어머니는 “어차피 오래 살기는 어려운 아이였어”라며 흐느꼈다. 예상했던 죽음이라고 덜 슬픈 건 아니다. 아버지는 주름진 얼굴로 어두운 하늘을 보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눈가에 물빛이 어른거렸다. 잃어버렸다. 끝나버렸다. 멈춰버렸다. 친구의 세상은 죽음이 됐다. 그 한 가운데서 나는 숨을 몰아쉬고 살아 있었다. 타인의 죽음은 산 자들의 삶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나는 묘지 옆에 살고 있다. 한 편에는 광활한 공원묘지가 있고 다른 쪽에는 사무실 빌딩과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집에서 나와 승강기 쪽으로 가면 창문 너머로 십자가가 빽빽이 꽂힌 묘지가 보인다. 묘지 맞은편에는 대형 장의회사 건물이 있고 그 옆에는 커피콩 공장이 있다. 고소한 커피콩을 배달하는 트럭이 공장에서 나오는가 하면 시신을 태운 장의차가 묘지로 들어간다. 삶과 죽음이 온통 뒤엉켜 바쁘게 돌아가는 지역이다. 아침 달리기를 하러 레인코브 공원으로 가려면 커피콩 볶는 향기와 죽음의 기운이 뒤섞인 대기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죽음과 생명은 완전히 다르면서 동시에 서로를 의지한다. 생명은 무수한 다른 생명의 죽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날마다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죽음이 밥상에 오른다. 죽음을 먹고 살던 생명이 죽으면 다시 다른 생명을 위한 먹이가 된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질서 아래 죽음은 모든 개체의 종말을 결정하는 폭군이다. 삶의 끝은 어쩔 수 없어도 살아가는 순간만큼은 죽음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막 솟아오르는 해를 눈에 담는다. 어린 태양은 그리 눈부시지 않다. 순한 햇살로 망막에 눌러 붙은 어둠을 쓸어 낸다. 죽음을 닮은 밤의 그림자는 불붙은 화선지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두드리고 눈을 내리치고 볼을 때리고 코를 튕기고 턱을 찍는다. 쇄골을 때리고 내려가 아랫배를 가격한다. 뼈와 살이 소나기 같은 타격감에 서둘러 잠에서 깨어난다.

성경책을 편다. 영혼의 양식을 먹는다. 기도를 올린다. 진리의 말씀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하지 않다. 공허하지도 않다. 그저 다시 하루를 선물 받은 게 기쁘다. 영혼의 빵 다음에는 육신의 양식이다. 부엌에 내려가 잡곡 통을 꺼낸다. 흑미, 현미, 통귀리, 수수, 기장, 들깨, 아마란사를 섞어 물을 붓고 죽을 끓인다. 북적북적 거품을 뿜으며 끓는 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진득한 죽사발 위로 시커먼 깨 비린내가 김을 타고 올라온다. 뜨거운 곡기가 후각과 미각을 점령한다. 매콤한 김치와 호두멸치볶음을 더하면 이보다 맛있는 아침이 있을까?

줄넘기를 들고 천 번을 뛴다. 지치지 않아 다시 오백 번 더. 또 오백 번 더해 이천 번을 채운다. 욕심은 끝이 없다. 다시 삼백 번, 더 더 하다가 삼천 번을 채운다. 호흡이 가쁘고 등에는 땀이 흥건하다. 축축한 열기가 내려앉는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구나. 더 뛰면 몸이 뭐랄 것 같아 줄을 내려놓는다. 하루가 뜨거울 것 같다.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는다.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허리띠를 조이고 윗도리를 걸치면, 군장을 하는 기분이다. 세상은 일터를 두고 전쟁터 아니면 사냥터라고 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고, 사냥하지 않으면 사냥 당한다. 생존은 반드시 경쟁을 동반한다. 일터가 그저 삶터가 되는 하루면 족하다.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생긋 웃으며 “돈 마이 벌어 오세요”라고 말한다. 딸인지 마누라인지 분간이 어렵다. 억지로 귀엽긴 하다. 바가지 긁히는 것보다 낫다. 돈을 쓰는 데는 얼마나 천재인지.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

 

자잘한 하루의 일상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거기에 죽음의 폭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의지가 응결돼 있다. 죽음이 생명을 허무하게 하는 부동의 운명이라면 나는 순간의 진실을 무기로 싸울 것이다. 죽음의 힘이 살아 있는 나를 어찌하지 못하게 삶의 모든 것을 걸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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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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