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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들롱이 열연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영국의 여류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별 볼일 없는 주인공이 재벌 아들인 친구를 죽인 후,
죽은 친구의 신분으로 위장해 새로운 삶을 산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이름도 모두 ‘리플리’다. 



리플리처럼 허구와 현실을 구분짓지 못하는 정신적 결함은 
1970년대 들어 정신병리학의 연구대상이 됐다. 
영화 속이 아닌 현실세계에서도
리플리와 유사한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종종 생겨나서다. 

이들에게 현실은 ‘허구’다. 
대신 자신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진짜’라고 여긴다. 



진짜와 가짜를 바꿔치기 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리플리 증후군’ 혹은 ‘공상허언증’이라고 부른다.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자기가 한 거짓말을 
스스로 믿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병이다.



한국사회에 리플리 증후군이 알려진 건
2007년 신정아 학력위조사건이 발생하면서다. 
당시 신정아는 가짜 박사학위로 사회적 명성을 만든 후 
그것이 진짜 본인의 모습인양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쥐락펴락 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재능있는 리플리씨’를 인용해 
“재능있는 신씨, 한국의 문화귀족을 어떻게 농락했나’라는 제목을 달았다.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 리플리 증후군이 다시 언급된 건 
지난해 4월의 일이다. 


6년동안 자그마치 48개 대학에서 신입생 행세를 하고 다닌 
한 청년의 이야기가 방송을 타면서다.
그의 가공할 행각 뒤에는 학벌사회의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4명의 누나는 일류대학에 진학했지만 
재수를 했는데도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는 학교밖에 진학하지 못한 외동 아들. 
자신이 처한 현실과 부모가 바라는 욕구 사이의 크나큰 괴리는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최근, 또다시 ‘리플리 증후군’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주간 미주 한인사회와 한국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소녀 해프닝’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과 스탠포드 대학에 동시입학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 모 양의 ‘천재성’은, 
두 대학의 합격증을 모두 위조하고 
한국 방송에서 거짓을 사실처럼 떠벌린 
‘천재적 사기성’으로 귀결되면서 씁쓸하게 끝을 맺었다.



신정아의 학력위조, 한 청년이 벌인 신입생 행세,
한 소녀의 자작극이라는 리플리 증후군에는 
한국사회의 ‘지나친 학벌주의’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방도를 찾지 못한 이들에게 ‘학력위조’는 
가상의 세계로 가는 직행열차였을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학력’이면 뭐든 통하는 ‘학벌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곪아터진 병폐는 비단 ‘학벌주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은 도태되고 
반칙과 편법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수많은 리플리들이 출현한다. 

권력의 동아줄을 잡고 신분상승을 꾀하는 리플리, 
재벌행세하며 사기를 치는 리플리, 
재림 예수를 사칭해 교주놀이에 빠진 리플리 등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한 리플리들이 판을 친다. 



그 뿐 아니다.
안일한 방역 대응으로 온 나라에 메르스 바이러스를 퍼트리고도
‘안전 코스프레’와 ‘인기 자랑’을 하고 다니는 
현 정부의 무능력을 들여다봐도 
대한민국은 영락없는 ‘리플리 양성소’다.



[뉴스넷] 최윤주 편집국장 editor@newsnet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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