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Choi.jpg



그리스 시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가면’을 썼다.
가면을 쓰는 순간, 배우 자신은 가면 뒤에 철저히 가려졌다.
맡은 배역의 인격만이 무대 위에 존재할 뿐이다.



고대의 연극이 가면을 사용한 이유는 배역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개의 가면을 쓰면 두 개의 인격을 표현해야 했고,
세 개의 가면을 지닌 배우는 세 명의 각기 다른 인격을 나타내야 했다.
한 사람의 배우가 여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보니
연극 속 다양한 인격을 표현하기에 가면만큼 좋은 도구는 없었다.



페르소나(persona).
그리스 시대 배우들이 썼던 가면의 이름이다.
심리학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다른 얼굴로 관계를 형성하는 걸 뜻한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 나타나는 다양한 인격이라는 점에서

고대극에서의 ‘페르소나’와 심리학의 ‘페르소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고대의 페르소나는 ‘사회적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아들은 누군가의 아빠이고, 배우자이고,
동료이고, 친구이고, 후배이고, 상사이고, 부하직원이다.



문제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역할의 페르소나만 존재하진 않는다는데 있다.
상대가 누군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진다.
사회가 분화되고 관계가 넓어질수록 페르소나의 숫자도 늘어난다. 
연극 무대에서 전혀 다른 사람을 연기하듯,
삶의 무대 곳곳에서 천양지차의 얼굴이 등장한다.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미약한 약자의 가면을 쓰던 사람이
약자 앞에서는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폭압의 가면을 꺼내들기도 하고,
한없이 신실했던 이가 교회 밖으로만 나오면 딴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페르소나라는 가면은 ‘나’에게 내재된 다양한 욕구의 분출이다. 

모범적인 학생, 잘 믿는 성도, 유능한 직장인, 가정적인 아버지, 위압감을 주는 폭군,
무서워 보이는 무법자, 대적할 수 없는 능력자 등의
다양한 가면이 상황과 상대에 따라 마치 ‘나’인양 등장한다.



고대 연극무대 위 페르소나는 근대로 들어서면서 분장으로 진화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무대 밖 관객들에게
연기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과장된 분장은 필수였다.



심리학의 페르소나도 마찬가지다.
가면을 자주 쓰다보면 어느새 가면이 얼굴에 꼭 맞는 분장이 되어
내 얼굴인양 착각하게 된다.
‘개인’(person)이라는 말과 인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가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민낯을 보여줄 수 없는 건 현대사회에 들어서 초절정을 이룬다.
가면과 분장도 모자라, 턱을 깎고 눈을 찢고 코를 높여
‘가면’을 아예 얼굴에 장착시켜버린다. 
개인이 가진 본래의 성격은
말쑥한 옷차림과 빛나는 졸업장과 두둑한 지갑 뒤에 깊숙이 감추어진다.
현대의 페르소나다.



가면(persona) 자체가 인격(person)일 순 없다.
가면의 모습에 빠져 자신의 민낯이 무엇인지 판단 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결국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민낯을 드러내는 아픔을 견뎌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가면이 가득한 세상, 민낯의 사람내음이 그립다.




[뉴스넷] 최윤주 편집국장 editor@newsnetus.com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강한 지도자는 겸손합니다 [1] file

    독재 스타일 경영자 시대는 지나… 이타심 구비해야     (로스앤젤레스=코리아위클리) 홍병식 교수(내셔널 유니버시티) = 현대의 경영분야에서 경영지도자의 정의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언성이 높고 독재성 지도자가 강한 지도자로 여겨졌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현대의 기...

    강한 지도자는 겸손합니다
  • “응답하라 1988” [4] file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행진_1985년)   1980년대 중후반, 젊은 층은 ‘들국화’에 열광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가...

    “응답하라 1988”
  • 얼래,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 아래는 지난 28일(토) 오후 7시 '역사와 평화'(역평) 포럼 첫 모임에서 행한 '여는 말'을 정리한 글입니다. '역평'은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코리아위클리>가 마련한 정기 모임으로, 궁극적으로는 남북화해와 분단의식 극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임은 ...

    얼래,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 피의 악순환 file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는 9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죽음으로 몰았다.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사건의 장본인인 ‘검은 9월단’은 9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전 세계에 악명을 떨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테러도 내성을 가지는지,  한 사람...

    피의 악순환
  • 플로리다로 은퇴를 즐기러 오신 장로님께 file

     인식 정지증의 해소를 위하여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우선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오신 장로님께 뒤늦게나마 환영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 곳 플로리다에는 늘푸른 골프장, 그리고 던지자 마자 입질을 하는 환상의 낚시터가 많아 은퇴생활 하기에 정말 좋은 ...

    플로리다로 은퇴를 즐기러 오신 장로님께
  • 대체, 언론인은 누구인가? [1] file

    [허리케인 칼럼] 다시 돌아보는 언론인의 기본 자세   리영희 교수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암울했던 70년대 중반, 몇 권의 시대 풍자적 저작으로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에 감히 도전하고 나선 교수가 있었다. 그는 군 장교 시절 사병에게 돌아갈 식량을 한...

    대체, 언론인은 누구인가?
  • 국정 교과서 ‘유감’ file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다음해 17척의 군함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피의 역사는 그의 배가 카리브 해안에 닿으면서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1493년 800만명이었던 에스파뇰라섬의 원주민 타이노족은 콜롬버스가 이 땅을 밟은 지 3년...

    국정 교과서 ‘유감’
  •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file

    미국의 사멸위기 언어연구소에서 100년 안에 세계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적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는 7,000여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2주에 하나꼴로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500년 동안 세계 언어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 '엄지'의 삽질 file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 속에는 ‘엄지’라는 불리우는 존재가 등장한다. 존재 ‘엄지’는 순식간에 ‘찍어 누르기’로 개미의 목숨을 앗아가는 절대파워의 소유자다. 개미 한 마리의 존재가치는 한없이 미력하고 나약하다. 그러나 그것은 ‘1’일 때의 얘기다. 인간 ...

    '엄지'의 삽질
  • 지중해의 비극 file

    한 장의 사진이 지구촌을 울리고 있다. 지난 2일, 싸늘히 식은 몸으로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 떠밀려 온 인형같이 작은 몸. 무심한 파도가 연신 얼굴을 적셔도 해변에 엎드려 누운 아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올해 겨우 3살이었던 에이란 쿠르디는 이슬람 극단주의 ...

    지중해의 비극
  • 뉴욕의 별난 ‘負褓商(부보상)

    목록 글쓰기 뉴욕의 별난 ‘負褓商(부보상)’ 글쓴이 : 韓 泰格 날짜 : 2015-09-01 (화) 10:36:58 #qr_code_layer { display:none; position:absolute; background-color:#fff; border:2px solid #ccc; padding:10px; width:280px; } #qr_code_layer .qr_code_google ...

    뉴욕의 별난 ‘負褓商(부보상)
  • 칼날 위에 서다

    분단의 세월 70년을 지내오면서 우리 민족은 서로를 향해 칼을 품고 살아왔다. 위태로운 그 칼날 위에서 숨 죽이며 서 있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21일(금)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전방지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다음날인 22일(토) 오후 5시 30분까지 대북...

    칼날 위에 서다
  • 우리 말 속의 ‘일본말’

    광복 70주년이다. 간악한 일본이 조선을 병탐한 뒤 우리 민족을 능욕했던 35년의 시간이 두 번 지나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35년의 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은 엄청난 양의 ‘그들의 것’을 우리 강토에 심어놓았다. 창씨 개명을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했고, 신사참배로 황국신...

    우리 말 속의 ‘일본말’
  • 막말과 망언

    막말과 망언이 화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의 막말이, 한국에서는 대통령 동생의 망언이 온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다. 미국은 요즘 공화당 대선 경선에 나선 부동산 갑부 도널드 트럼프의 막말로 뜨겁다. ‘언론은 트럼프에 중독됐다’는 어느 분석가의 말처럼 하루도...

    막말과 망언
  • 일상화된 ‘피비린내’

    1492년 콜럼부스의 배가 카리브 해안에 닿은 것은 역사적인 실수였다. 이 실수를 미국 역사는 ‘위대한 신대륙의 발견’이라 부른다. 광활한 대지 위에서 목가적인 평온함을 영위했던 원주민들에게 탐욕 가득한 유럽인들의 침입은 재앙이었다. 평화롭던 원주민들의 땅에 ...

    일상화된 ‘피비린내’
  • 해킹정국

    바야흐로 해킹정국이다.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 의혹에 이어, 국정원이 대선을 목전에 둔 시점에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을 상대로 불법사찰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북 정보전을 위한 정당한 활동이었다.” 이병호...

    해킹정국
  • 호락호락하지 않은 깃발

    노예제도를 정당화 하기 위한 미국의 인종차별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가 해방된 지 15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현실 속에 건재해왔다. 그 상징이 남부연합기의 존속이었다. 그러나 21세의 어린 백인 우월주의자가 저지른 참극 이후 미국은 150여년의 세월...

    호락호락하지 않은 깃발
  • 민낯 뒤의 가면

    그리스 시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가면’을 썼다. 가면을 쓰는 순간, 배우 자신은 가면 뒤에 철저히 가려졌다. 맡은 배역의 인격만이 무대 위에 존재할 뿐이다. 고대의 연극이 가면을 사용한 이유는 배역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개의 가면을 쓰면...

    민낯 뒤의 가면
  • 모방과 표절

    스티브 잡스는 인류의 혁신을 이끌었다. 한 때 그를 가리켜 외계인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지구행성에 온 외계인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별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선보인다는 농담이 진담처럼 덧붙여졌다. “우리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부끄러...

    모방과 표절
  • 리플리 양성소

    알랭들롱이 열연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영국의 여류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별 볼일 없는 주인공이 재벌 아들인 친구를 죽인 후, 죽은 친구의 신분으로 위장해 새로운 삶을 산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이름도 ...

    리플리 양성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