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소곤이 칼럼니스트

 

 

AFC 박항서 - Copy.jpg

 

 

베트남에 ‘박항서 매직’이 뜨겁다. AFC(아시아축구연맹) 23세이하 대표팀이 베트남은 물론이고 동남아 최초로 4강에 이어 결승까지 도약했으니 사령탑을 맡은 박항서 감독의 열풍(熱風)이 불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은 지금으로부터 23년전인 94년에 한국기자협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문한 바 있다. 당시 인상적인 것은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굉장히 컸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베트남에 가기전에 70년대초까지 우리 국군이 월남에 파병돼 지금 베트남을 통일시킨 ‘월맹’ 정권과 싸운 과거사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우(杞憂)였다. 물론 이미 베트남과 국교수교도 되었고 우리가 방문한 도시가 월남정권때 ‘사이공’으로 불린 호치민이라 조금 다른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한국인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은 커녕, 아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같은 의문은 베트남에 오래 살던 분으로부터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베트남은 과거 한국이 적국이었지만 당신들의 파병은 미국의 강요(?)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전승국이다. 승자의 아량으로 관대하게 당신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전쟁당시 한국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민간인 피해자들은 원한이 남아 있지만 베트남 국민들은 대부분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억눌린 기분을 풀 수 있었다.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미국의 강요도 있었지만 박정희정권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베트남을 지키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파병했다. 알고보니 우리는 식민국가로부터 벗어나 당당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베트남 국민들의 열망을 잠재우는데 동원된 것이다. 그렇게 박정희는 수많은 젊은 군인들을 머나먼 남국에 보내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게 했다.

 

베트남전쟁 참전이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됐다고?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댓가로 얻은 엄청난 부를 상당 부분 스위스 비밀금고로 빼돌렸다는 것은 단지 낭설일까. 박정희정권의 죄과는 헤아릴수 없이 많지만 명분없는 월남전쟁에 파병해 참혹한 죽음의 광란(狂亂)에 빠뜨린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체류 이틀째, 호텔 주변에 밤산책을 나갔다. 어디선가 우렁찬 구령소리가 들렸다. 태권도 수련때 흔히 들리는 소리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찾아갔더니 그 밤에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수백명의 베트남사람들이 모여 태권도를 수련하는 것이었다.

 

너무 뿌듯했다. 아하 이거구나. 태권도가 당시 월남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퍼지면서 세월의 흐름속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한국의 국기인 태권도를 연마하다보면 한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뿐인가. 지금같은 한류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지만 베트남엔 한국 연예인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한국연예인이 등장한 LG전자 옥외광고판이 눈에 띄는 등 베트남은 동남아 한류의 전초기지(前哨基地) 역할을 했다.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베트남 국민들이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동남아축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70년대초만 해도 아시아 축구의 맹주는 한국과 함께 버마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 AFC 대회에 베트남이 동남아사상 첫 4강에 올랐다고 하지만 고작 두 번째 대회니 사상 처음이라는 말도 사실 어폐(語弊)가 있다. 80년대까지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과 태국의 킹스컵은 가장 권위있는 아시아의 양대 대회였고 두 나라가 자국 대회에서 우승한 일도 많으니 말이다.

 

물론 베트남은 그 시절 대회를 개최할만한 국력도 없었고 더할 수 없는 축구변방국이었다. 하지만 열기는 뜨거웠다. 그들은 특히 한국축구를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축구가 아시아의 자존심을 살려준다는 것이었다.

 

86년 멕시코월드컵에 이어 90년 이탈리아, 94년 미국월드컵에 연속 진출한 한국축구를 경외하며 한국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느낌마저 받았다. 한국은 94년 월드컵에서 강호 스페인과 다크호스 볼리비아와 비기고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후보 독일을 만났다. 세골을 연달아 먹었지만 두골을 만회하고 후반 20분은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놀라운 경기력으로 찬사를 받았다. 비록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역대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인 월드컵으로 평가된다.

 

그때 기억나는 외신이 월드컵에서 한국경기를 보면서 열광한 베트남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歡呼)했다는 것이었다. 남의 나라 월드컵 경기에 베트남 시민들이 저렇게 좋아한다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어쨌든 축구덕분에 한국의 이미지도 좋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방문은 며칠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감회를 남겼다. 전쟁이 끝난지 20년도 안된 시절이라 거리엔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우리가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은 것처럼 전쟁의 상흔이 동병상린으로 마음 아팠다.

 

돌아오기 전날 일행이 인력거를 탔는데 그중 한국인을 똑닮은 젊은이가 있었다. 한국전쟁중 누군가에 의해 태어났을 라이타이한. 비록 우리 말은 못했지만 잃어버린 조카를 만난듯한 뜨거운 감정에 우리 일행은 앞다퉈 그의 주머니에 팁을 넣어주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지만 자존심이 센 편이다, 한국처럼 베트남도 삼국시대의 역사가 있고 한국인처럼 손기술이 뛰어난 것 등 여러 공통점이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지난 20년간 농촌에서 신부감이 부족해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으로 가장 많이 시집왔으니 이젠 ‘사돈의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베트남에서 한국인 박항서 감독이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니 더욱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0년전 갓 축구기자가 되었을때 한 프로구단의 코치였던 그를 만났다. 수더분하고 붙임성 좋은 경상도 사나이였다. 지금도 머리가 없지만 젊은 시절에도 탈모가 일찍 와서 시원한 민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당시 같은 팀에 정해성과 김현태가 고참선수여서 역시 친하게 지냈는데 훗날 히딩크 사단에 이들이 나란히 수석코치와 코치, GK코치로 한팀이 되는 것을 보고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당시 히딩크 사단은 학연과 지연, 부패고리 등 한국축구의 적폐(積幣)를 끊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학연, 지연에서 자유로운 히딩크가 아니었다면 박지성같은 선수가 선발되어 중요 포지션을 맡기 힘들었을 것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선수관리에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덕분에 한국축구는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축구는 히딩크가 돌아가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이번 AFC축구는 베트남축구에게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한국축구 역시 ‘히딩크 매직’을 계승해 보란 듯 결실을 꽃피우는 ‘박항서 매직’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선진축구로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적어도 앞으로 10년간은 히딩크와 같은 유능하고 통찰력있는 외국인 지도자들을 초빙해 대표팀 지휘봉을 맡김으로써 국내의 잘못된 관행(慣行)을 원천봉쇄해야 한다. 선수들의 어린 시절 큰 영향을 미치는 유소년과 청소년팀의 코치들을 순회 지도할 수 있는 외국인 지도자나 한국계 지도자들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축구협회이다. ‘밥그릇 챙기기’에 골몰하는 ‘그들만의 협회’는 사라져야 한다. 한국축구의 비전을 제대로 갖춘 역량있는 새로운 수장(首長)이 나와 체질 개선과 과감한 개혁을 해야 한다. 선수로서의 명성만 있고 지도자나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없는 지도자들을 물리치고 축구를 잘 아는 외부 전문가들을 영입해야 한다.

 

축구는 누가 뭐래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다. 2002월드컵에서 경험했듯이 국민적 사기를 고양(高揚)하고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특별한 스포츠다. ‘박항서 매직’을 통해 한국 축구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지혜가 생겨났으면 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소곤이의 세상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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