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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게 최대의 복수이다. 

핏 속에 응축된 한풀이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이민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나가야……

 

 

벌써 26년 전의 일이다. 1992년 말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보고 승가사 쪽으로 내려오는데 젊은 아가씨들의 창(唱)소리가 산속에서 들려왔다. 장구와 북소리가 곁들여져 산 속에서 메아리쳤다. 

 

가까이 가서 보니 견습생 같이 보이는 소녀들이었는데 목청을 최대한으로 돋구어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고음에서는 소리가 막히기도 하였고 그럴때면 다시 시작해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흥부가, 춘향전, 심청전 등 판소리 가락에는 다분히 한(恨)을 내뿜는 가락이 담겨져 있다.

 

우리네 조선 여인들은 고된 시집살이에, 가난에, 가렴주구(茄斂誅求)에, 거기에 더하여 침략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수탈 행위에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고려가 100여년에 걸쳐 몽고의 지배를 받을 때 갖은 박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조선왕조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에 끌려간 우리 아녀자들이 갖은 고초를 당하고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환향년(還鄕년-화냥년)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했다. 

 

가까이 일제 치하에선 어린 소녀들이 전쟁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 노릇을 강요당하고 살았다. 위안부 문제는 현재까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서러움을 한 맺힌 창으로 내뿜어 일종의 카다르시스(Catharsis)를 맛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씩씩한 기상을 발휘해야할 터인데 한풀이식 창법, 그것도 어린 소녀들이 읊어댈 때 (물론 우리 가락을 계승해야겠지만)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해 크리스마스 성탄 전야미사에 참여했을 때는 전혀 새로운 감흥을 맛보았다. 새로 나온 국악 성가로 찬양미사를 드리는데 가락이 매우 흥겨웠고 장구와 북의 장단에 맞춰 나오는 성가대의 찬송 노래는 저절로 덩실 덩실 춤이라도 나올 것 같은 리듬이었다. 

 

미사에 참여한 1,000여명의 신자와 함께 부르는「주의 기도」노래와 함께 모두는 한 마음,한 뜻이 되었다. 아마 태어나시는 아기예수님도 흥겨워서 덩실덩실 춤을 추실 것 같았다.

 

1993년 당시로서는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영화 서편제(西便制)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영화 감상이나 할 생각으로 마침 김영삼 대통령도 감상했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상했다는 한국 영화『서편제』를 제의했다. 

 

그런데 환영할 줄 알았던 20대 초반의 두 딸이 동의를 하지 않아서 결국 아내와 둘이서만 감상하게 되었다. 판소리의 맥을 잇기 위한한 범부(凡夫)의 초인적인 의지가 한국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펼쳐질 때 그것은 한편의 서사시(敍事詩)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서 가슴 속을 적셔오는 짙은 여운과 함께 짜증과 분노가 또한 치밀어 옴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바로 우리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성 싶다. 나이든 사람은 향수에 젖어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상적(感傷的) 느낌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 한민족의 운명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철저히 짓밟히고 설움을 당하고, 또 어디론가 끌려 다니기만 하면서 질기고 질긴 인생역정을 살아온 우리 한민족! 

 

완벽한 패배주의가 지배하는 주인공 송화(松花)의 운명! 바로 이러한 점이 나를 역겹게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언제까지나 남의 종속물로써 수탈만 강요당하며 살아간단 말인가? 과연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연약하고 무능하기만 한(恨)많은 한민족(恨民族)이란 말인가?

 

우리는 빨리 우리의 한민족(韓民族)의 동질성(Identity)을 찾아야한다. 작금의 한반도 분위기는 우리가 이민 올 때 1990년대의 상황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남북 간 긴장은 더욱 강화되어가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도 우리들끼리의 이념갈등이나 체제 갈등은 더욱 심회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한 문화, 사회적으로 자신감을 잃은 채 표류한다면 송화의 운명처럼 처량한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핏 속에는 고구려의 기상이 숨 쉬고 있다. 대륙을 향해, 대양을 향해 기상을 펼칠 때이다. 광개토 대왕이 만주 대륙을 향해서 포효하고, 을지문덕, 연개소문이 침략군을 여지없이 밀쳐버리듯,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서야한다.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냐, 아니면 역사의 노예가 될 것이냐’에 대해서 다 같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중국은 자기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서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들 소수 민족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획책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책이 없는 실정이다.

 

한을 가슴 속에 품고만 있으면 독이 되어 인간을 파멸 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한을 복수심에 불타 앙갚음함으로서 풀려고 한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결과만 초래할 따름이다. 

 

과거 한국의 무속문화에서 무당은 한을 풀어주고 신바람을 돋우어 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보여준 맹렬한 추진력은 가난과 전쟁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한풀이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한풀이가 신바람으로 이어질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 때 붉은 악마의 함성이나 2016년 말 천 만 촛불 시위는 이러한 집단 에너지가 표출된 것이다.

 

잘 사는 게 최대의 복수이다. 현재 뉴질랜드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3만4천 여 한인들은 고국에서의 한을 태평양 바다에서 씻어버리고 왔다. 핏 속에 응축된 한풀이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나가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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