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편한 바지’ 주름진 나일론 천에 알록달록 꽃무늬가 요란스럽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바지라고 ‘라벨’이 붙은 몸빼 바지다.

 

말 그대로 편하기로 치면 그보다 더 편한 바지는 없을 것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 시골에서 농삿일하는 주부들, 고깃배 타고 나가는 여인들도 한결같이 그 바지를 입었다. 일하면서 더러움이 묻어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물이 묻어도 툭툭 털면 금방 마른다. 얼룩자국도 있을리 없다. 여인들의 작업복으로 사랑받는 몸빼 바지. 그렇더라도 꽃무늬로 아줌마 패션의 질을 한껏 높여 놓았다.

 

이번 ‘무지개 시니어 합창단’ 공연에 특별히 입을 일이 있었다. 동대문 시장 몸빼 바지가 비행기에 실려 왔다. 출세(?)의 기회를 얻어 선택받은 꽃바지들이었다. 20벌 각양각색의 꽃들이 입어 줄 주인을 찾아갔다. 무대가 한 때 그 꽃밭으로 화려해졌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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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의 ‘텔미’가 망가졌는지 더 돋보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작업복이 아닌 댄스 의상으로 무대까지 오른 ‘몸빼바지’.

 

‘뫼산이’ 아저씨가 매일처럼 한짐씩 검은 천을 지고 왔다. 거칠고 뻣뻣한 마대천이었다. 축축한 그것을 만지면 손에 검은 물이 들었다. 무슨 말을 시작하려면 뫼산이가 먼저 들어가는 사십대쯤의 남자.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왔다는데 함경도 인지 평안도인지 알 수 없는 뫼산이를 많이 썼다. 우리는 뫼산이 아저씨라고 불렀고 어른들은 그 사람 뫼산이라고 호칭했다. 아마도 구호물자를 담아온 마대일 것이다. 그것을 어디서  그리 많이 수집을 해 오는지 그게 뫼산이의 수완이었다.

 

그 짐이 마루바닥에 가득하면 우리 식구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반쯤만 마른 천을 서너장씩 겹쳐서 다듬이돌 위에 놓고 다듬이질을 했다. 그러면 거칠고 뻣뻣하던 천에 올이 박히고 반들하니 다림질한 것처럼 되면서 자연스럽게 말라 제법 천으로서의 구실을 했다. 먼저 익숙해진 솜씨로 아버지가 마름개질을 해 놓으면 엄마는 그걸 미싱으로 박아냈다. 그 시절 몸빼바지 가내 제품공장이었던 것이다. 하루 수십벌씩 손틀 미싱으로 새까만 천과 씨름을 했다. 검둥이 손으로 밥을 퍼주면 엄마 깜둥이 되었다고 철부지 동생들은 놀렸다.

 

종전후 피난지에서 돌아와 목구멍에 풀칠하려면 무엇이든지 해야했다. 엄마는 힘들어 하기보단 뫼산이를 만난게 큰 다행이라고 말했다. 뫼산이 맘에 들게 하려고 성의를 다하는 우리 엄마. 누구보다 얌전한 제품을 만들어내서 언제나 일이 많았다. 엄마가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피난둥이 막내동생 젖 물릴 틈도 없는 것이었다. 아이를 무릎에 눕히고 미싱을 돌렸다. 그때는 손틀을 거의가 썼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젖 한모금 얻어 먹고 배가 부르면 아이는 재롱을 떨었다.

 

“달달달달...”

엄마가 돌리는 손동작을 흉내내어 제 손을 마구 돌린다. 누군가가 옆에서 “달달달달..” 해주면 더욱 신이나서 돌리곤 했다. 어느새 아이의 이름은 달달이가 되어버렸다. 근처에 사는 이모님이 가끔씩 와서 아이를 돌봐주곤 했다.

“달달이 좀 해 봐”

아이는 신이 나서 손을 돌려 어른들을 웃겼다. 막내동생은 그렇게 이름이 달달이로 바껴버린 시절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한강을 못건너 임시 마련한 거처였다. 엄마는 어디서 다듬이 돌을 구해 왔을까? 지금까지 알 수 없는 숙제로 남아있다. 다행스럽게도 미싱은 우리의 것이었다. 1.4후퇴때 아버지는 17살 오빠와 함께 자전거 두 대로 짐을 날랐다.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을 지나서 지금의 ‘의왕’으로 피난지를 정했다. 먼 친척이 사는 그 곳은 깊은 산골짜기 마을이었다. 강만 건너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엔 그 곳에서도 피난을 나갔지만...

 

엄마는 과년한 맏딸. 언니 혼수에 엄청 신경을 썼다. 틈만 나면 누우런 깃광목을 필로 떠다가 강에 나가 물에 적셔서 뚝에 널었다. 하얗게 표백을 해서 옥양목을 만들었다. 그 짐까지... 미싱은 물론.

인민군들이 후퇴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살상을 당했다. 다행이 집은 무사해서 건져진 미싱이었다. 전쟁통에 남은게 뭐 그리 있겠는가. 피난지에서 돌아와 입을 거리도  마땅찮은 세상이었다. 거리에 시커먼 몸빼바지가 넘쳐났다. 편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이 많아 밤을 세우는 때도 자주 있어서 식구들은 엄마를 많이 걱정했다. 무서운 투지로 가족을 지탱하는 엄마가 너무나 대단했다. 어린 마음에도 전쟁전의 엄마를 생각하며 울먹였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뫼산이’ 아저씨는 돈을 왕창 벌어서 큰 부자가 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북에서 혼자 내려와 홀아비로 살았다. 이젠 괜찮은 처녀 장가 간다고 선을 보러 다닌다고도 했다. 스물두살 얼굴 화사하게 핀 울언니. 은근히 눈독들이는 눈치에 어머니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깟일 안하고 말지. 딸은 못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누군가가 전한 모양이었다. 잘 지켜낸 언니는 그 다음해 형부와 결혼을 했다.

 

사실 몸빼라는 이름은 일본말이다. 일본에서 일하기 편한 복장으로 먼저 나온 옷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바지를 붙여 우리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때 만든 몸빼바지는 밑에 주름을 몇개 넣고 단을 댔던 것으로 생각한다. 마대의 뻣뻣함을 다리미로 줄을 세워 멋을 내서 외출복으로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새까맣게 물이 들어버린 다듬이돌. 손톱밑이 늘 까매서 어딜 맘대로 외출도 못했던 오랜동안의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들 깡수수밥으로 연명해 갈때 우리는 그 덕으로 흰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마 언니 시집갈 때쯤 엄마는 그 일을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언니 혼수 바느질에 검정물이라도 들을까봐 그러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피난보따리에 지고 다녔던 귀중한 천에 행여 손때라도 묻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태어나려면 맏이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못느꼈다. 내가 결혼할 땐 언니때보다 어머니의 정성이 너무나 소홀한것 같아 많이 섭섭했었기에....ㅋㅋ

 

막내로 태어난 달달이는 이 세상에 지금 없다. 전쟁통에 태어나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라서였을까? 아니면 그 못된 마대 먼지를 어려서 너무 많이 마셔버린 탓일까? 순서도 잊은채 위로 누님들 형님들. 다 젖히고 먼저 저 세상 가 버렸다.

“달달달달...” 어린애로 재롱떨던 동생. 그 때는 웃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서글픈 기억으로 맘이 아프다.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 그 암울했던 시대를 정서로 그려내는 나는 진정 바보일까?

물들인 마대천에 시커먼스로 보낸 우리세대의 청춘이 너무 억울하고 아깝다.

 

칼럼니스트 오 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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