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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소식을 접하고 피난길에서 서울로 되돌아오던 때였다. 한강을 코앞에 두고 노량진에서 길이 막혀 버렸다. 강을 건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겠지. 생각하고 그 곳에서 임시 집을 얻어 짐을 풀었다. 사는집 길 건너편 국민학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매일 군용차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어떤 신분인지는 모르지만 도강증(渡江證)을 가지고 강을 건너다니는 그들이 부럽기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앞길엔 사람들 대열로 부산스러웠다. 관악산으로 나무하러 가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었다.

 

언니와 나도 엄마가 싸주는 주먹밥 한덩어리씩을 들고 그들 속에 섞였다. 피난길 걷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폭격이 없어 편하게 걷는다는 것 뿐. 삭정이 몇개 묶어서 지고 돌아올 때면 등이 아파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어느날, 톱질하는 사람 옆을 지나다가 톱밥이 눈에 들어갔다. 눈은 아펐지만 어쩔수 없이 쉬게 된 휴가는 반가웠다. 눈물 질질 흐르는 눈을 한손으로 가리고 단단히 작정을 했다. 

 

깔끔하게 옷을 바꿔입고 식구들 몰래 빠져나와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무작정 사람들 대열에 줄을 섰다. 

 

“도강증 아니 학생증? 없으면 빨리 저리 비켜나” 
총대를 멘 군인 아저씨가 사정없이 밀어냈다. 번번히 거절을 당하면서도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끈 질기게 가고 또 갔다.

 

“아저씨 학교에 가서 등록 하려구요!” 
그 날의 당번 아저씨는 맘씨가 좋아보였다. 왠지 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방긋 애교섞인 미소를 날렸다. 

 

“학생 조심해서 타라구!” 
(와! 드디어 성공이다) 허락이 떨어지자 정신없이 차에 올랐다. 군용트럭보다 낮은 스리쿼터였다. 참 오랫만에 달리는 차를 타본다는 사실조차 흥분이었다. 흉칙한 모습으로 폭파된 한강대교 옆으로 임시 부교(浮橋)가 떠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 서울로 달렸다. 강바람이 시원했다. 기분이 너무 멋졌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도시. 서울은 적막하고 쓸쓸했다. 먼저 학교를 찾아갔다. 교무실에 선생님 한 분이 방을 지키는 그런 분위기였다. 학적부를 찾아보고 삼학년 학생증을 발부해 주었다. 

 

중학교 일학년 입학해서 3개월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2년 공부는 전쟁터가 대신해 준 것일까? 

 

학생증을 받아들고 개선 장군처럼 강을 건너 집에 돌아왔다. 이제나 저제나 등록금을 마련해서 학교에 보내주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전쟁후 무질서와 혼돈속에서 먹고살기만도 힘드는데 학교라니... 더구나 아들만 선호하는 엄마에게 늘 별난 계집애였을 뿐이잖은가. 

 

어느날 엄마가 묵직한 철통을 하나 건넸다. 그걸 가지고 강 건너 집에가서 간장을 담아오라는 심부름이었다. 

 

어디서 얻어왔는지 그것은 빈통만도 무거운 탄약통이었다. 너무 야속해서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 았다.

 

“시건방지게 학생증을 만들어 올 때부터 알아봤어... 빨리가라 차 놓친다”오빠의 빈정거림이었다.

겁은 났지만 맘 한구석에서 오기같은게 꿈틀댔다. 아마 자부심일수도 있었다. 나만 강을 건널수 있다는... 

 

책가방 아닌 탄약통을 들고 강을 건넜다. 용산에서 마포 용강동까지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동안 비워둔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길을 걷기 지루해서 기찻길로 올라섰다. 깡충걸음으로 침목을 세어가며 심심함을 달랬다. 레일에 올라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곡예도 즐겼다. 보는이도 훼방꾼 기차도 없으니 혼자의 세상이 자유로웠다. 쫓기고 숨으면서 지냈던 피난생활을 돌이켜보며 이 자유로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 는 전쟁같은거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도 전쟁이 있었던가? 물음에 선로 틈에 핀 작은 풀꽃들이 대답해주었다.(주인 잃은 기찻길을 우리가 지킨단다) 

 

기찻길을 빠져 도화동을 향했다. 썰렁한 도화극장에 옛날 공연간판이 삐딱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옆골목 대중목욕탕의 벽돌굴뚝이 을씨년스럽다. 목욕가방을 들고 입구로 들어가는 우리 가족들이 그려졌다. 

 

마포 전찻길을 건너 심목서 벌판을 걸었다. 언제나 시커멓게 석탄먼지로 발등을 덮었었던 길. 그 길 양켠에 시퍼렇게 너울거리던 무 배추가 없어서 황량했다. 벌판 끝자락에서 동네입구로 접어들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우리집이 빤히 바라다보였다. 마당에서 낮은 담장너머로 온동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축대높은 집. 큰 우물거리를 지나서 작은 골목길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이제 다 왔구나 큰 숨을 내쉬는데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어머나 너 진영이 아니냐?” 
얼굴을 들고 어른을 쳐다보는 순간. 멈칫 한발이 뒤로 물러났다. 유령인가? 실성한 사람? 머리끝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자세히보니 익숙한 인상이긴한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웃 친구 경자 엄마인걸 알고 너무 놀랬다.

 

 “우리식구는 폭격맞아 다 죽고 나만 이 꼴로 살아남았는데, 너희는 괜찮으냐?”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것 같았다. 한쪽팔의 빈 옷이 맥없이 흔들거렸다. 경자두요?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가족을 다 잃고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그녀는 큰 무당이었다. 울긋불긋 화려한 무복(巫服)을 입고 대동굿을 할 때면 동네사람들이 그 집으로 구경을 갔다. 장구 피리소리에 신이올라 대청 마루를 뛰면 마루가 꽉 찼었다. 경자는 갖고 싶은것 다 갖고 늘 우쭐대며 살던 그 집 딸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집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무거운 정적이 너무 두려웠다. 대문 손잡이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손등으로 쓸어냈다. 살며시 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하루빨리 와서 편히 살고픈 집이었것만 어깨를 짓누르는 정적이 싫었다. 부엌으로 성큼 들어섰다. 엄마가 가르켜준대로 문 옆에 묻힌 커다란 독. 둥근 나무 뚜껑을 쓰윽 밀었다. 

 

“엄마야....”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나딩굴었다. 옴싹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금방 죽을것만 같았다. 오싹 소름이 돋고 벌벌 떨리기만 했다.(경자 귀신일거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용기를 내서 독 앞으로 갔다 조심스럽게 독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득찬 간장물 위로 내 모습을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바로 그거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침착하게 독 안에서 조랑바가지를 찾아들었다. 

 

낑낑대며 집에 들어서는 순간 엄마는 칭찬은커녕 크게 화를 냈다. 

 

“몹쓸것 그냥 해 본 말인데... 그 먼 델 다녀오느라고 이제야 왔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많았나보다. 후회인들 안했을까? 분에 넘치게 칭찬을 많이 받은 날이었다. 나무하러 가기 싫은 날은 특별한 휴가처럼 탄약통을 챙겼다. 우아하게 학생증 내밀고 차를 타는 것도 혼자의 특권같아 자랑하고 싶었다. 어린 소녀의 작은 영웅심이었을까? 

 

시커먼 고무 풍선으로 만들어진 다리도 신기했다. 그 다리를 씽씽 달리며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갔다. 그 학생증은 소금국 대신 간장국으로 식구들 입맛을 호강시켰다. 그 뿐. 학교와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소녀의 사춘기는 그렇게 칙칙한 추억만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칼럼니스트 오 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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