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익숙해질만큼 살았것만. 지금이 5월 이란게 실감나질 않는다. 햇 밤도 먹었고 붉은 감도 풍성하니 가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 느낌은 10월이 딱 맞다.

 

바야흐로 단풍마져 헐거워진 겨울의 문턱에서 어버이 날, 가정의 달도 맞았다. 내 머릿속의 5월은 만화방창(萬花芳暢) 꽃 꿈으로 가득차 있는데 말이다. 언제쯤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시야에 들어오는 나무들이 썰렁하고 춥다. 잎을 다 떨구고 헐벗은 모습이 왠지 안쓰럽다. 내 인생을 닮은 것 같아서일까?

 

의연히 버티고 서 있는 나무는 아무런 내색을 않는다. 조용히 내년을, 또 내년을 기다린다.

 

인생도 그렇게 나무를 닮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나라에 살면서 영어말고 두번째로 두려운게 내겐 추위로 꼽힌다. 겨울이야 당연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게 봄 추위다. 한국에서도 봄 바람은 첩의 바람이라고 말한다. 품 속 깊이 파고 든다고 해서 만든 말이다. 재미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기분좋은 말은 아니다.

 

옷속으로 파고드는 봄바람은 춥다못해 뼛속까지 시리고 아프다. 봄 마중을 하려면 노인들은 한바탕 홍역같은 꽃샘추위를 견뎌내야만 한다. 특별한 시련이기도 하다.

 

추워 추워 하면, 떠 오르는 잊지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생각만 해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

 

10월 이었으니 그 때도 봄 추위였을께다. 한국에서 뉴질랜드를 처음 방문하던 때였다. 여행사를 통해 패키지로 ‘로토루아’ 투어를 곁드린 여행이었다. 한밤중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바로 숙소인 모텔로 향했다. 지금 보니까 경마장 부근의 낮은 건물이었다. 외톨이인 나는 한국에서부터 따라 온 가이드 아가씨와 한 방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속이 점점 차가워져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추위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일까? 놀래기도 했다. 옆 침대의 아가씨도 잠 못들고 뒤척이는 눈치였다.

 

“아가씨 너무춥지. 이리와서 같이자면 좀 났겠지”

 

아가씨가 서슴없이 내 침대로 들어왔다. 그 쪽 시트까지 끌어다가 함께 덮었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며 잠을 청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오라는 딸 아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른 새벽 침대를 걷어차고 내려왔다. 샤워실로 뛰쳐나와 욕조에 더운 물을 한가득 받았다. 거기 들어 앉아서 얼었던 몸을 녹였다.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이었다.

 

가이드에게 원망조로 한마디 했다. 밤에 얼어죽는 줄 알았다고 투정을 했다.

 

“어이구 있을게 다 있는데 사용할 줄을 모르셨군요. 죄송합니다. 알려드릴걸...”

 

한 방 쓰는 가이드를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처음 오는 해외 출장이었는지 나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도저히 이 나라에선 못 살 것만 같았다.

 

아이들 집에 도착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이들이 죽는다고 웃어댔다.

 

바보짓 했던걸 말이나 말껄... 

 

뉴질랜드는 그렇게 나를 형편없는 바보로 만들면서 맞아주었다.

 

한 여름을 착각하게 하는 불볕속의 겨울 낮은 지낼만 하다. 해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섭게 찬 공기가 몰려든다. 어쩌면 그리도 낮과 다르게 모습을 달리 하는지? 변심해서 토라진 애인의 마음같이 한 여름에도 매몰차게 싸늘하다.   

 

눈내리고 얼음 얼지 않아도 춥다는 말을 달고 사는 허약한 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강도가 점점 더 해 가는걸 느낀다.

 

지난 봄이었다. 친구와 만남의 약속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버스 시간을 맞추려면 허둥대기 일쑤였다. 무슨 버릇인지 여유있게 준비를 하다가도 그 시간에는 언제나 쫓긴다. 중간에 쓰잘데 없는 다른 일들이 끼어들기 때문이었다. 신발을 마음대로 골라신지 못하고 뛰어나가는 일이 허다하다.

 

실내를 따뜻하게 해 놓았으니 바깥바람은 헤아리지 못했다. 날씨가 포근한줄 알았는데 밖에 나오니 아니었다. (옷을 잘못 입었네)들어가 다시 입을 시간도 없었다. 낮엔 괜찮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조금 참기로 했다.

 

버스에 오르니 냉장고 안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덥지도 않은데 왜 그리 에어컨을 틀어대는지 알 수가 없다. 30분을 웅크리고 참아냈다. 다시 바꿔 탄 차는 그보다 좀 더 냉기가 강했다. 또 다시 30분. 차에서 내릴 때는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시간은 이른편이었다. 쇼핑몰로 뛰어들어가 세면기에 더운물을 받고 손을 담궜다. 아주 조금 나아졌지만 등줄기로 찬물을 끼얹는 것은 여전했다. 이대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다급했다. 감기 몸살에 틀림없이 병이 날 것만 같았다.

어쩌지?... 방법을 찾기로 했다.

 

쇼핑센터 안의 옷 가게를 뒤졌다. 등을 덮어줄 조끼같은 걸 찾았다. 나만 춥지. 하늘하늘한 여름 옷들만 걸려 있었다. 이 좋은 봄날에 꽃샘추위를 못견뎌 헤매는 늙은이. 어느 젊은이가 내 사정을 알았다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알량한 자존심이 꿈틀댔지만 자존심이 추위를 달래주진 않았다.

 

bd81f130376428ece87e18cd1c4c37d3_1558994
 

쇼핑몰을 뛰쳐나와 2달라 가게로 들어가서 둘러봤다. 머풀러가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반가웠다. 컬러고 뭐고 안중에 없었다. 그 중에서 폭이 제일 넓은 것으로 골라서 값을 치뤘다. 5불이었다. 아마 50불이라도 샀을거다. 그 자리에서 긴 걸 반으로 접고 대각선으로 한번 더 접어 네 겹의 삼각형을 만들었다. 윗 옷을 벗고 등에 둘렀다.

 

(아! 이제 살았다) 가계주인이 은인같아 고맙다는 인사까지 날렸다.

 

그 날 친구와 만남의 주제는 그 머풀러 이야기부터 시작이 되었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하니 좀 전의 고생을 금방 잊어버렸다. 고행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던가.

 

가늘게 긴 것부터 다양하게 집에 걸려있는 머풀러가 꽤나 많다. 그 옛날 친구가 직접 천 끊어다가 박아서 만들어 준 것들은 그의 손 정이 그리워 버리지 못한다. 누군가가 선물 해 준 것들. 하나 하나의 사연과 추억이 묻어있어 그대로 다 가지고 있다. 아마 내가 돈 주고 산 것은 가장 시원찮은 5불짜리 그 머풀러가 아닌가싶다. 색상이 화려하지도 않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 싸구려가 왜 지금까지 그렇게 내게 사랑받는 것이 되었는지? 다양하게 고를 것도 없었지만 급해서 아무렇게나 집어들은 것 아니었던가. 못난 자식 덕본다는 말이 꼭 맞다. 그 머풀러가 지금까지 너무 효도를 한다.

 

우선 옷에 착 붙어서 흘러내리지가 않는다. 질감이 가볍고 포근해서 조끼 입는 것 보다 따뜻했다.

첩첩이 개어서 백 한귀퉁이에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이제 옷을 허술히 입고 나가도 걱정이 없다.

 

5불의 가치가 이렇게 대단한지 몰랐다. 이번 겨울에도 그것의 덕을 착실히 볼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물건이든 그 것의 가치를 따질 때 절대로 값을 먼저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 참 좋은 교훈이었다.

 

 

칼럼니스트 오 소영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포커스] 다시 고개 드는 인종차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인종차별 행위도 급증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 행위가 크게 늘어 경제 침체와 실업 증가를 가져온 코로나19의 발원지가 중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총선을 앞...

  • 인간과 전염병의 싸움, 최후의 승자는

    ▲ 밀라노 두오모 광장을 지키는 무장 군인들​   ‘코로나 19’바이러스로 뉴질랜드는 물론 지구촌 전체가 그야말로  초대형 재난을 맞아 시련을 겪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언론에는 ‘코로나 19’와 관련된 정보와 뉴스들로 넘쳐나고 TV를 통해서는 사망자가 폭증하...

  • ‘불의 땅’ 뉴질랜드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에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큰 재난이  지구촌 주민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12월 9일(월) 오후에 발생한 화카아리/화이트(Whakaari/White)섬 화산 폭발로 일주일이 지난 16일(월) 현재까지 공식 사망자 16명에 사망으로 추정되는 실종자가 2...

  • 해 뜨면 일어난다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고, 식물은 태양없이 살아 갈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언제 들어도 멋진 표현이다. 아마도 태양이 식물의 자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간파해서 생긴 말로 여겨진다.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전적으로 태...

  • 가장 파워풀한 마음의 응원

    간간히 저렴한 밥상메뉴를 SNS 올리다 보니 이것저것 물어오시는 분들이 많아지는데요. 가장 많은 질문이 어떻게 일주일 식비를 100불 언저리에 맞춰서 다양한 메뉴들을 만드는게 가능하냐는 문의들이 많으세요. 오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여기서 100불이란 순수한 요리재...

  • 이민자 시선으로 본 영화 ‘기생충’, 냄새와 선을 넘는 것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칸느영화제 최고대상을 수상해서가 아니어도 평소 봉준호 감독을 좋아하기 때문에 바쁜 한국방문 일정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관람을 했다.  결국 두번을 관람했으니 나름대로 팬심을 발휘한 셈이다.      봉감독이 인터뷰에서 ‘이 ...

  • 주식투자, 100배의 결실도 가능하다

    무궁화 펀드 주식, 6개월만에 22% 성장      “오빠 오빠! 시청에서 새로 Valuation 이 왔는데 글쎄 우리집이 100만불이래! 어머머 20만불이나 올랐네”“자기야 너무 좋아하지 마. 뭐 우리집만 올랐나? 다른 집들도 다 오른 걸! 세금 더 내라는 거지 뭐. 그 20만불이 통장...

  • 유출 파문에 묻힌 ‘웰빙 예산’

    정부는 올해 예산안을 공개하면서 세계 최초의 ‘웰빙 예산’이라고 강조했다.  해외 언론들에서도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며 관심있게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국내 언론의 가장 큰 뉴스거리는 웰빙 예산 내용들보다는  공식 발표전 벌어진 예산안 유출이었다.  ...

  • 지구를 위협하는 플라스틱

      ▲ 목장에 등장한 플라스틱 울타리 기둥​   만약 인류에게 ‘플라스틱(plastic)’ 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어땠을까?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이미 인류에게 플라스틱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편리한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

  • 6월, 겨울꽃이 더 고운 이유

    6월.“내가 이렇다구...”   5월의 바톤을 넘겨받은 첫날부터 무섭게 엄포를 놓으며 달겨들었다. 사나운 돌풍과 더불어 기세가 대단했다. 매일 비를 뿌린다. 종잡을 수 없는 변덕 날씨에 몸이 갈피를 못 잡는다. 무디게 천천히 오면 적응할 준비가 되련만, 위세에 눌린 노...

  • 행복으로 가는 여섯 번째 단계

    계속해서 앤서니 그란트 교수의 ‘행복한 호주 만들기’ 심리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설정한 행복으로 가는 첫번째 단계는 목표와 가치를 찾는 것, 두번째 단계는 무작위로 친절을 베푸는 것, 세번째 단계는 ‘마음 챙김’을 생활화하는 것, 네번째 단계는 강점...

  • 당신의 장미는 안녕하신지요?

      오클랜드는 많은 가정에서 장미를 키운다. 아랫길 할머니는 앞벽에 빨간 장미를 곱게 올렸다. 매년 아주 탐스런 붉은 장미가 나에게 까지 인사를 건넨다. 마을 한복판 미장원의 분홍색 장미는 잘 다듬어진 가든과 멋지게 어울린다. 여주인은 머리 손질이 본업이지만 ...

  • 외부고사 비중 늘어날 NCEA

    교육부가 고등학교 학력 평가 제도인 NCEA(National Certificate of Educational Achievement)의 내부평가 비중을 줄이고 외부고사 비중을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외부고사에  더욱 치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행된 지 17년 만에 가장 대폭적인 NCEA 변화...

  • 해외 한인회의 수난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현재의 인천)에서는 한국 역사상 첫 공식 이민선이 미지의 땅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이 때는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사람이나 눈물이 앞을 가려 제물포항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일본 고오베(神戶)에 들러 신체검사를 받고 건강한 한인 101...

  • 나폴레옹 - 2019년

    저희 부부의 단골 카페는 ‘Browns Bay’ 바닷가에 있습니다. 직접 바다를 내려다 보며 조망할 수 있는 고급 카페는 아니지만 프랑스 전통 빵과 디저트를 즐기며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소박한 프랑스식 카페입니다. 평범하고 토속적인 내부 인테리어도 당연히 프랑스에 관...

  • 5불 효도

    이제 익숙해질만큼 살았것만. 지금이 5월 이란게 실감나질 않는다. 햇 밤도 먹었고 붉은 감도 풍성하니 가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 느낌은 10월이 딱 맞다.   바야흐로 단풍마져 헐거워진 겨울의 문턱에서 어버이 날, 가정의 달도 맞았다. 내 머릿속의 5월은 만화방창...

  • 남섬에는 정말 흑표범이 살까?

      지난 몇 년 동안 남섬 일원에서는 외형은 고양이로 보이지만 야생 고양이보다는 체구가 훨씬 큰 정체 모를 동물에 대한 목격담이 여러 차례 전해졌다.    지난 4월에도 이 같은 목격담이 2차례나 국내 언론에 잇달아 소개됐는데,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관련 뉴스를 지...

  • 사상 최저의 기준금리

    뉴질랜드 기준금리가 역대 최저 수준인 1.5%로 인하됐다.  새로운 저금리 시대를 연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결정이 적절한 지에 대한 논란과 그 동안 경험하지 못한 최저 금리가 가져올 효과에 대해 알아본다.     기준금리 역대 최저1.5%로 인하   중앙은행은 지난 8...

  • 사람이 재산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시 두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하고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는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으며 한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빛을 보는듯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두 번 다 남측 정상이 북한을 방문하...

  • 잡종의 생존법칙

      와인의 품질은 포도 품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성에 크게 지배된다. 결국 품종이 같다면 재배지가 다르더라도 품질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품종이라도 수세기 동안 어떤 곳에서 재배된 특정 품종은 자연 돌연변이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