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6e395a072a81b4cd3f115bc7375cb_1518597

 

 

잘 사는 게 최대의 복수이다. 

핏 속에 응축된 한풀이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이민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나가야……

 

 

벌써 26년 전의 일이다. 1992년 말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보고 승가사 쪽으로 내려오는데 젊은 아가씨들의 창(唱)소리가 산속에서 들려왔다. 장구와 북소리가 곁들여져 산 속에서 메아리쳤다. 

 

가까이 가서 보니 견습생 같이 보이는 소녀들이었는데 목청을 최대한으로 돋구어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고음에서는 소리가 막히기도 하였고 그럴때면 다시 시작해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흥부가, 춘향전, 심청전 등 판소리 가락에는 다분히 한(恨)을 내뿜는 가락이 담겨져 있다.

 

우리네 조선 여인들은 고된 시집살이에, 가난에, 가렴주구(茄斂誅求)에, 거기에 더하여 침략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수탈 행위에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고려가 100여년에 걸쳐 몽고의 지배를 받을 때 갖은 박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조선왕조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에 끌려간 우리 아녀자들이 갖은 고초를 당하고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환향년(還鄕년-화냥년)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했다. 

 

가까이 일제 치하에선 어린 소녀들이 전쟁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 노릇을 강요당하고 살았다. 위안부 문제는 현재까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서러움을 한 맺힌 창으로 내뿜어 일종의 카다르시스(Catharsis)를 맛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씩씩한 기상을 발휘해야할 터인데 한풀이식 창법, 그것도 어린 소녀들이 읊어댈 때 (물론 우리 가락을 계승해야겠지만)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해 크리스마스 성탄 전야미사에 참여했을 때는 전혀 새로운 감흥을 맛보았다. 새로 나온 국악 성가로 찬양미사를 드리는데 가락이 매우 흥겨웠고 장구와 북의 장단에 맞춰 나오는 성가대의 찬송 노래는 저절로 덩실 덩실 춤이라도 나올 것 같은 리듬이었다. 

 

미사에 참여한 1,000여명의 신자와 함께 부르는「주의 기도」노래와 함께 모두는 한 마음,한 뜻이 되었다. 아마 태어나시는 아기예수님도 흥겨워서 덩실덩실 춤을 추실 것 같았다.

 

1993년 당시로서는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영화 서편제(西便制)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영화 감상이나 할 생각으로 마침 김영삼 대통령도 감상했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상했다는 한국 영화『서편제』를 제의했다. 

 

그런데 환영할 줄 알았던 20대 초반의 두 딸이 동의를 하지 않아서 결국 아내와 둘이서만 감상하게 되었다. 판소리의 맥을 잇기 위한한 범부(凡夫)의 초인적인 의지가 한국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펼쳐질 때 그것은 한편의 서사시(敍事詩)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서 가슴 속을 적셔오는 짙은 여운과 함께 짜증과 분노가 또한 치밀어 옴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바로 우리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성 싶다. 나이든 사람은 향수에 젖어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상적(感傷的) 느낌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 한민족의 운명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철저히 짓밟히고 설움을 당하고, 또 어디론가 끌려 다니기만 하면서 질기고 질긴 인생역정을 살아온 우리 한민족! 

 

완벽한 패배주의가 지배하는 주인공 송화(松花)의 운명! 바로 이러한 점이 나를 역겹게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언제까지나 남의 종속물로써 수탈만 강요당하며 살아간단 말인가? 과연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연약하고 무능하기만 한(恨)많은 한민족(恨民族)이란 말인가?

 

우리는 빨리 우리의 한민족(韓民族)의 동질성(Identity)을 찾아야한다. 작금의 한반도 분위기는 우리가 이민 올 때 1990년대의 상황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남북 간 긴장은 더욱 강화되어가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도 우리들끼리의 이념갈등이나 체제 갈등은 더욱 심회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한 문화, 사회적으로 자신감을 잃은 채 표류한다면 송화의 운명처럼 처량한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핏 속에는 고구려의 기상이 숨 쉬고 있다. 대륙을 향해, 대양을 향해 기상을 펼칠 때이다. 광개토 대왕이 만주 대륙을 향해서 포효하고, 을지문덕, 연개소문이 침략군을 여지없이 밀쳐버리듯,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서야한다.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냐, 아니면 역사의 노예가 될 것이냐’에 대해서 다 같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중국은 자기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서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들 소수 민족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획책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책이 없는 실정이다.

 

한을 가슴 속에 품고만 있으면 독이 되어 인간을 파멸 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한을 복수심에 불타 앙갚음함으로서 풀려고 한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결과만 초래할 따름이다. 

 

과거 한국의 무속문화에서 무당은 한을 풀어주고 신바람을 돋우어 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보여준 맹렬한 추진력은 가난과 전쟁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한풀이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한풀이가 신바람으로 이어질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 때 붉은 악마의 함성이나 2016년 말 천 만 촛불 시위는 이러한 집단 에너지가 표출된 것이다.

 

잘 사는 게 최대의 복수이다. 현재 뉴질랜드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3만4천 여 한인들은 고국에서의 한을 태평양 바다에서 씻어버리고 왔다. 핏 속에 응축된 한풀이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나가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한일수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NZ 부동산 지금 투자해야 하는 이유

      언제 우리의 경제가 호황이라고 즐거워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경제 관련 전문가들의 견해를 글이나 방송을 통해 보고 들을 때면 그들이 말하는 경기는 누구를 위한 경기일까? 늘 생각해 본다. 우리가 배운 자본주의 경제학은 그 즈음 부동산을 구매해야 한다고 ...

    NZ 부동산 지금 투자해야 하는 이유
  •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세상은 항상 정(正). 반(反). 합(合)의 과정을 순환하면서 발전해 나간다.   그리고 다시 이런 순환의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는 한 발짝씩 앞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우리 시대는 예전에 비해 스피드 또는 민첩성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었다. 시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 기회의 방학 2018

    이제 2018년을 정리하는 각 과정의 시험이 이미 끝났거나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11월 말.. 어떤 학생들은 이미 길고 긴 여름 방학에 들어갔을 테고 또 어떤 학생들은 마지막 시험을 위해 아직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테지요.   방학. 분명한 정의를 ...

    기회의 방학 2018
  • 당신의 연금은 안녕하십니까?

    (NZ, 한국, 호주, 미국의 연금 지급액과 안정성 비교)     ​    캘리포니아주 Camp Fire 와 Paradise 도처에서 일어난 산불이 인명과 재산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 그 전조였는지 모르지만 산불이 나기전 무수한 지진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시속 150km 속도로 달려오는...

    당신의 연금은 안녕하십니까?
  • 도벽(盜癖) Propensity for theft

      성적 쾌미(快味)만으로 따진다면 아내의 성적 가치는 항상 꼴찌다.   반면에 도둑질로 쾌감을 훔치는 짓은 대개 성품(性品)리스트의 일순위에 올라 있다. 성적 자극원으로서 아내의 가치란 정말 하찮다는 것이다. 아내는 공짜로 주는 팝콘 같은 안주라 그저 있으니까 ...

    도벽(盜癖) Propensity for theft
  • “텔미”야! 같이놀자, 우리가 뛰거든...

      “너도 날 좋아 할 줄은 몰랐었어 어쩌면 좋아 너무나 좋아...” 귀가 간지럽게 민망하고 깜찍한 노래다. 가사를 가려 듣기에도 번거로운 빠른 템포는 또 어떻고... 그 곡에 맞춰 콩튀듯 뛰는 신세대들의 율동이 상큼 발랄하다.      종잡을 수 없는 몸 동작을 우리가 ...

    “텔미”야! 같이놀자, 우리가 뛰거든...
  • 하루 2만5천불짜리 관광상품 등장

      지난 11월 중순 국내 각 언론들에는, 중국 부유층을 대상으로 4인 가족 기준으로 하루 비용만 무려 2만5000달러에 달하는 초호화 관광상품이 등장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쇼핑 위주의 패키지 여행객보다는 씀씀이가 훨씬 큰 부자들을 목표로 양보다 질을 높이겠다...

    하루 2만5천불짜리 관광상품 등장
  • 문제 많은 ‘키위빌드’ 사업

      노동당 정부의 ‘키위빌드(KiwiBuild)’ 정책에 의해 지난달 처음으로 오클랜드 파파쿠라에 18채의 주택들이 완공됐다. 뉴질랜드의 주택 구매력을 향상하기 위해 오는 2028년까지 10만채의 주택 건설을 목표로 두고 있는 키위빌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늘고 있다. 50...

    문제 많은 ‘키위빌드’ 사업
  • 빈치(Vinci) 마을의 천재, 레오나르도

    프랑스 VS 이탈리아 (II)       이탈리아가 낳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화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발명가였다.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대포, 전차 등 첨단 장비들에 대한 개념을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고안했다.    젊은 시절 식당에서 요리사...

    빈치(Vinci) 마을의 천재, 레오나르도
  • “내 꿈 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가 ‘꿈’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나에게 꿈이 있다”또는 TV 광고문구 중 한때 유행어가 된 “내 꿈 꿔”라는 말을 들으면 ‘꿈’이란 단어가 뭘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꿈은 희망적인 뜻에 사용할까, 다른 사람들은 좋은 꿈을 꾸...

  •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주말의 일과는 영화로 시작된다. 최근 개봉하는 헐리우드 영화가 그 대상이다.    영화를 보면서 줄거리도 중요하다. 하지만 번역에 대해서도 관심도 많다. 원어를 번역을 하는데 문화의 차이가 있어 곧이곧대로 직역을 하면 맛이 떨어진다. 어떻게 우리 감정에 ...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 10개월간의 태아와 엄마와의 치열한 생존경쟁

    임신과 출산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의 지속적인 축복과 응원이 필요한 엄마와 아이간의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정”입니다. 이 긴 시간동안에 임산부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따라서 엄마가 되는 ...

    10개월간의 태아와 엄마와의 치열한 생존경쟁
  • 피그말리온, 스티그마

    피그말리온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체면에도 불구하고 볼 발그래한 10대 소년이나 매료될법한 어여쁜 조각상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조각한 작품인데 말이지요.     하지만 그의 비정상적인 사랑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피그말리온, 스티그마
  • 지금의 나보다 어린 사진속의 엄마

    내 방에는 액자 안에 사진이 하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진을 보이는 곳에 두고 기억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내가 작은 액자 속에 넣어서 방안에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고, 가끔 보곤 하는 사진 속에는 유치원 원복을 입고 졸업을 축하한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사진속의 엄마
  • 생활의 발견과 창조

    살아가면서 심미적 추구를 게을리 하지 말고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라.  책을 즐기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라.     인생의 목적은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노...

    생활의 발견과 창조
  • 유가 3달러 시대 오나

    기름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리터당 2달러 중반선까지 올라섰다. 연립정부를 이끄는 노동당은 정유사들이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며 기름값 급등의 주범으로 정유사들을 지목한 반면 야당인 국민당은 정부가 기름에 너무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며 정부 여당을 비난했...

    유가 3달러 시대 오나
  • 하이누웰레 소녀 2편

    하이누웰레 소녀    누누사쿠(Nunusaku) 산에서 내려온 아홉 씨족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서(西) 세람의 이곳저곳에 머물렀다. 그들 중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아메타(Ameta)라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돼지의 흔적을 발견...

    하이누웰레 소녀 2편
  • 마추픽추, 만리장성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2007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단어는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나 죽기전에 가 보고싶은 곳 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되고는 합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을 꼼꼼히 적은 메모지들이 가득 들어있는 버킷’정도로...

    마추픽추, 만리장성
  • 마추픽추, 만리장성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2007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단어는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나 죽기전에 가 보고싶은 곳 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되고는 합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을 꼼꼼히 적은 메모지들이 가득 들어있는 버킷’정도로...

    마추픽추, 만리장성
  • 인간 관계

    수련생들의 인간 관계나 가족간의 관계는 시소를 타는 관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시소 탈 때 유능한 사람은 항상 상대방에 맞춰 줍니다. 두 사람이 탈 경우 상대가 무거운 사람이면 자기가 조금 뒤로 앉아 무게를 맞춰 주고 상대방이 가벼운 사람이면 앞으로 나와서 앉...

    인간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