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살이’의 외로움… 시와 글로 승화시킨 이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발행인)
 
 양원식.png

 

   2006년 5월 9일 오전, 양원식 선생이 갑자기 운명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필자와 함께 보드카 한잔을 곁들여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건강하셨기 때문이다.  흥이 많으셨던 고인은 그 날 저녁 "노래 한자락 하러 가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필자는 즉시 카자흐국립대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는 양선생님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그의 집에는 이미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조문객들이 붐비는 것을 보고 이것이 사실임을 깨닫았다. 
   양원식 선생은 이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돌이켜 보면 고인과의 인연은 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마티국립대학교 조선어과 교수로 파견된 필자는 고려일보 주필실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다. 이날 그는 필자의 대학신문기자 경력을 아시고 고려일보 한글판 제작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고 이후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몇 년간 쉰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17년째  동포사회의 행사나 고국 소식을 기사화해서 제공하고 있다. 
  고인은 생전 “고려인들이 모국어를 몰라서 이제 더 이상 한글판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동료기자들이 좀 더 급여가 높은 한국기업의 통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신문사를 지켰던 고인은 필자에게  “ 16면 중 한글판 4개면을 발행하기에도 벅차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그는 평소 "고려인동포사회의 지도자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동포언론을 비롯한 문화단체의 활성화와 모국어 재생사업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고려일보 편집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인의 개인적 삶은 그의 표현대로 ‘이역살이’, ‘나그네’ 신세였다. 소련국립영화대를 졸업하고 볼가그라드에서 60년까지 영화감독과 텔레비전 카메라감독으로 일하던 그는1984년 부터  〈레닌기치〉 문화예술부장으로 일하면서 타향에서의 외로움과 고향산천에 대한 향수를 시와 글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어머님 품 마냥 한없이 넓은 초원/ 밤하늘 별나라 바라볼 때면 구수한 들쑥냄새/ 달콤한 꿈까지 보게 됩니다/ 이역살이 괴로움도 잊게 됩니다.”고 노래했다.  
  소련작가동맹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등의 직함을 가졌던 고인은 한편으론 남에도, 북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가 주필로 있던 고려일보가 1994년부터 한국어 표준어 규정에 따라 두음법칙을 적용하고 한국기사체로 쓰기 시작하자 현지 고려인 동포들이나 북한 외교관들은 그에게 매우 거칠게 항의를 해 왔다. 반면 한국사람들로부터는 여전히 북한식 냄새가 난다며 외면당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고인은 “수십년 동안 써오던 문체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는가?” 라며 항변을 해 보곤 했지만 남과 북 그리고 고려인들로 부터도 공격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각종 동포행사나 간담회 자리를 빌어 “남북한의 학자, 언론인이 모여 용어와 명칭을 통일하고 이질화 되어가는 우리말을 다듬어야 한다”고 외치곤 했다. 허나 현실은 개선되기는커녕 그 간극이 더 벌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다. 
 마침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정착 8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최근 고려인협회는 이를 준비하는 회의를 가졌다고 하는데, 80주년을 계기로 고인이 평소 주장하던 ‘모국어 재생’을 효과적인 방법과 용어, 명칭의 통일 문제가 진지하게 고민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일회성 행사위주의 80주년이 아닌 고려인 동포사회의 미래를 조망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고인을 보낸지 10주기가 되는 올해, ‘이역살이’의 외로움과 ‘경계인’의 삶을 시와 글로 승화시킨 고인처럼 비록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이 땅에 건너와 이 땅에서 삶을 엮어 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바라기는 이제부터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주문하고 싶다. (이들의 자녀들이 조국으로 돌아가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있음에랴……) 
  

  • |
  1. 양원식.png (File Size:68.4KB/Download:75)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Profile image 코리아위클리-플로리다 2016.05.15. 23:12

"어머님 품 마냥 한없이 넓은 초원

밤하늘 별나라 바라볼 때면 구수한 들쑥냄새

달콤한 꿈까지 보게 됩니다..."

 

고 양원식 교수님, 참 멋지고 존경스런 분이군요.

사연을 읽자니 가슴이 짜르르 아파오네요.

우리 민족에게 원죄와도 같은 이 분단을 어찌할꼬...

 

수 년 전 단발마적 레드 콤플렉스 멍석말이를 당한

경계인 송두율 교수님의 그늘진 얼굴 모습도 떠오릅니다.

 

민족을 품에 안고 살다 가신 양 교수님의 작고 10주년을 애도합니다.

좋은 내용의 글 잘 읽고 갑니다.


  • 우슈토베를 다녀와서 file

      김양희(알마티토요한글학교장)         5월 20일 한글학교가 주최하고, 총영사관 (재외동포재단)과 LG가 후원한 '알마티 한글학교 20주년 , 고려인 정주 80주념 기념 역사 탐방이 있었다.   한글학교 중고등부와 학부모를 비롯하여 교민들까지 총 54명이 LG버스 두대로...

    우슈토베를 다녀와서
  •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 전망 file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는 저유가 국면에서 탈출하여 소폭 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4월 22일 IMF는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성장 전망을 발표하였습니다. 2017년 카자흐스탄의 경제성장률을 2.5%로 예측하였고, 2018년에는 3.4%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였...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 전망
  • 고려인들에게 한식(寒食)이란?  “산에 가는 날(성묘하는 날)”  file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온 지 벌써 23년째인 필자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작은 ‘기억’이 있다. 바로 ‘한식’과 관련된 추억인데, 그러니까 96년 봄의 일이다.    필자는 당시 근무처인 대학 외 고려일보 기자로서도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고려...

  • 대학생들의 올림픽, 알마티 동계 유니버시아드 아이스 하키, 스피... file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3학년 김정혜        2017년 1월 31일 할릭 아레나에서 치뤄진 일본을 상대로 한 아이스하키 경기와 2월 3일 메데우에서 남자 1000M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를 참관하였습니다.    저는 한인일보와 유라시아 ...

    대학생들의 올림픽, 알마티 동계 유니버시아드 아이스 하키, 스피드스케이트 참관기
  • 김상욱 발행인, 2017년 신년사 file

    "붉은 닭의 해, 과욕이나 부족함이 없도록 조화를 유지하는 한해되시길...."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습니다.    먼저, 독자 여러분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만복이 깃드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16년 병신년(丙申年)은 그 어느 해보...

    김상욱 발행인, 2017년 신년사
  • 전승민 주 알마티총영사 2017년 신년사 file

    [신년사] "올해는 한-카 수교 25주년, 고려인 동포 정주 80주년, 고려극장 설립 8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 한민족의 위상을 높일 계기"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알마티총영사관 전승민 총영사입니다.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총...

    전승민 주 알마티총영사 2017년 신년사
  • 러시아인, 그들은 누구인가?

    [특별기획] 러시아인, 그들은 누구인가?     전적이고 극단적인 사랑과 우정 극한 추위, 팽창과 좌절의 역사에서 형성   <이 원고는 Chindia Plus 2016년 12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올해 23세인 안젤리나 니콜라우(Angela Nikolau)는 루퍼(roofer)다. 루퍼는 높은 건...

  • [기고]  홍범도 장군 묘소,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file

                                              무성한 잡초와 깨진 보도블록이 황량함 더해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 수석연구원)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소. 2016년 9월2일. 사진 = 김상욱>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안내판.  2016.09...

    [기고]  홍범도 장군 묘소,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 창가는 애국 계몽가, 일본노래 아니다 file

      작곡가 이호섭 논문에서 밝혀     <작곡가 이호섭선생>   그 동안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불렸던 창가,  특히 7.5조 창가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시가형식으로 알려져 왔으나 일본에는 7.5조 시형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음악형식도 서양에서 도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

    창가는 애국 계몽가, 일본노래 아니다
  • 내가 본 ‘아크몰라’와 ‘아스타나’ - ’상전벽해’는 이를 두고 하... file

    <'수도의 날'을 축하하며>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 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1997년 눈보라가 치는 12월 중순, 필자는 ‘아크몰라’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 도시는 카자흐스탄...

    내가 본 ‘아크몰라’와 ‘아스타나’   - ’상전벽해’는 이를 두고 하는 말 -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3 file

    한국, 유라시아 유목제국의 역사를 밝히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지난 25일, 이쉭박물관에서는 열린 내년 한-카 합동 발굴조사에 대한 업무협정 체결식 후 양측 대...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3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2 file

      중앙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투르크화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아랍 침략을 받기 전 중앙유라시아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메르브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가장 유력했지만, 네스토리...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2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6

      흉노의 쇠퇴와 분열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한나라는 고조 이래 흉노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한 무제가 즉위하면서 충실한 국력을 배경으로 적극적인 대흉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먼저, 기원전...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5

      사르마트와 흉노시대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흑해 북부연안에서 후기 스키타이 문화가 번창한 기원전 4세기 경, 카스피해 북방 초원에서는 새로운 유목민 세력이 발흥하고 있었다.  이른바 ‘사르마트’라 불리는 집단이 그들이다....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1 file

                            중앙유라시아의 이슬람화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소원을 빌며 나무가지에 헝겊을 묶어 놓은 모습은 카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1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0 file

    톈산위구르 왕국, 몽골제국 형성에 공헌하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지지난주 필자는 중국의 우룸치에서 이닝을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오는 손님들을 마중하러 호르고스를 다녀왔다.  신실크로드 물류현황을...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0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9 file

    오아시스 농경민의 원래 고향은?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우리는  지난호까지 기원전부터 유라시아 초원에 살았던 유목민들의 역사를 훑어보았다.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9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8 file

       돌궐과 투르크 그리고 터어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우리는  지난호(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7)까지 기원전부터 대략 기원후 5세기 정...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8
  • [양원식 전 고려일보주필의 10주기를 맞으며] [1] file

    ‘이역살이’의 외로움… 시와 글로 승화시킨 이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발행인)          2006년 5월 9일 오전, 양원식 선생이 갑자기 운명했다는 연락을 받았...

    [양원식 전 고려일보주필의 10주기를 맞으며]
  •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7 file

    몽골고원의 원래 주인은?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기원전후 동방의 세력자였던 흉노입니다. 몽골고원 전체를 차지하였고 한 제국에게 공물을 받았으며, 서쪽...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