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11회] 뇌물 공무원·이승만 정책 신랄한 고발…5차례나 필화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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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비석이 1954년 한국전쟁 후 타락한 사회윤리를 고발해 잇달아 필화를 겪은 서울신문 연재 장편 <자유부인> 중 계집아이가 주인의 화장품을 몰래 쓰다가 여주인공 오선영이 나타나자 놀라는 장면이 담긴 171회.
 

(서율=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독재는 평화와 안정이 천적으로 혼란과 위기, 갈등과 빈부격차가 보약이다. 그러나 그 길항(拮杭)관계가 무너지면 혁명으로 치닫는다. 사월혁명도, 12월9일 촛불혁명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을 나폴레옹이 횡령했듯이 사월혁명은 5·16쿠데타에 갈취당했다. 12·9혁명도 날도둑질 안 당하려면 촛불 켠 이 손들을 영원히 서로 굳게 잡아야 할 것이다.

전쟁·독재 속 무너진 사회윤리

휴전 1주년을 이틀 앞둔 1954년 7월25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방미 길에 올랐다. 워낙 껄끄러웠던 둘은 정상회담으로 불화를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푸른 빛깔 양복 차림으로 미 상하합동회의(7월28일) 연설에서 소련이 수소탄을 대량 생산하기 전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미국의 공군과 해군의 힘이 필요한 것이지만, 미국의 보병은 단 1명도 필요치 아니하다"면서, 한국이 "20개 사단을 여러분에게 제공하였고, 또 앞으로 새로운 20개 사단을 구성할 수 있는 인원을 제공할 것입니다"라고 유창한 미국말로 호소했다. 그는 주요 도시와 하와이까지 가서 오로지 전쟁만이 해결책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8월13일 귀국하자 국내 언론들은 "웅대한 반공전략 갈파/ 빛나는 이 대통령의 방미 성과"라고 찬양했다. 5일 뒤 "미, 대한 경원(경제원조) 부진!" "주한미군 중 4개 사단 수개월 내 철수/ 전략적 이익 위해 재배치 예정"이란 기사가 큼직하게 떴다.

나라는 엉망이었다. 특권은 호랑이처럼 날뛰며, 부패와 부정은 여우처럼 간교해졌고, 불륜과 부도덕은 들고양이처럼 나댔다. 댄스붐 판에 김해 출신 박인수가 전후의 첫 제비로 암약했다. 해병 헌병 대위였던 그는 약혼녀가 배신하고 어느 대령과 결혼해 버리자 실의에 빠져 군기를 위반, 불명예제대(1954년 4월)를 당했다. 현역으로 행세하며 1년여 동안 70여 여인들(미용사 하나만 처녀였다고 증언)과 놀아나다가 이듬해 법정에 섰다.

간통쌍벌 조항을 국회가 통과(1953년 7월3일, 그 전에는 단벌제. 2015년 2월26일 폐지)시킨 자체가 전쟁으로 인한 윤리의식의 위기를 방증한다. 친고죄라 고관 집 영양들은 시침 뚝 떼버린지라 두 여인(여관집과 탁구장집 딸)이 고발자가 되었다. 권순영 판사는 "E여대가 박인수의 처가"라거나,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언변으로 판사로서 첫 설화를 당했다. 제비는 1심에서 풀려났으나 항소심(김세완·김홍섭·임항준 판사)에서는 "아무리 혼란한 사회상황 아래서라 해도 그 여성들의 정조가 법의 보호권 밖에 있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1년6개월 실형이었지만 모범수로 1년 만에 출옥했다(김태호, <법정에 선 사람들>, 삼민사, 1982년).

다섯 번 필화 입은 문제작 <자유부인>

이런 풍조를 진솔하게 담은 소설이 정비석의 <자유부인>('서울신문' 1954년 1월1일~8월6일)으로 5차례나 연거푸 필화를 입었다.

첫 필화가 일어난 3월1일까지 소설의 주인공 장태연 교수는 "감색 스커트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은미(미군부대 타이피스트)의 하얀 종아리"에 "별안간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가 낸 돈으로 영화를 한 편 보고는 귀가, 밤 열시 넘은 시각에 백지에다 박은미란 이름을 낙서한다. 아내 오선영은 옆집 대학생 신춘호의 방에서 춤을 배우다가 "입술을 고요히 스쳐"가자 "미지근한 태도가 오히려 불만"이었는데 짙은 포옹과 탱고 스텝으로 발전한다. 그녀는 화장품 상점 파리양행 관리인으로 취직해 사기꾼 백광진과 사장 한태석을 번갈아 만난다.

이를 황산덕(서울대 법대 교수)은 "대학교수를 양공주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대학신문', 3월1일)는 "스탈린의 흉내"를 내는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는 매카시즘적 공격을 가했다. 대법관 홍순엽이 개입하면서 논쟁은 작가가 판정승했지만, 소설은 후반부가 '자유부인'에서 '조신하는 부인'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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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장면 때문에 특무부대 등에 불려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아래는 같은 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자유부인> 초판 표지.
 

두 번째 필화는 만우절 코미디다. '제일신보'가 4월1일 "수(遂)! '자유부인' 말썽/ 정비석씨 대 황산덕 교수 간에 난투극/ 쌍방 중상으로 입원 중"이란 제목 아래 사건 현장 하모니 다방 사진에다 레지 미쓰 최, 대학 측, 신문사 측, 담당 문 검사 측의 소견까지 게재했다. 만우절 촌극 중 금메달급이다.

세 번째는 진짜 필화다. 오선영이 이혼한 친구 최윤주 집엘 들렀는데, 마침 주인의 화장품을 몰래 바르다가 들킨 '계집아이'가 놀라 겁을 먹었다. 선영은 수천만금의 뇌물을 받는 공무원들이 그 계집아이만 했으면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은 단행본 출간 때 고의로 삭제해버렸다.

작가는 "시경, 치안국, 특무부대 등등 온갖 기관의 취조"에다 연재중단 압력까지 받았으나, '석명서'를 광고란에 낸 다음날(6월25일) 하루만 휴재했다.

소설은 그 다음 장 '백척간두'에서 1954년 5월20일 총선을 다룬다. 장 교수가 "국민의 대변자"인 X를 찍겠다니까 오 여사는 아는 사이인 A씨의 지프차라도 얻어 탈지 모른다며 찍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장 교수는 아내를 설득, 오 여사도 X씨를 찍기로 마음을 고친다. 정비석은 작심하고 이런 장면을 삽입한 듯하다.

국민적 저항 부른 '한글 간소화'

네 번째는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정책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다. 맞춤범 개정 이전의 <성서>로 한글을 익힌 늙은 독재자는 신문이나 공문서 읽는 게 고역이었다. 그래서 복잡한 받침을 열 개만 남겨 '믿다'를 '밋다'로, '갚다'를 '갑다'로 하고, 소리 나는 대로 '길이'를 '기리'로, '높이'를 '노피'로 고치자는 이 기발한 옹고집!

독재는 추종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1953년 한글날, 한글 간소화를 지시한 뒤 두 총리(백두진·변영태)에 두 문교장관(김법린·이선근)을 볶아댔지만 범국민적 저항만 키웠다. 한글 간소화의 앞장엔 이선근이 섰는데 그는 시종 이승만 편이었다. 정부와 자유당 연석회의의 반대결의에도 이승만이 굽히지 않자 자유당도 7월16일 지지 선회로 돌아서는 장면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연상케 한다.

여론에 밀리던 이승만은 우선 공문서만 개정하고 민중은 그 뒤에 쓰도록 하자는 해괴한 주장(24일)도 했지만 이승만 치하에서 가장 거센 국민적 일체감을 이뤘던 저항에 굴복, 철회(1955년 9월19일)했다. 그래도 박근혜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비하면 신사적이었다.

여론을 판가름한 건 7월11일 국회 무소속동지회 주최 방청회였다. 반대자로는 김윤경, 최현배, 이숭녕, 김선기, 오종식, 이관구, 모윤숙, 이하윤, 조지훈, 서울사대 부속국민학교 교장 김기서,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장 김창업이 나섰고, 이승만 지지자는 정경해, 서상덕이 있었다. '동아일보'는 '공기총'에서 "지하의 응원/ -이겨라!/ -이겨라!/ 이군 이겨라!-연산군/ 이 문교장관 귀하"라고 야유했다.

<자유부인>은 장 교수 아내 오선영이 가출 20여일 만에 그 청문회를 방청, 남편의 탁월한 발표에 감동, 함께 귀가하는 것으로 끝난다.

<자유부인>의 다섯 번째 필화는 1956년 영화화되면서 키스 장면이 말썽이었다. 한국 영화에서 첫 키스는 한형모 감독(1917~1999년)의 <운명의 손>(1954년)에서 죽어가는 여간첩에게 특무대 대위가 스치듯(<자유부인> 수준) 2초간 하는 것이었다. 여배우 남편이 감독을 고발하겠다는 소동을 일으킨 후 나온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감독) 역시 키스로 많은 물의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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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비석이 1954년 한국전쟁 후 타락한 사회윤리를 고발해 잇달아 필화를 겪은 서울신문 연재 장편 <자유부인> 중 계집아이가 주인의 화장품을 몰래 쓰다가 여주인공 오선영이 나타나자 놀라는 장면이 담긴 171회.
 

필화당한 대목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 도장 하나 찍어 주고도 수천만금의 뇌물을 예사로 받아먹는 이 세상에서, 주인아주머니의 화장품을 잠깐 도용하다가 불시에 나타난 손님에게 겁을 집어먹는 아이라면 그처럼 양심적인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나라의 공무원들이 이 계집아이만큼만 양심적이었다면, 오늘의 현실은 훨씬 명랑해졌을런지도 모를 일이다."('서울신문' 1954년 6월21일. <자유부인> 중 '수지불계(收支不計)'10)

작가의 사과문

"석명서(釋明書). 본인은 지금 서울신문 지상에 장편소설 <자유부인>을 연재 중이온데 해(該) 소설 6월21일부 제171회분 중에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 도장 하나 찍어주고도 수천만금의 뇌물을…' 운운은, 실상은 일부 부정 공무원들의 양심적 반성을 촉구하자는 의도에서 쓴 것이었으나, 일단 발표해 놓고 보니 표현이 조홀(粗忽)했던 관계로 전체 공무원들의 위신을 손상케 하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케 되었사와 심히 죄송스럽기에 자에 지상을 통하여 깊이 석명하는 바입니다. 단기 4287년 6월22일 우 정비석."('서울신문' 6월24일 광고)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 임헌영 교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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