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를 방문한 국빈들을 초청한 연방 정부 만찬장에서 양국 정상들이 상대국 국가수반을 위한 건배사를 한다. 외국 정상은 “호주 여왕(Queen of Aystralia) 엘리자베스 2세를 위하여”라는 건배사를 하게 마련이다. 공식 세리모니를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호주 여왕’으로 불리는 것을 처음 본 참석자들은 영연방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필자도 지난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마닐라 APEC 정상회의 후 호주 방문시 수행 취재로 만찬장에 참석했을 때 놀랐었다. “호주에 여왕이 있었나?”라는 단순 의문과 “왜 상징적 국가수반인 연방 총독대신 영국 여왕에게 호주 여왕 호칭을 붙여 이런 제도를 고수할까?”라는 의문과 함께 호주의 입헌군주제(Constitutuinal Monarchy) 존속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호주 관공서를 가면 아직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사진이 국가수반으로 부착돼 있다. 이때로 동일한 논리다. 영연방의 일원이기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호주 여왕(Queen of Australia)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번 주(25일) 토니 애보트 총리는 깜짝 쇼를 했다. 거의 30년 만에 호주에서 영국왕실 작위를 부활시켰다. 매년 호주 사회에 탁월한 기여를 한 인물 중 최고 4명까지 기사(knights) 또는 귀부인(dames) 작위를 부여할 것이라고 전격 발표했다. 그러면서 첫 케이스로 28일(금) 퇴임을 한 호주의 첫 여성 연방 총독 쿠엔틴 브라이스 전 총독에게 귀부인 작위를, 호주 군 합참의장을 역임한 피터 코스크로브 신임 연방총독에게는 기사 작위를 부여했다. 코스그로브 예비역 육군대장은 26일 취임부터 ‘연방총독 피터 코스크로브 경(卿) Governor-General Sir Peter Cosgrove)’으로 불린다.


애보트 총리는 작위 부활을 당내 의원 총회나 내각과 논의 과정을 생략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몇몇 자유당 중진들과 상의를 했다”면서 “영국 왕실에 직접 건의해 승인을 받았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절차상 문제를 따지기보다 호주에서 2014년에 이같은 영국 왕실 작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필자도 이 부류에 속한다. 사회적으로 많은 기여를 한 호주인들에게 1년에 2번, 1월16일 오스트레일리아 데이 국경일과 6월 여왕생일에 호주 국민훈장(Order of Australia) 수훈자를 발표한다. 여기에도 공적과 직분(군인, 경찰, 소방대원 등)에 따른 등급이 있다. 그런데 구태여 영국 왕실의 유산인 작위를 거의 30년 만에 부활시킨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다.


1986년 봅 호크 총리(노동당)는 작위 부여가 호주의 현실과 연관성이 거의 없고 호주의 자주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서 당시 여론을 반영해 사실상 이 제도를 폐지했다. 그후 모든 정부들이 이 제도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29년 후 애보트 총리(자유당)는 보란 듯 전격 부활했다. 영국에 체류하던 호주인 부모로부터 출생한 애보트 총리는 그의 정치적 멘토인 존 하워드 전 총리에 이어 ‘입헌군주제를 위한 호주인들(Australians for Constitutional Monarchy)' 단체의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철두철미한 입헌군주제 지지자로 공화국(Republic) 제정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강경 보수 성향의 정치 지도자다. 11년 반 재임 기간 중 영국 왕실을 각별히 챙긴 하워드 전 총리는 퇴임 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별도의 훈작을 수여받았다. 애보트 총리도 이를 기대하는 것일까?


호주 정치권에서 ‘아시안 세기(Asian Century)’를 표방하며 호주의 미래를 설계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 시점에 ‘퀘퀘묵은’ 영국 왕실 작위를 다시 꺼내든 것은 미래 지향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호주 전체 교역의 40%를 차지하는 한중일 동북아 3개국 순방을 앞둔 애보트 총리의 보수 회귀에 대해 실망감이 든다.


하워드 전 총리는 아프가니스탄 파병과 이라크 참전에 앞장서면서 국내외에서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이 임명한 ‘태평양지역 보안관’이라는 창피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호주는 초록은 동색이라면서 앵글로 월드의 보스인 미국과 맡 형격인 영국이 참전하는 중동 전쟁에 동참했다. 물론 표면상 명분은 훗날 있지도 않은 것으로 판명된 ‘대량살상무기 발본색원’이었다. 그러나 영어권 리그로 분류되는 5개 우방국(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중에서 캐나다와 뉴질랜드가 이라크 침공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자주적인 결정을 내린 것에 비교하면 호주 보수 정치권의 영미 의존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역사에서 익숙한 ‘비굴한 사대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한 주 후 애보트 총리는 대규모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일본-한국-중국(8-11일) 순서로 동북아 3개국을 순방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호주주간’을 설정해 앤드류 롭 통상장관이 이끄는 대대적인 호주 홍보 행사와 다양한 경제인 모임을 갖는다. 6백명 이상의 호주 기업인들이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15위권 경제 규모인 한국, G2(중국) G3(일본)을 연쇄 방문하는 애보트 총리는 경제 관계에서는 더 많은 교류 증대의 필요성을 분명히 역설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내외에서 가혹할 정도라는 비난을 받는 난민정책, 시대를 역행하는 영국왕실 작위 부활, 소수민족 커뮤니티의 강력한 반발 속에 인종차별법 개정 추진 등 ‘애보트 스타일의 보수 우익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 외에도 상원에서 부결된 탄소세 폐지 재추진, 노조 무력화와 고용주 위주의 노사관계법 개정 움직임 등에 대한 불만으로 2주 전 호주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이 ‘안티 애보트 정부’ 시위를 갖고 현 정부의 강경 일변도 정책을 규탄했다.


일본 아베 정권의 ‘보수우경화’ 정책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 시점이다. 애보트 총리의 보수 강경 정책은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위험성을 갖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호주 주류사회는 비영어권 아시안 커뮤니티가 차지할 공간이 매우 협소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기우(杞憂)일까..?


 (호주한국일보 2014년3월28일자 시론)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미국인의 군인 우대 관습 본받아야 file

      곳곳에서 군에 대한 신뢰 표현 (로스앤젤레스=코리아 위클리) 홍병식(내셔널유니버시티 교수)= 거의 모든 회사는 회사의 평판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돈과 노력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돕는 자선 사업체를 열거하기도 하고 언론 매체에 회사의 선행을 알리기 위하...

    미국인의 군인 우대 관습 본받아야
  • 원로가 존경받는 사회 되기를…

    청소년이 우리의 미래라면 노인은 그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노인들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원천이며, 사회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자, 인생의 값진 경험과 지혜를 갖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고 우리의 내일이 있는 것이다. ...

    원로가 존경받는 사회 되기를…
  • 통일시대의 준비와 미래

    ‘통일강연 특강’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차세대들에게 인지시켜 주고, 대한민국의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을 끌어낸 것은 의미있는 일로 평가된다. 헌법 제 68조에 명시된 평화통일 정책자문기관으로서 1980년에 범국민적 통일기구로 설립된 민주평화통...

    통일시대의 준비와 미래
  • [파미르 여행기 10] 중-소국경분쟁의 흔적들.... 타-키 국경엔 한... file

    [파미르 여행기 10] 중-소국경분쟁의 흔적들.... 타-키 국경엔 한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땅 거대한 산맥을 품으며 수많은 물줄기를 만들어 내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그곳엔 혹독한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

    [파미르 여행기 10] 중-소국경분쟁의 흔적들.... 타-키 국경엔 한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 [파미르 여행기 9] 전설의 검은 호수 ‘카라쿨’, 천제 환인의 자손... file

    [파미르 여행기 9] 전설의 검은 호수 ‘카라쿨’, 천제 환인의 자손들이 살던 마고성이 있던 곳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땅 거대한 산맥을 품으며 수많은 물줄기를 만들어 내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그곳엔 혹독한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

    [파미르 여행기 9] 전설의 검은 호수 ‘카라쿨’, 천제 환인의 자손들이 살던 마고성이 있던 곳
  • [파미르 여행기 8] 파미르인들의 삶은 야크와 함께 하는 삶 file

    [파미르 여행기 8]     파미르인들의 삶은 야크와 함께 하는 삶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땅 거대한 산맥을 품으며 수많은 물줄기를 만들어 내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그곳엔 혹독한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김...

    [파미르 여행기 8]   파미르인들의 삶은 야크와 함께 하는 삶
  • 러시아와 터키와의 경제전쟁, 누가 이길까? file

      지난달 23일 시리아에서 러시아 전투기 격추 사건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터키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서방의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고, 저유가로 경제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확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서...

    러시아와 터키와의 경제전쟁, 누가 이길까?
  • 이국 땅 첸나이의 삶 file

    첸나이는 지금 큰병을 앓고 있다. 100여년의 기록을 깨버린 대홍수. 한달을 넘긴 빗줄기는 첸나이와 주변 지방 도시들을 삼켜버렸다. 주택 삼분의 일이 물에 잠기고 전기절단. 식수공급 중단, 인터넷 전화 모든 통신 두절. 도로침수. 기름고갈. 교통마비... 이에 따라서...

    이국 땅  첸나이의 삶
  •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특징과 전망 file

      최근 IS 테러 확산에 따른 불안 심리가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중앙아시아 이슬람에도 의심의 눈초리가 쏠리고 있다. IS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같은 수니파인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도 그 영향력...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특징과 전망
  • 저무는 한-몽골 수교 25돌, 몽골 한인 사회 위상 강화와 무궁한 ... file

    HOME > 알렉스 강의 몽골 뉴스 >         저무는 한-몽골 수교 25돌, 몽골 한인 사회 위상 강화와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지금이야말로 주몽골 대한민국 대사관 요원들과 몽골 주재 한인 동포들이 유기적으로 융합하여 ‘공공 외교 협력 요원 제도’ 활동을 묵묵히 개시해...

    저무는 한-몽골 수교 25돌, 몽골 한인 사회 위상 강화와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 미 국무장관 케리가 중앙아시아로 간 이유는? file

        19세기 영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당시 무주공산이었던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렸다. 제국주의 시기 영국은 인도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는 남쪽 부동항을 찾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등 지금의 중앙아시...

    미 국무장관 케리가 중앙아시아로 간 이유는?
  • 강한 지도자는 겸손합니다 [1] file

    독재 스타일 경영자 시대는 지나… 이타심 구비해야     (로스앤젤레스=코리아위클리) 홍병식 교수(내셔널 유니버시티) = 현대의 경영분야에서 경영지도자의 정의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언성이 높고 독재성 지도자가 강한 지도자로 여겨졌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현대의 기...

    강한 지도자는 겸손합니다
  • “응답하라 1988” [4] file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행진_1985년)   1980년대 중후반, 젊은 층은 ‘들국화’에 열광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가...

    “응답하라 1988”
  • 얼래,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 아래는 지난 28일(토) 오후 7시 '역사와 평화'(역평) 포럼 첫 모임에서 행한 '여는 말'을 정리한 글입니다. '역평'은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코리아위클리>가 마련한 정기 모임으로, 궁극적으로는 남북화해와 분단의식 극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임은 ...

    얼래,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 티모르의 추억 file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제목의 고갱의 그림을 기억합니다. 아마 야자수 사이로 남방의 입술이 두터운 여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보여주던 고갱의 그 그림을 저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이름...

    티모르의 추억
  • 가난에 대해서 [3] file

    가난은 생활이 좀 남루하다’고 하는 서정주의 말은 가난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멋진 시적인 구라입니다. 무소유를 말하는 법정 스님의 말도 가난하고는 거리가 먼, 기본적인 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말이죠. 그리고 법정스님이야 가정이 없으니까 가난한 아내의...

    가난에 대해서
  • 우리 책임이지만, 우리 죄는 아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좀 특이한 나라 아닙니까?”, “네? 뭔소리여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도 한가운데서 테러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연쇄로 여섯군데 동시다발로 일어났는데, 국가 안보를 책임진다는 정부의 그 어느 누구도 문책...

    우리 책임이지만, 우리 죄는 아니다
  • 나이 들어 연습하는 행복 file

    2000년대 초, 캄보디아에 와서 가장 즐거운 일은 망고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망고지만, 그때에는 정말로 세상에이렇게 맛있는 과일이 다 있나 할 정도로 맛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는 집에도 망고나무가 있습니다. 작년에 이미 근 100여개를 따서 먹었습니다...

    나이 들어 연습하는 행복
  • 피의 악순환 file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는 9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죽음으로 몰았다.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사건의 장본인인 ‘검은 9월단’은 9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전 세계에 악명을 떨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테러도 내성을 가지는지,  한 사람...

    피의 악순환
  • 한불수교 130주년 행사, 그들만의 축제인가?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수 많은 문화예술 행사들이 파리를 비롯, 프랑스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불상호교류의 해, 말 그대로 우리 대한민국이 프랑스와 교류를 시작한 130여년 동안 양국 간의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교류가 이어져 왔고, 한국의 급성장...

    한불수교 130주년 행사, 그들만의 축제인가?